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온 친구
2007.05.06 01:08
멀리서 온 친구 “미주문학”봄호 2004
“친구 있어 멀리서 오니 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벗을 반기는 논어의 시구와 같이 멀리서 벗이 찾아왔다. 소꼽친구도 학교친구도 아닌 벗, 그 벗은 나를 기뻐 들뜨게 했다. “너 안 변했어” “너도...” 몇 십 년 만에 만난 둘이 얼싸안고 기뻐한 것은 삼 년 전 일이었고, 이번은 세 번 재 만남이다.
그 때 삼 년 전은, 하도 오랫만의 해후라 발까지 굴러댔지만. 이번은 왜 또 그리 기뻤을까. “잘 왔다. 얼마든지 놀다 가. 이젠 우리 마음 대로야.” “그래, 그렇지 않아도 여권 길게 끊어 가지고 왔어.” “잘 했어.” 둘은 고삐 풀린 말이었다.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비행장에서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만난 기쁨을 재 확인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산 피난지였다. 좁은 공간에 ‘금남의 집’이라 이름 붙이고, 합숙하고 있었던 우리 은행 여 직원들은 한 가마솥 동기라 하면 좋았다. 그런 가마솥 친구들이 이렇게도 반가운 것은 어째서일까. 힘들었던 때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너 그 지긋지긋했던 아지(𩷲) 졸임 기억하니?” “그래! 나는 더 고통스러웠어. 글쎄 분이는 언제든지 한 접시 더 받아와서 먹으라고 채근하는거야. 괴로웠어.” 생선 고장인 부산에서 세 끼마다 나오는 생선 요리에 진저리치며 우리들이 불평 깨나 했던 생각이 난다. 38선 어디에선가는 전쟁이 한창인데도 처녀들의 꿈은 부풀기만 했고, 그들은 세상과 무관했었다. 처참한 전쟁 뉴스로 우울했다가도, 돌아서면 있는 노래 다 불러 제끼며 낄낄댔다. 꿈과 모든 고난을 함께 한 벗들이었다. 가슴에 촉촉히 닿지 않을 수가 없다.
몇 해 전 세상을 뜬 분이는 우리 회화 때마다 오르곤 했다. 우리는 삼륜차였다. 그녀 없는 달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삼륜차에 바퀴 하나 빠진 뒤뚝거림이다. 그러나 두 바퀴로도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뜻밖이고 기뻤다.
그래, 분이는 누구보다도 정 많은 벗이었지. 그 정에 우리는 양손을 들었었어. 심지어 자기 남편이 된 사람까지 먼저 친구에게 소개 했었잖아. 아주 유망한 청년이라면서 말이다. 이런 벗을 우리는 못 잊는다. 우리는 삼륜차로 달리던 때를 영원히 그린다.
한 바퀴를 잃은 둘은 손바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또 킥킥 웃었다. 처녀 때 같이 이유 없이 즐겁다. 이렇게 자유로워 졌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니 더욱 그랬다. 우리는 이제 한이 없이 가족에게 쏟고 난 사랑의 여분으로 우리 삶을 살아보자고 서로 다짐한다.
우리의 얘기는 우리가 헤어진 후의 지나온 날 들을 쓸고 갔다. 그녀의 가슴 아픈 긴 사연을 들으며, 가끔 목이 메여 그녀도 울고 나도 운다. “너 참 마음 고생이 많았구나, 전연 몰랐어.” “그래, 난 너무 힘들었다.” 깊은 주름에 고뇌의 자국이 역역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선 그녀의 엄청난 용기에 나는 말을 잃었다. 나라면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사랑의 올로 그녀의 찢긴 상처를 정성스레 꿔매 주고 싶었다. 그 후 내 머리 속은 친구를 어떻게 기쁘게 해 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영화 구경 가자.”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나도 그래. 그냥 화면 만 보는 거야. 그래도 좋은 영화는 좋아.” 개봉 첫날이면 달려갔던 옛 영화에 대한 향수를 안고 우리들은 극장 문을 들어섰다. 나는 그녀를 편하게 하기 위해 한 자리 건너서 앉았다. 남이 웃을 때 못 웃으면 쑥스러워 할까 봐서이다. 무척도 책을 많이 읽은 자부심이 강한 그녀에게 좌절감을 주기 싫었다. 그 영화는 희극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식사하는 시간과 잡담 시간만 빼고는 닥치는대로 책을 뽑아 읽었다. 독서광이다. 그래서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별 부담이 없었다. 그녀에게 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학자의 부인들은 자기들의 삶이 퍽 따분하다고 했다는데 왜 그랬을까. 책 읽는 일에 몰두하는 아끼는 사람을 보니 이렇게도 흐뭇한데 말이다.
