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찾은 기쁨이

2007.05.10 02:42

배희경 조회 수:48 추천:1

        이름을 찾은 기쁨이                "문학게계" 1998년

   선생님이 뒤에서 소리를 지른다. "배희경- 너 어데 가니이 배희경-" 선생님이 크게 불러댈 수록 나는 더 빨리 뛰었다. 유치원 대문을 나서 어머니가 지나갔다고 생각 된 방향을 살폈다. 어머니는 이미 골목길을 돌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 같이 슬퍼서 울기 시작했다. 이제 선생님께 되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놀라서 나를 내려다보며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 그러나 나는 그 질책이 조금도 무섭지 않고, 어머니 얼굴을 본 것만으로 기뻤다. 슬픔이 가시자 내 울음도 그쳤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내 존재의 전부였다. 학교운동장에서 유희를 하면서도 집 생각이 나서 학교 대문만 쳐다보았다. 지나가는 여자가 어머니로 보였을것이다.  간절한 그리움은 구속의 사슬을 끊고, 밖으로 달음질치게 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찾던 일이 어제 일 같다.

   인생 첫 출발이 결코 즐겁지 않았던 유치원 생활도 끝나고 소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시대에도 지금과 같이 (그 때의 한국)지원자가 넘쳤는지 면접시험이 있었다. 식구들은 내게 부모이름은 뭐고 집 주소는 뭐라며 달달 외우게 시험 준비를 시켰다.  
   면접시험을 보고 나왔다. 아버지는 무엇을 물었느냐고 군금해 하셨다. 집이 어딘가고 묻기에 팔을 들어 ‘저어기’라 대답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연실색, 왜 주소는 말하지 않고 손으로 가리켰느냐 고 또 물으셨다. 주소가 뭐냐고 묻지 않고 집이 어딘가고 묻기에 집 쪽을 가리켰다고 나도 어리둥절해 대답했다. 이 일은 육십 년 후인 지금까지도 우리집안의 특등 일화로 꼽히고 있다.
   나는 그 해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십이월 생이라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변명해 주었지만, 아버지는 나까지로 유치원 교육을 중단했다. 나를 보고 유치원이 별로 소용없는 곳이라고 아신 모양이다. 동생들은 나로 인해 얼마나 자유롭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들은 모를것이다.

  
   배희경이라는 이름이 소학교에 들어가서, 일제시대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호시야마(星山)기께이"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裵가의 본인 성주(星州)를 따서 호시야마로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내 이름 같지 않아서 서먹했다. 우리말로 불러오던 희경이라는 익숙한 음이 아니고 일본 발음 기께이(熙璟)는 참 듣기 싫었다.

   오랜 후다. 8.15 해방을 맞아 옛 이름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어느새 누구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아이가 생기기 바쁘게 누구의 업마로 되었다가, 계속 네 아이 이름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 중, 사십 세 되던 해에 이민을 왔다. 남동생이 Social Security 사무실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동생은, 우리 이름은 미국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우니 영어 이름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우리는 좋다고 대답했다. 동생은 내 이름 첫 자 ‘H’를 따서 Helen이 어떻겠냐고 물어 또 좋다고 대답했다. 한국의 작명가라면 이럴 때 뭐라 지었을까 잠깐 생각했다. 몇 분 만에 지은 우리의 새 이름이었다. 남편 성 주(朱)는 유태인 ‘쥬우’와 발음이 같아 Choo로 했다.

   오랫동안 나는 어떤 광대를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니었다. 딴 이름으로 분장된 무대 위의 광대였다. 더욱이 나이 어린 사람들이 나를 Helen이라 부를 때는 거센 거부감과 함께 아주 슬펐다. 참아야지. 내가 이 나라를 엄마나 좋아하는데 이름 쯤 못 바꿀까, 이제까지도 수도 없이 바뀐 이름인데 참아야지 하나 밑바닥에 깔린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더욱이 미국 한인 사회에서 내 이름을 ‘주희경’이라 써서 문서를 붙여올 때는 차라리 미국 이름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배가’가 어떻게 ‘주가’가 되겠는가 싶어 이상도 하고 기분이 나빴다.

   우연한 기회에 신문 광고를 보고 “글마루” 교실을 찾게 되었다.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아 온 미국 생활에서, 조금은 곁눈질 할 여유가 생겼던 모양이다.
   자기소개를 적을 용지를 받았다. 나는 잠깐 망서렸다. 이름을 어떻게 적을 것인가. 미국이름, 미국의 한국이름, 한국이름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으로? 내 원래 본 이름으로 적으면 어떨까.  그리고 또 망서렸다. 남편과 자식들을 배반하는 것 같은 자책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도 이제 나를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동안 나는 나를 위해 산 적이 없었다고 생각 되었다. 이 기회에 나를 찾지 않으면 언제, 용기가 생겼다. 용지에 내 이름 “배희경”이라 적었다. 긴 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새 사람이 탄생되는 것을 보는 감격이 있었다. 모든 망령과 존속을 벗어던진 나. 일본 이름, 미국 이름, 누구 부인, 누구 업마, 누구 할머니 ...다 다 벗어버린 나만이 서 있는 나를 보았다.  

   그 후 나는 새장에서 놓여난 새였다. 서발장대 걸릴 것 없이 날아다니며, 살아온 긴 날들을 더듬어 적어가며 다시 살고 있다. 태어났을 때의 내 이름으로 나를 찾은 기쁨에 나는 지금 좋아 어쩔 줄 모른다.

    
        < 당선의 기쁨 >
아침에 일어나 어제 받은 책과 상장을 앞에 두니, 다시 기쁨이 피어났습니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꿈꿨던 세계로 훌쩍 뛰어든 감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문단에 선다는 말은 너무 엄청나서 나는 다만 그런 것 같다는 기분만으로도 족히 기쁩니다.

“당선 소식 이다지도 기쁠 줄 몰랐네” 어제 저녁의 Sing Along에 가사를 붙여 가족과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미가 쓴 대수롭지 않은 짤막한 글이 좋아서라기 보다 내가 기뻐하는 것으로 기쁜 것 같았습니다.

저의 미숙한 글을 뽑아 주신 고원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글마루”시간에 내 글이 길다고 핀잔을 주시던 교수님께서 이 글은 짧아서가 아니었는지요. 많은 것을 지적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글마루 회원님들의 따듯한 격려도 너무 고마웠구요. 감사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