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도 색이다
2007.05.04 16:35
흰색도 색이다 “미주문학”가을호 2002
조그만 손바닥 안에 잡힌 손거울은 각기 여러 색의 이뿐 테두리를 하고 있었다. 나의 소꼽친구 증녀는 연 분홍색을 골랐고, 나는 당연히 하늘색을 골랐다. 우리는 잡화상에서 손거울을 사 들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왜 이 이뿐 하늘색을 고르지 않고 그 촌스런 분홍색을 골랐니? 그녀는 대뜸 이렇게 대꾸했다. 너는 왜 이 이뿐 분홍을 안사고 그걸 샀어? 나는 그 때부터 사람이 사물을 보는 눈이 얼마나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홉 살 때었다.
그러다 차차 색깔을 보는 눈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해갔다. 영원히 예쁠 줄만 알았던 하늘색이 내 머리서 퇴색해 갔고, 며칠 전에는 증녀의 손거울과 똑 같은 연 분홍색 장미를 며느리에게 안겨 주었다. ‘해피 바렌타인즈’ 라고 쑥스럽게 뇌이면서 색깔의 기호도 달라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십 년 전 일이다. 나는 6.25 때의 피난지 부산에서 결혼을 했다. 누런 세멘트 포대가 밥상이었던 때다. 끼니가 끝나면 행주로 싹 싹 닦아 접었다가 다시 쓰곤 하던 피난살이 때-. 그러나 아무리 피난살이라도 남자 쪽에선 할 것은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구했는지 허름한 함 하나를 구해 시동생에게 메어 보냈다. 그 속에는 비로도 치마저고리 감과, 생 년 월 일을 적은 사주 한 장이 들어있었다. 내게 문제가 생겼다. 그 옷 한 벌이 문제 된 것이 아니라 그 벨벳 옷감의 색이 문제였다. 내가 진저리 치도록 싫어한 보라색이었다.
내 남편 될 사람과 맏동서가 될 분이 고른 것이란다. 왜 이런 색을 골랐을까. 동서님은 동경 미술 대학을 나온 미술가신데 어째서 이 색이 좋았을까. 그 후 나는 거의 그 옷을 입지 않았다. 보기도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진 보라색 벨벳은 아주 멋진 색깔이었을 것이다. 그 색이 죽도록 싫었으니 나는 그들보다 오십 년은 뒤진 색맹이다. 지금은 보라색을 무척 좋아하고 있으니 부끄럽다.
그림 한 장 못 그리면서 편색이 심했던 내가 좋아한 색은 흰 색과 까만색이었다. 더욱이 두 색이 배합된 부라우스라도 생기면 마르고 닳도록 그것만 입고 다녔다. 한번은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하며 답답해했다. 너는 왜 항상 흰색이냐? 그 친구는 화려한 색을 참 좋아한 친구였다. 그녀에게 흰색은 색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에 오자마자 이 친구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 동안 내게 너무나 잘 해 주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갔다. 가진 것이 많은 그녀에게는 잠옷이 무난할 것 같았다. 거기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하늘하늘한 하얀 쉬폰 잠옷 셑이었다. 옷을 보낸 후 얼마 만에 엽서가 왔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파티에 가듯 흰 까운을 걸치면서 네가 왜 흰 색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기뻤다. 나를 알아 준 것 같아서였다.
미국에 이민 올 때도 바로 이 흰옷이었다. 70년 대 초는 지금 같은 나들이 기성복이 없었다. 양장점에서 맞춰 입어야 했다. 상점에는 가지각색의 옷감들이 눈부시게 쌓여 있었으나 나는 거기에서 흰 옷감을 골랐다. 나를 가장 부담 없이 감아 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두 달 후에 어머니를 위한 상복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방정맞게 흰옷을 고른 내가 서글프기도 했다. 나는 꼭 일 년을 흰옷으로 살았다. 흰 상복으로나마 어머니를 기리고 싶었다. 후에 내가 사 입은 흰옷이 간호원의 유니폼이었다는 것을 알고 웃었다. 그러나 내가 그 때 그것을 알았다 해도 간호원은 아니지만 서슴없이 사 입었을 것이다.
내가 왜 흰색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먼 지난날에 생각이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에 흰색이 있었다. 우리 식구는 대 가족이었다.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랐을 어머니는 이불호청을 필륙으로 사들였다. 그리고 그 광목(면으로 된 천)을 이불감 하나씩 맞춤하여 자른 후, 잿물로 푹푹 삶았다. 무명천의 누런색을 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와 아재 (친척 아주머니)는 잿물 냄새와 김이 오르는 광목을 함지에 담아 이고 성천강에 나간다. 그들은 누런 광목을 방치로 힘껏 두들긴 후, 강물에 헹궈 약간의 잿물을 뺀다. 그리고 백사장에 광목을 넌다. 광목은 일사정연하게 줄을 선다. 사열을 받고 있는 병사들의 행렬이다. 나는 사열 장이 되어 광목을 응시하고 있다. 이때부터 뜨거운 태양 아래 광목의 불볕 단련은 시작된다.