“내가 못 읽은 책을 네가 다 읽고 가네. 재미있는 글 있니?” 친구는 지금 막 읽고 있는 책장을 펴 든다. “시를 쓰는 사람은” 하고 시작한다. 부산 합숙소에서 “파랑새” 타령으로 우리를 잠재웠던 그 구수한 목청으로 읊어 내려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시를 쓰는 사람의 모습이
보고 싶으면
너는 전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거꾸로
떨어지는 그 거꾸로 된 눈에
어둠 속에서 공중에 떠 있는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보일런지 모른다 다무라류이찌 (田村隆一)
그녀와 나는 글에서 전해오는 일치된 느낌을 교차하며 서로의 눈만 지켜봤다. 똑 같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뛰도록 기뻤다.
남의 글도 이렇게 좋아하는 친구는 시조시인 인 아버지의 시조를 잃었다고 오랫동안 안타까와 했다. 아무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수소문하니 큰오빠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전쟁 때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 글은 바로 등장 밑에 있었다. 당장 유고 집을 낼 생각으로 고 원 교수님께 머리글도 부탁했다. 교수님은 그 시인이 대 선배시라며 쾌히 승낙하시고 벌써 글도 써 보내 주셨다. 이제 친구는 남의 글이 아닌 아버지 글을 대하게 되겠다.
나는 옆에서 측은한 친구의 소원이 하나 나마 풀려가고 있는 것이 기뻤다. 또 풀 것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있다. 그것은 영전사진을 찍는 일이다. 어디선가 무료로 찍어주고 있었다. 우리는 실 실 웃으며 가서 사진을 찍고 왔다. 그 일은 대 성공이었다. 실물보다 사진이 훨씬 났다고 놀리니 친구는 빙긋이 웃으며 싫지 않는 표정이다. “우리 이젠 안심하고 죽겠다.” “그래서 못 죽었니.” “그래, 갑자기 죽었으면 어쩔 뻔 했니. 여자 공비 같은 검으죽죽한 여권 사진이나 확대했다면...” “그래, 우리 그새 안 죽어서 다행이다.” 영전 사진을 걱정하는 우리들은 소녀같이 낄낄대고 웃기만 했다.
친구가 카나다로 돌아간 후, 나는 신문을 뒷면으로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항상 뒤에서부터 보기에 왜 그러는가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지금 이러고 있다.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첫 째는 앞면에서 크게 떠드는 세상일들이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두 번 째는 마지막을 읽었으니 다 본 거나 같다는 안전 의식에서인지도 모른다. 셋째는 왼 손이 아니고 오른 손으로 장을 펼치기가 쉽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일본 신문의 예다. 항상 소헐이 했던 뒷장의 기사가 훨씬 무게를 갖고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번 친구헌데서 얻은 것 중의 또 한 가지 발견이다.
“친구 있어 멀리서 오니 이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과거사로 끝을 맺는다.
“친구 있어 멀리서 오니 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벗을 반기는 논어의 시구와 같이 멀리서 벗이 찾아왔다. 소꼽친구도 학교친구도 아닌 벗, 그 벗은 나를 기뻐 들뜨게 했다. “너 안 변했어” “너도...” 몇 십 년 만에 만난 둘이 얼싸안고 기뻐한 것은 삼 년 전 일이었고, 이번은 세 번 재 만남이다.
그 때 삼 년 전은, 하도 오랫만의 해후라 발까지 굴러댔지만. 이번은 왜 또 그리 기뻤을까. “잘 왔다. 얼마든지 놀다 가. 이젠 우리 마음 대로야.” “그래, 그렇지 않아도 여권 길게 끊어 가지고 왔어.” “잘 했어.” 둘은 고삐 풀린 말이었다.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비행장에서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만난 기쁨을 재 확인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산 피난지였다. 좁은 공간에 ‘금남의 집’이라 이름 붙이고, 합숙하고 있었던 우리 은행 여 직원들은 한 가마솥 동기라 하면 좋았다. 그런 가마솥 친구들이 이렇게도 반가운 것은 어째서일까. 힘들었던 때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너 그 지긋지긋했던 아지(𩷲) 졸임 기억하니?” “그래! 나는 더 고통스러웠어. 글쎄 분이는 언제든지 한 접시 더 받아와서 먹으라고 채근하는거야. 괴로웠어.” 생선 고장인 부산에서 세 끼마다 나오는 생선 요리에 진저리치며 우리들이 불평 깨나 했던 생각이 난다. 38선 어디에선가는 전쟁이 한창인데도 처녀들의 꿈은 부풀기만 했고, 그들은 세상과 무관했었다. 처참한 전쟁 뉴스로 우울했다가도, 돌아서면 있는 노래 다 불러 제끼며 낄낄댔다. 꿈과 모든 고난을 함께 한 벗들이었다. 가슴에 촉촉히 닿지 않을 수가 없다.
몇 해 전 세상을 뜬 분이는 우리 회화 때마다 오르곤 했다. 우리는 삼륜차였다. 그녀 없는 달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삼륜차에 바퀴 하나 빠진 뒤뚝거림이다. 그러나 두 바퀴로도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뜻밖이고 기뻤다.
