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만감

2007.05.11 13:44

배희경 조회 수:49

            나무 만감                      “문학세계” 2000년    

  하늘이 안 보이게 우거진, 눈을 인 나무 숲 사이로 햇살이 화살같이 쏘아 박힌다. 주인공은 달리는 기차에서 그 햇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기차 칸에서의 강열한 장면중의 하나다. 지금도 이 광경이 머리속에 역역한 이유는 내가 보아온 이북 고향 산천과 너무나 같기 때문이다. 남동생도 화통 기차 꼭대기에서 눈갯비를 맞으며 어머니와 피난 갔던 일들이 생각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 울었다 했다. 나도 그와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나무수풀을 좋아했다. 나무 수풀에 대한 많은 추억은 내 모든 그리움의 원천이었다.
  그 원천은 이곳에서도 만났다. ‘빅베어’의 가파른 언덕, 나무들이 떨며 눈을 이고 있을 때, 그것들은 기도원에서의 갈망같이 엄숙했다. 누구도 그 명상을 깨지 못하게 당당했다. 추위에 떠는 나무들의 아픔을 보며, 나무의 본향은 어디일까, 돌아가지 못하고서-. 확실히 겨울나무 수풀은 외로움의 아픔이었다.
    여름 나무의 푸름도 참 좋아한 나는 한 때 사진 찍는 일에 정신이 팔렸다. 그 사진들 속엔 사람 찍은 것은 거의 없고, 나무의 환희 만이었다. Yellow Stone에 갔을 때도 그랬고, 한국 광능의 시댁 선산에 갔을 때도 그랬다. 나무 수풀만 찍었다. 어떤 사진은 너무 마음에 들어 포스터 사진으로 확대해 자식들께 나눠줬을 정도다. 나무만 찍겠다고 의도한 적은 없었는데 나무가 좋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무!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나무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있다. 유월 보라색으로 피는 쟈칼란타 다.  미국에 첫 발을 디뎠을 때의 강렬한 인상은 로스앤젤스의 불빛도, 넓음도 아니었다. 보라색으로 하늘을 물들인 쟈칼란타 나무였다. 황홀했다. 내 집 동네에 높게 이 꽃이 만발했을 때, 한국에서 온 화가 조카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 꽃이 만발한 이런 곳이 천국이겠지요?” 쟈카란타는 천국에 필 꽃임에 틀림없다.

  나는 둘째 아들 집에도 이 나무를 심고 싶었다. 집 앞에 심겠다고 제의했을 때 아들은 안 된다고 반대했다. 꽃잎이 진드레미 같이 달라붙어 이만저만 골치 아픈게 아니란다. 차를 다른데 세우지 하면서 나는 내 집념을 관철했다. 생선 대가리를 가득 파묻고 삼년이 되었다. 몇 십 년 된 고목같이 풍성하게, 검스름한 가지는 정교하게 뻗었다.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들이 실눈이 되어 나무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이 나무는 사진을 받지 못한다. 아주 시시하게 찍힌다. 카메라가 나쁜 탓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으나 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꼭 어디다 남겨야만 맛일까.  

   그러나 나무 수풀은 다르다. 쭉쭉 곧은 나무 등걸이의 질서로 절대 사진에 실패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찍힌다. Yellow Stone에서 찍은 사진도 그랬고 광능에서 찍은 사진도 그랬다. 얼마 전 Yellow Stone에 큰불이 나서 수천 에이카의 나무가 타 버렸다고 했을 때, 나는 불타기 전 찍어온 내 사진을 보여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게 빽빽이 들어선 나무 수풀이 내 사진 속에는 엄연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수풀이면 어떤 나무라도 좋아하는 나다. 댓살이 쪽 곧은 대나무 밭은 말할 것도 없고, 미루나무 수풀은 그 둥걸이가 희다. 참 아름답다. 이름 모를 나무도 뺄빽이 들어차면 좋다. 특별히 강원도 강능 소나무 밭은 정말 일품이었다. 소나무밭 주인인 친구가 세상을 떴을 때, 그녀와 함께 생각난 곳이 그 곳이었다. 그녀는 소나무 밭을 우리들께 소개하면서 강능의 명물이라 했다. 나는 생각한다. 친구는 가고 없지만 친구의 소나무 밭은 거기 청청히 살아있다. 친구는 소나무가 좋아 소나무 밭을 샀지만 자기가 소나무보다 먼저 간다는 것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소유한 것만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이번 강능 지구 태풍으로 친구의 솔밭이 뿌리 채 뽑히지나 않았을지. 주인도 갔는데 나무가 못 가란 법이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가졌던 소나무 밭이다. 비가 치덕치덕 오는 날, 우산을 받고 서서, 소나무 숲의 푸름과 침묵의 강렬함에 함성을 질렀던 일은 그녀와 함께 아픔으로 남았다. 그곳을 휩쓴 태풍으로 소나무의 진녹색 삶이 웨치고 있다. 사람 목숨과 같이 울고 있는 것이 내게 들린다.

  자연도 피고 지고, 사람도 나고 죽는다. 새 생명으로 바뀌어도 영원한 것은 없다. ‘닥터 지바고’의 나무수풀도, 내 그리움의 나무도, 친구의 소나무 밭도 머릿속에서 생겼다 사라지면 그만이다. 슬퍼하지 않겠다. 그것이 생명인 것을 누가 어찌하겠는가. 이런 것도 어느새 머리에서 떠나면 희희낙낙 오늘도 또 웃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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