주로 이 작업은 여름철에 했던 모양이다. 여름 방학 때가 되면 나는 강가에 나가서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가 펴놓고 들어가신 빨래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아주 바쁘다. 젖은 모래로 성도 쌓고, 점심에 마실 모래 우물도 판다. 그리고 센 바람으로 빨래 자락이 날리면 뛰어가서 더 큰 돌로 바꿔놓는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돌의 크기도 달라진다. 광목 귀퉁이를 다시 돌로 눌러 놓고 나고, 모래장난도 실증이 나면, 나는 나의 소우주인 함지박 속으로 풍덩 들어가 앉는다. 그리고 파란 하늘 밑에서 펄럭 펄럭 펄럭 광목 자락이 날리는 소리와, 공중에서 가볍게 도는 바람 소리와 설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별 그림자가 요정으로 바뀌는 환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해가 저 만치 기울면 어머니와 아재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 때쯤 되면 나도 좀 지쳐있고, 빨리 나와서 빨래를 걷어드리기를 바란다. 두 분이 멀리서 나타난다. 나는 좋아서 뛰어간다. 어머니와 아재는 빨래를 걷어서 물에 헹군 다음 힘차게 방망이질을 또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아직 사흘은 더 바래야 되겠는데요. 이렇게 광목은 사람들 땀 속에서 비단같이 희어가고 있었다.
누런 광목이 표백되어 가는 과정을 어머니 옆에서 지켜보고 자란 나는 흰색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흰색은 내 어머니의 마음이요, 흰색은 내 민족의 색이요, 흰색은 내가 편안히 파묻힐 수 있는 쉼터였다.
세월의 쌓임이 사람의 마음을 느슨히 하듯, 색깔 보는 눈도 각을 없애갔고, 그렇게 편색이 심했던 나는 지금 어떤 색이나 다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역시 흰색이 제일 좋다. 틀림없이 흰색도 색이다.
조그만 손바닥 안에 잡힌 손거울은 각기 여러 색의 이뿐 테두리를 하고 있었다. 나의 소꼽친구 증녀는 연 분홍색을 골랐고, 나는 당연히 하늘색을 골랐다. 우리는 잡화상에서 손거울을 사 들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왜 이 이뿐 하늘색을 고르지 않고 그 촌스런 분홍색을 골랐니? 그녀는 대뜸 이렇게 대꾸했다. 너는 왜 이 이뿐 분홍을 안사고 그걸 샀어? 나는 그 때부터 사람이 사물을 보는 눈이 얼마나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홉 살 때었다.
그러다 차차 색깔을 보는 눈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해갔다. 영원히 예쁠 줄만 알았던 하늘색이 내 머리서 퇴색해 갔고, 며칠 전에는 증녀의 손거울과 똑 같은 연 분홍색 장미를 며느리에게 안겨 주었다. ‘해피 바렌타인즈’ 라고 쑥스럽게 뇌이면서 색깔의 기호도 달라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십 년 전 일이다. 나는 6.25 때의 피난지 부산에서 결혼을 했다. 누런 세멘트 포대가 밥상이었던 때다. 끼니가 끝나면 행주로 싹 싹 닦아 접었다가 다시 쓰곤 하던 피난살이 때-. 그러나 아무리 피난살이라도 남자 쪽에선 할 것은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구했는지 허름한 함 하나를 구해 시동생에게 메어 보냈다. 그 속에는 비로도 치마저고리 감과, 생 년 월 일을 적은 사주 한 장이 들어있었다. 내게 문제가 생겼다. 그 옷 한 벌이 문제 된 것이 아니라 그 벨벳 옷감의 색이 문제였다. 내가 진저리 치도록 싫어한 보라색이었다.
내 남편 될 사람과 맏동서가 될 분이 고른 것이란다. 왜 이런 색을 골랐을까. 동서님은 동경 미술 대학을 나온 미술가신데 어째서 이 색이 좋았을까. 그 후 나는 거의 그 옷을 입지 않았다. 보기도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진 보라색 벨벳은 아주 멋진 색깔이었을 것이다. 그 색이 죽도록 싫었으니 나는 그들보다 오십 년은 뒤진 색맹이다. 지금은 보라색을 무척 좋아하고 있으니 부끄럽다.