그래, 분이는 누구보다도 정 많은 벗이었지. 그 정에 우리는 양손을 들었었어. 심지어 자기 남편이 된 사람까지 먼저 친구에게 소개 했었잖아. 아주 유망한 청년이라면서 말이다. 이런 벗을 우리는 못 잊는다. 우리는 삼륜차로 달리던 때를 영원히 그린다.
한 바퀴를 잃은 둘은 손바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또 킥킥 웃었다. 처녀 때 같이 이유 없이 즐겁다. 이렇게 자유로워 졌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니 더욱 그랬다. 우리는 이제 한이 없이 가족에게 쏟고 난 사랑의 여분으로 우리 삶을 살아보자고 서로 다짐한다.
우리의 얘기는 우리가 헤어진 후의 지나온 날 들을 쓸고 갔다. 그녀의 가슴 아픈 긴 사연을 들으며, 가끔 목이 메여 그녀도 울고 나도 운다. “너 참 마음 고생이 많았구나, 전연 몰랐어.” “그래, 난 너무 힘들었다.” 깊은 주름에 고뇌의 자국이 역역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선 그녀의 엄청난 용기에 나는 말을 잃었다. 나라면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사랑의 올로 그녀의 찢긴 상처를 정성스레 꿔매 주고 싶었다. 그 후 내 머리 속은 친구를 어떻게 기쁘게 해 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영화 구경 가자.”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나도 그래. 그냥 화면 만 보는 거야. 그래도 좋은 영화는 좋아.” 개봉 첫날이면 달려갔던 옛 영화에 대한 향수를 안고 우리들은 극장 문을 들어섰다. 나는 그녀를 편하게 하기 위해 한 자리 건너서 앉았다. 남이 웃을 때 못 웃으면 쑥스러워 할까 봐서이다. 무척도 책을 많이 읽은 자부심이 강한 그녀에게 좌절감을 주기 싫었다. 그 영화는 희극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식사하는 시간과 잡담 시간만 빼고는 닥치는대로 책을 뽑아 읽었다. 독서광이다. 그래서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별 부담이 없었다. 그녀에게 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학자의 부인들은 자기들의 삶이 퍽 따분하다고 했다는데 왜 그랬을까. 책 읽는 일에 몰두하는 아끼는 사람을 보니 이렇게도 흐뭇한데 말이다.
“내가 못 읽은 책을 네가 다 읽고 가네. 재미있는 글 있니?” 친구는 지금 막 읽고 있는 책장을 펴 든다. “시를 쓰는 사람은” 하고 시작한다. 부산 합숙소에서 “파랑새” 타령으로 우리를 잠재웠던 그 구수한 목청으로 읊어 내려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시를 쓰는 사람의 모습이
보고 싶으면
너는 전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거꾸로
떨어지는 그 거꾸로 된 눈에
어둠 속에서 공중에 떠 있는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보일런지 모른다 다무라류이찌 (田村隆一)
그녀와 나는 글에서 전해오는 일치된 느낌을 교차하며 서로의 눈만 지켜봤다. 똑 같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뛰도록 기뻤다.
남의 글도 이렇게 좋아하는 친구는 시조시인 인 아버지의 시조를 잃었다고 오랫동안 안타까와 했다. 아무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수소문하니 큰오빠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전쟁 때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 글은 바로 등장 밑에 있었다. 당장 유고 집을 낼 생각으로 고 원 교수님께 머리글도 부탁했다. 교수님은 그 시인이 대 선배시라며 쾌히 승낙하시고 벌써 글도 써 보내 주셨다. 이제 친구는 남의 글이 아닌 아버지 글을 대하게 되겠다.
나는 옆에서 측은한 친구의 소원이 하나 나마 풀려가고 있는 것이 기뻤다. 또 풀 것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있다. 그것은 영전사진을 찍는 일이다. 어디선가 무료로 찍어주고 있었다. 우리는 실 실 웃으며 가서 사진을 찍고 왔다. 그 일은 대 성공이었다. 실물보다 사진이 훨씬 났다고 놀리니 친구는 빙긋이 웃으며 싫지 않는 표정이다. “우리 이젠 안심하고 죽겠다.” “그래서 못 죽었니.” “그래, 갑자기 죽었으면 어쩔 뻔 했니. 여자 공비 같은 검으죽죽한 여권 사진이나 확대했다면...” “그래, 우리 그새 안 죽어서 다행이다.” 영전 사진을 걱정하는 우리들은 소녀같이 낄낄대고 웃기만 했다.
친구가 카나다로 돌아간 후, 나는 신문을 뒷면으로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항상 뒤에서부터 보기에 왜 그러는가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지금 이러고 있다.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첫 째는 앞면에서 크게 떠드는 세상일들이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두 번 째는 마지막을 읽었으니 다 본 거나 같다는 안전 의식에서인지도 모른다. 셋째는 왼 손이 아니고 오른 손으로 장을 펼치기가 쉽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일본 신문의 예다. 항상 소헐이 했던 뒷장의 기사가 훨씬 무게를 갖고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번 친구헌데서 얻은 것 중의 또 한 가지 발견이다.
“친구 있어 멀리서 오니 이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과거사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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