바람을 생각하다
2007.03.04 01:56
바람을 생각하다
성 영 라
‘이건 배신이다…’ 고개 들어 눈 한번 맞춰볼 틈도 없이 바쁘게 지내는 사이, 창 너머로 보이는 대추나무에는 어느새 가을이 조롱조롱 매달려있다. 아침밥상에 앉아 생뚱맞은 생각에 빠져있는데 어머님이 물으셨다.
“바람이 왜 부는지 아니?”
남편과 나는 느닷없는 질문에 어리벙벙해져 서로를 쳐다보았다.
“봄바람은 겨우내 움츠렸던 땅과 나무들, 주춤주춤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새싹과 어린 잎을 깨워 일으키려고 분다. 만물이 기지개를 켤 수 있도록 응원 나온 거지. 가을바람은 여름 내내 열매를 키우느라 힘을 다한 나무와 잎을 쉬게 하려고 부는 거란다.” 약간은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일터에 가서도 종일 ‘바람’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최초의 바람은 그리움이다. 가을볕이 은근하던 외갓집 뒤뜰 툇마루, 홍시로 먹을 것과 곶감용으로 감을 분류하시던 외할머니의 느긋한 손길, 낡은 흑백사진 같던 뒷집 흙담벼락, 소곤대던 풀꽃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과 내 작은 몸뚱이를 쓰다듬고 지나가던 바람. 그 순간 그 바람이 내 작은 가슴속에 야릇한 슬픔과 그리움의 싹을 트게 했었나 보다. 나는 노래 하나를 계속해서 처량맞게 불러댔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그 때 나는 외가에 맡겨져 지내고 있을 때인데, 아마 가족들이 몹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면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솎아내지던 감들을 보며 얄궂은 동병상련을 느꼈는지도.
그 날 이후 세월이 흐른 뒤로 가끔씩, 그렇게 바람은 노래가 되었고 풀꽃이 되었다가 가을빛 나는 감이 되기도 하고 지난 날의 외할머니와 엄마 얼굴이 되기도 한다. 바람이 불 때는 그리운 사람들과의 새알 같은 기억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풀꽃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 가는 때에는 더욱 더.
졸고 있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고 꽃과 벌레에게 곰살갑게 말 건네고 지친 이의 땀도 닦아주고 구름의 등을 힘껏 밀어주기도 하는 바람. 발길 닿는 대로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그래도 어디 한 군데 뭔가에 집착하려는 낌새라고는 보이지 않는 쿨(cool)한 친구. 안달복달하며 포기하지 못하는 나와는 도통 닮은 구석이라곤 없지만 온종일 생각하고 느끼고 품고 했더니 내게서도 설핏 바람냄새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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