그림 한 장 못 그리면서 편색이 심했던 내가 좋아한 색은 흰 색과 까만색이었다. 더욱이 두 색이 배합된 부라우스라도 생기면 마르고 닳도록 그것만 입고 다녔다. 한번은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하며 답답해했다. 너는 왜 항상 흰색이냐? 그 친구는 화려한 색을 참 좋아한 친구였다. 그녀에게 흰색은 색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에 오자마자 이 친구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 동안 내게 너무나 잘 해 주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갔다. 가진 것이 많은 그녀에게는 잠옷이 무난할 것 같았다. 거기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하늘하늘한 하얀 쉬폰 잠옷 셑이었다. 옷을 보낸 후 얼마 만에 엽서가 왔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파티에 가듯 흰 까운을 걸치면서 네가 왜 흰 색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기뻤다. 나를 알아 준 것 같아서였다.
미국에 이민 올 때도 바로 이 흰옷이었다. 70년 대 초는 지금 같은 나들이 기성복이 없었다. 양장점에서 맞춰 입어야 했다. 상점에는 가지각색의 옷감들이 눈부시게 쌓여 있었으나 나는 거기에서 흰 옷감을 골랐다. 나를 가장 부담 없이 감아 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두 달 후에 어머니를 위한 상복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방정맞게 흰옷을 고른 내가 서글프기도 했다. 나는 꼭 일 년을 흰옷으로 살았다. 흰 상복으로나마 어머니를 기리고 싶었다. 후에 내가 사 입은 흰옷이 간호원의 유니폼이었다는 것을 알고 웃었다. 그러나 내가 그 때 그것을 알았다 해도 간호원은 아니지만 서슴없이 사 입었을 것이다.
내가 왜 흰색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먼 지난날에 생각이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에 흰색이 있었다. 우리 식구는 대 가족이었다.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랐을 어머니는 이불호청을 필륙으로 사들였다. 그리고 그 광목(면으로 된 천)을 이불감 하나씩 맞춤하여 자른 후, 잿물로 푹푹 삶았다. 무명천의 누런색을 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와 아재 (친척 아주머니)는 잿물 냄새와 김이 오르는 광목을 함지에 담아 이고 성천강에 나간다. 그들은 누런 광목을 방치로 힘껏 두들긴 후, 강물에 헹궈 약간의 잿물을 뺀다. 그리고 백사장에 광목을 넌다. 광목은 일사정연하게 줄을 선다. 사열을 받고 있는 병사들의 행렬이다. 나는 사열 장이 되어 광목을 응시하고 있다. 이때부터 뜨거운 태양 아래 광목의 불볕 단련은 시작된다.
주로 이 작업은 여름철에 했던 모양이다. 여름 방학 때가 되면 나는 강가에 나가서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가 펴놓고 들어가신 빨래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아주 바쁘다. 젖은 모래로 성도 쌓고, 점심에 마실 모래 우물도 판다. 그리고 센 바람으로 빨래 자락이 날리면 뛰어가서 더 큰 돌로 바꿔놓는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돌의 크기도 달라진다. 광목 귀퉁이를 다시 돌로 눌러 놓고 나고, 모래장난도 실증이 나면, 나는 나의 소우주인 함지박 속으로 풍덩 들어가 앉는다. 그리고 파란 하늘 밑에서 펄럭 펄럭 펄럭 광목 자락이 날리는 소리와, 공중에서 가볍게 도는 바람 소리와 설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별 그림자가 요정으로 바뀌는 환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해가 저 만치 기울면 어머니와 아재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 때쯤 되면 나도 좀 지쳐있고, 빨리 나와서 빨래를 걷어드리기를 바란다. 두 분이 멀리서 나타난다. 나는 좋아서 뛰어간다. 어머니와 아재는 빨래를 걷어서 물에 헹군 다음 힘차게 방망이질을 또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아직 사흘은 더 바래야 되겠는데요. 이렇게 광목은 사람들 땀 속에서 비단같이 희어가고 있었다.
누런 광목이 표백되어 가는 과정을 어머니 옆에서 지켜보고 자란 나는 흰색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흰색은 내 어머니의 마음이요, 흰색은 내 민족의 색이요, 흰색은 내가 편안히 파묻힐 수 있는 쉼터였다.
세월의 쌓임이 사람의 마음을 느슨히 하듯, 색깔 보는 눈도 각을 없애갔고, 그렇게 편색이 심했던 나는 지금 어떤 색이나 다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역시 흰색이 제일 좋다. 틀림없이 흰색도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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