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소외된 주변부를 탐구하는 인고의 작업

2002.11.15 02:10

박경숙 조회 수:270 추천:4

소설이란 소외된 주변부를 탐구하는 인고의 작업- 소설가 현 길언 교수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길언 교수 - 한양 대학교 [주간한양]- 한양의 맥박을 찾아서 25

시인 황지우는 문학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문학은 혁명이 아니라 혁명의 징후에 관여하며 또한 반혁명이 아닌 반혁명의 상처에 관여하는 것"이라 답한바 있다. 문학이란 세상의 중심에서 사태를 규정하고 시비를 가리는 법리적 논술이 아니라 오히려 그 중심을 경계하며 그것으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의 서사임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현대사를 통틀어 고립과 소외, 상처로 얼룩진 제주인들에게 초로의 시인이 규정하는 문학의 정의는 더없이 살갑게 들린다.

섬인데도 불구하고 바다에 관한 설화가 드물다는 제주의 진실처럼 제주인들은 항상 땅에 매여 살았다. 4·3 항쟁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상처가 바다를 건너 사람들에게 알려지기까지 수 십 년의 시간이 걸렸듯이 그들에게 바다는 늘 고통스럽고 두려운 존재로 세상을 가로막는 생득적 장애였던 것이다.


*주변부로서의 제주, 그 상처에 천착하다

현길언 교수는 제주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년을 보내고 역시 고향 제주에서 두루 교편을 잡기도 했던 전형적인 제주인이다. 나이가 마흔이 되던 1979년, 「현대문학」에 '성 무너지는 소리'를 발표하며 늦깍이로 등단한 그는 이순(耳順)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주를 소재로 창작 활동을 펼치는 대표적인 중견 소설가로 꼽힌다. 그러나 '우리들의 조부님', '여자의 강', 그리고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제주문학을 상징하는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내놓으며 그가 제주에 천착했던 세월은 단지 고향에 대한 막역한 동경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소설은 중심부 이데올로기가 아닌 철저히 주변부적 이야기입니다. 학문은 역사나 현실, 이데올로기를 탐구하는 중심부적 역할을 하지만 소설은 학문이 하지 못하는 것들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역사 혹은 정치학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처럼 주변부적인 인간의 문제와 그 상처를 다루는 것이지요. 제주는 나의 고향이기 이전에 한국현대사에서 소외되었던 주변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입니다. 작가로서 다루고자 하는 세상의 주변부와 그 상처가 나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가슴아픈 일입니다."

현 교수는 '제주'라는 지역을 한국현대사가 갖고 있는 굴곡과 상처를 대표할 수 있는 전형으로 본다. 또한 내전은 국가 간의 전쟁보다 더욱 참혹한 것이며 그것은 모든 주변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상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주의 역사와 해방 직후 일어난 불행들은 분단국가의 이념 대립으로 빚어진 개별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주변부적 삶의 실상을 대신해 주는 역사적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 4·3항쟁의 실상을 문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그 사태가 소재적 차원을 넘어 소설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닿아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개인의 존엄과 사회적 관계를 탐구

현 교수는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창작을 배우기 이전에 각 개인이 스스로에 대한 독자적인 존엄성을 인식하기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성찰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각자가 수행하는 '일'을 통해서라는 것이 그의 고집스런 생각이다. 열심히 일하면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적 관계 속에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현 교수가 정의하는 가장 아름다운 '문학적 삶'이다. 지난 1월 출판한 그의 장편소설, '관계'는 그의 이런 생각을 여실히 반영한다. 작품에서 사생아가 자신이 품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와 함께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그리고 왜곡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곧 존엄의 문제로 접근된다.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적립해 나가는 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문학이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가 90년대 이후부터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되기 시작했지요. 공동체적, 집체적 관심을 떠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랑에 주목한 것입니다. 사생아는 그것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입니다. 부모가 버린 문제적 자아가 이 땅에서 어떻게 관계를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전봇대 밑에 배설해 버린 토사물'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사생아가 간직한 상처는 현 교수가 천착하는 '주변부적' 화두와도 깊은 상관이 있다. 치유의 과정에 있어서도 '나는 무엇이고 누구인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신 스스로 답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작가의 처방 또한 모든 주변부에 던지는 그의 메시지이다. 지난 6월, 그가 고향 제주에 대한 모든 '애증'을 담았다는 '제주문화론'을 탈고한 것도 '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시금 '섬'에게 다가가는 자문(自問)의 자세에 다름 아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최고의 처방, '사랑'

현 교수는 오늘 10월말경 또 하나의 장편소설을 탈고할 예정이다. 해방과 4·3 그리고 6·25를 겪었던 기억들을 3부에 걸쳐 자전적 성장소설로 소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울이라는 곳은 쉽게 갈 수 없는 까마득히 먼 곳으로 생각하며 육지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시절, 그러한 유년의 갈망이 뒷날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백하는 그다.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지켜보았던 유년의 눈은 제도화된 역사적 기록이 담보할 수 없는 높은 순도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며 그에게 '좋은 소설'이란 어떤 소설인가를 물었다.

"단적으로 좋은 소설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래 읽히는 소설입니다. 그것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스스로를 배반하는 소설이 될 수도 있지요. 우리는 항상 고정관념과 지배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뜰 수 있게 하는 서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인간과 사회 주변적인 것들에 관심을 놓지 않는 현 교수는 향후 '한라산'의 완간과 함께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저술을 가장 큰 과업으로 계획하고 있다.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기 이전까지 온갖 핍박과 곡해 속에 있었던 기독교는 원래 주변부를 상징하는 세계사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그는 이해한다. 그리고 제3세계로 철저하게 주변부에 속해 있던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내적 포용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전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역량의 근원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고향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과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는 '사랑'이라는 공통의 힘이 있다는 사실도 그는 빼놓지 않는다. 건학이념을 들어 본교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전하는 그의 짧은 당부가 그것을 더욱 잘 증명한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존재, 각각 다른 존재들이 하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양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몫들이 모여 한양가족이라는 심포니를 이룬다면 그것은 개인의 삶을 위해서도 행복한 것이고 한양의 미래를 위해서, 나아가 더 큰 공동체를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한양의 우수한 공학기술 능력과 함께 인간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뒷받침되면 자연과 인간 그리고 기술이 하나되는 '휴먼 테크노파크(Human Technopark)'가 될 수 있겠지요. 그것이 제가 기원하는 것입니다."

*약력
1940 제주 남제주군 출생
1979 현대문학에 '성 무너지는 소리'발표 문단 데뷔
1985 제 5회 녹원문학상 수상
1985 제주도문화상 수상
1990 현대문학상 수상
1992 대한민국 문화상 수상
1997 경기도 문화상 수상
1998 제16회 한국기독교문학상 수상
2000 제13회 기독교문화대상 수상

*작품집
1984 용마의 꿈(문학과 지성사)
1985 우리들의 스승님(문학과 지성사)
1987 신열(고려원)
1987 그림자와 칼(현대문학사)
1987 불임시대(전예원)
1987 닳아지는 세월(문학과지성사)
1988 우리 시대의 열전(문학과 지성사)
1989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문학과 지성사)
1991 우리들의 조부님(고려원)
1993 배반의 끝(문학과 지성사)
1993 껍질과 속살(고려원)
1994 한라산(문학과 지성사)
2001 관계(고려원)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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