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흉터가 있던 낙타의 생애처럼
2007.04.25 08:11
획을 그으며 한지에 채워지는 글은 서서히 말라 쾌쾌한 냄새 베인 벽에 걸려 시간의 경계를 넘는다 이민 떠나는 자식 손에 말없이 건네는 가훈은 공항 수화물 검색대에 내 밀리자 바다에 떠돌던 지난 세월의 습기들이 밀항하듯 이국의 관문을 통과한다 불빛에 반사한 글자 받침들이 울렁이며 어지럽다가 윙윙 거리는 활주로 바람으로 진정한다
자식들 하루에 한 뼘씩 커 가는지 모르고
지리산 계곡 뒤집고 다니던 시뻘게진 눈
총성 닿아 떨어지는 끝에 붉은 노을이 지고
살아생전 그토록 가슴에 달고 싶었을 훈장
한국전쟁 때 빨갱이 잡던 유엔경찰이었던
줄쳐진 갱지에 쓰고 또 쓰던 아버지 이름
잠들었다 깨어난 아침은 다녀간 발자국뿐
큰형 중학교 입학식에 내리던 삼월 눈발처럼
빨갱이 던진 수류탄 흰 꽃 날리는 폭죽
스핑크스 미라를 감싼 붕대 밖 남은 흔적
붉은 흉터들이 식어진 별로 박혀있던 가슴
손대면 툭하고 터질 강둑 같은 어머니 눈에
오래도록 참은 생애에 진눈깨비가 내렸다
추상화 걸린 반대편 벽에 걸려 신도시 대기를 마시던 가훈의 문향은 사라지고 오래된 미움의 각질 벗겨지자 강이 된 아버지의 청춘이 행성처럼 나타나 사라진다 전차로 달렸던 아버지 열정 반만 닮았어도 흔들리던 내 사상의 파편이 된 삶을 헛되이 샛강에 흘려보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달려왔을지 모를 기차가 경적 울리며 유니언 역으로 들어오자 키만 큰 야자수가 거뭇한 연기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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