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여 건재하라

2007.05.08 10:31

배희경 조회 수:44

          띠여 건재하라                       “글마루” 2003

    금년을 양띠라 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사람을 난 띠와 연관 시켜서 보는 버릇이 있다. 도(道)와 사람을 묶어서 생각하는 거와 똑 같은 폐단이다. 가끔은 나 자신을 꽤 무식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버릇은 고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띠와 그 띠에 난 사람과 참 잘 맞기 때문이다. 양띠! 양띠 하면 내 어머니와 어쩌면 그리도 어울릴까.  내 어머니는 양과 같이 순한 사람이었으니까.
    내 한 올케도 양띠다. 좋은 여자지만 질투를 몹시 하는 습성이 있다. 나는 이 올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 어머니도 양띠였으니 질투를 하며 살지 않았을까.  자식들 모르게 속으로만 삭혔을 아버지에 대한 아픔의 질투 말이다.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나는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단면을 엿본 것 같아 가슴이 메었다.

    작년은 말띠였다. 나는 말띠인 아들 생일 카드에 이런 말을 적은 기억이 난다.  “팔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나지만, 네가 좋은 해와 시를 타고나서 아주 좋을 것이라는 그 말만은 믿고 싶다”.  한 때 아프기도 했던 그가 지금은 말처럼 덩실덩실 뛰며 살고 있는 것이 기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은 글인 것 같다.  지금 세상에, 무슨 팔자니 띠니 허며 넉살을 부렸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잘 들어맞으니 탈이 아닌가. 내 작은오빠는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 생, 호랑이 띠다. 하루로 나이 두 살을 먹었다. 그것도 난 시가 밤, 열 한 시  몇 분이어서  시간도 아니고 분으로 한국 나이 두 살을 먹은 사람이다. 몇 십분 후에 났으면 토끼띠가 될 뻔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토끼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죽어도 호랑 임에 틀림없다. 호랑이 같이 으르렁 될 때는 “자기를 호랑이띠라 안 할까봐서...”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호랑이를 고집한 그의 띠를 우리는 재확인한다.

    그 띠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내 남편이 가끔 영화의 한 장면같이 스로우 모숀으로 움직일 때, 나는 그의 띠를 연상한다. 그는 원숭이다. 원숭이는 쥐 같이 잽싸지 못하다.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래서 그의 띠가 나를 진정시켜 준다면 좀 과장이 될까.

   쥐 얘기가 났으니 쥐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만은 나는 띠에 대해 말 할 자신이 없다. 우리 아버지가 쥐띠였으니 말이다. 쥐띠인 아버지는 쥐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도화색 피부에 풍채가 남달리 좋으신 그 분은 우선 외모에서부터 쥐가 아니었다.  또 그 움직임도 그랬다. 재빠르지도 촐랑거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성큼 성큼 쥐덭을 놓으러 가는 품격이다. 쥐 형국은 쥐 꼴이 만치도 없으셨다. 이래서  띠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띠는 띠를 말한다. 내 한 아들은 돼지띠다.  꿀꿀꿀꿀 세상을 둥굴게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가 그의 직장 동료나 상사에 대해  언잖아 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돼지란 놈은 미련하게 생긴 놈이지만, 속엔 진주가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돼지에 진주”라는 비꼬는 말을 버리고,  돼지의 마음속은  ‘지인주’라고 했으면 좋겠다.

   돼지도 진주를 품고 있는 판에 개는 더 말 해 무엇할까. 개는 지금 상의 상팔자가 되었다.   예전엔 개띠의 사람은 개 같이 험하게 산다 했다. 과연, 내가 아는 한 개띠의 여인은 험하게도 살았다.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집에서 산 사람이 이날 이때까지 번한 세상을 못보고 있다.  그러나 이젠 개띠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어떤 개는 죽은 주인헌데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개팔자가 늘어졌다. 개는 그것을 알 리가 없지만, 그러나 옛날 옛적 우리 시대의 개는 틀림없이 아니다. 아이 똥이나 핥고, 사람이 남긴 음식 찌꺼기 먹고, 설사나 갈기고 다니는 그런 개들이 아니다. 깡통 음식에다, 종이를 쥐고 뒤를 따르는 주인에게 밑까지 닦이는 개들의 세상이다. 그래서 개띠의 개념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주인에게 알만 까서 안기는 닭, 닭띠는 어떤가.  그런 닭이지만,  닭은 발로 땅을 흩뜨리는 버릇이 있다 해서 닭띠의 사람은 재산을 모으지 못한 단다. 내 한 며느리가 닭띠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닭띠라지만 재산이 없으니 흩뜨릴 것도 모을 것도 없어서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요사한 뱀띠, 그것은 나다. 뱀의 그림도 못 보는 나지만 뱀이 되었다.  못 될 것도 없다. 뱀이 되어 요사스럽게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았겠는가. 나는 나 자신을 뱀 같지 않고 공작 같다고 하겠지만, 어찌 남의 속을 알까.  남은 나를 뱀 같이  요사한 늙은이로 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용이 되고 싶었다. 용은 뱀 보다 품격, 아니 용(龍)격이 있어서 근사할 것 같았다.  또 용과 말이 만나면 “용마” 라 해서 다시없는 궁합이란다. 내 친구 부부는 용과 말이어서 떵떵거리며 이 세상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용도 아니오, 또 내 남편은 원숭이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떵떵거리는 팔자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이제 팔자 타령은 그만해 둘까.  아니다. 아직도 소와 토끼띠에 대해 적지 않았다. 그러면 한번 소와 토끼를 궁합 줄에 넣어 볼까.  나는 육괴(六卦)라는 그 문자조차도 사전에서 보고야 알았지만, 옛 사람 말에 소는 일만 하여 고달프다며 소띠는 어쩌고 저쩌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소는 들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유유자적 팔자 좋게 산다. 적어도 도살장에 끌려가기 전 까지는 말이다. 그러면 되새김질하며 긴 날을 씹는 소와, 귀만 살아있는 토끼와는 어떻게 궁합이 맞을까. 내가 육괴를 배우면 모를까 잘 묶기가 어렵다. 점쟁이는 이 궁합을 어떻게 매듭지을지 궁금하다.

   우리가 이렇게 띠에서 말하는 자기도 자기라면, 자기가 아는 자기, 남이 보는 자기는 또 다른 자기다. 세상에는 자기가 수도 없이 많으니 재미있지 않은가.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세월이 어떻게 바뀌든 모든  띠여 건재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