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의 시 세계

2002.11.21 04:01

박경숙 조회 수:382 추천:4

-나의 시와 형식
이 승 훈

우수에서 파편까지

최근에 나를 사로잡는 것은 우수이다. 우수라니? 언제는 우수가 아니었던가? 하기는 그렇다. 우수, 이 빌어먹을 우수로부터 개운하게 벗어날 날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우수는 팔자이다.
우울증에 시달린 다음 가을이 오고, 우울증이 낫나 싶더니 또 한 차례 거지 같은 명상에 시달렸다. 올 가을 은 유난히 길 것 같다. 가을이 길든 짧든 관계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수이다. 우수에 젖을 때 내가 보는 것은 전체가 아니라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분, 따라서 의미가 상실된 파편들이다.
모든 의미는 전체가 구현한다. <돌>이라는 낱말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예컨대 지금 내가 <돌!>이라고 한다면 이 글을 익는 독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돌을 가져오시오>, <돌을 버리시오>,<돌로 때려 죽이시오>라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비로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된다. 전체가 중요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낱말의 경우 전체는 문장이고, 이 문장이라는 전체에서 떨어져 나갈 때 낱말은 의미를 상실한다. 어디 낱말 뿐이겠는가?
나는 이 글을 1994년 10월 15일 토요일 오후에 쓰고 있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흐린 잿빛 하늘, 텅빈 중학교 운동장,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 지난 밤의 술, 가을비에 약한 나 모두가 파편이 되어 뒹군다. 우수 속에 존재하는 건 파편들 뿐이다. 그들은 의미를 잃고 헤맨다. 그런 점에서 내가 느끼는 우수는 벤야민적인 의미를 거느린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내가 관심을 두는 시, 혹은 시의 형식 역시 우수의 형식이다. 우수의 형식이라? 세상에 우수의 형식이라는 말도 있는가? 없어도 할 수 없다. 나만 그렇게 부르면 된다. 우수의 형식이 노리는 것은 전체에 대한 부정이다. 미학 이론으로는 유기성, 철학에서는 흔히 총체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현대시가 강조하는 것은 전체 개념이다. 시인, 작품, 독자, 현실, 언어 모두가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전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런 유기성을 외적 유기성이라고 한다면 한 편의 시 역시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어야 한다. 이런 유기성을 내적 유기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적 유기성만이 강조될 때 자율성 미학이 나타난다.
그러나 한편 이런 유기성, 외적이든 내적이든 이런 유기성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나 조건은 무엇인가? 아도르노는 몽타쥬의 원리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기적 예술작품이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반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이런 화해는 파괴되고, 몽타쥬 같은 이른바 비유기적 예술작품이 나오는 바, 이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 혹은 파편의 미학을 강조한다. 이런 예술이 노리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일까? 다시 아도르노에 의하면, 왜냐하면 나는 그가 어렵기는 하지만 그를 좋아하니까,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적 총체성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이런 총체성에 대한 부정을 암시한다. 나는 이런 주장을 옳다고 보는 입장이다.
내가 생각하는 우수의 형식이란 다른 말로 하면 소외의 형식이다. 그러나 이런 우수, 이런 소외가 이 시대의 삶에 대한 아이러니로 작용한다고 본다. 최근에 발표된 시들을 중심으로 내가 생각하는 우수의 형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작품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이다. 자율성 미학은 현대 예술의 뿌리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자율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시가 허구라는 사실마저 잊게 된다. 시는, 그리고 모든 예술은 , 아니 일체의 담론은 허구이다. 이런 허구성에 대한 인식은 진리가 허구라는 인식과도 통하는 바, 나는 「자화상?」에서

나는 시방 내가
무얼 쓰려는지 모른다
나는 남이니까

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시는 언제나 그 모양이지만 내 시의 주제라 할 이른바 <나 찾기>를 노래한다. 그러나 시의 끝을 이렇게 맺은 것은 시를 쓰던 당시 사실 어떻게 끝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시쓰기에 대한 시쓰기를 주제로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건 시다>. 그러니까 무슨 다른 걸로 착각하지 말아 달라는 점이었다.
그런가 하면 미발표작 가운데는 시의 끝 부분이 <나는 이 시를 더 쓸 수도 있다/그러나 안쓴다/더 쓸 수도 있지만>같은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그러나 가슴이 아픈 시행들이 있다. 결국 이 시에서도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건 시다>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언어를 가지고 논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시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비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그것도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시인이란 무엇인가? 무슨 예언자도 못되고, 그렇다고 낭만주의 시대처럼 영웅시되는 것도 아니고 상품적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최근에 더욱 이 시대의 시인은, 아니 나는 언어나 낭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내가 시를 쓰는 건, 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언어나 낭비하고 그런 낭비가 즐겁게 때문이다. 낭비는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육체도 노동이 아니라 낭비할 대 즐겁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시대 시인들의 우수를 읽는다. 이런 우수는 또한 내 시의 주제인 <나 찾기>와도 관련되는 바, 최근에는 시 속의 화자와 시를 쓰는 나의 관계, 1인칭, 2인칭, 3인칭이 문제, 나아가 <이승훈>이라는 이름과 <나>의 관계로 발전한다. 예컨대 이런 사정은 「흘러가는 나」에서


이게 오늘의 진리고 사랑이다
벼락이다 금이 가는 금이 가는
세월의 얼굴이다 술집에서 말없이
벌떡 일어난 이승훈씨
당신이 얼굴이다

처럼 노래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나>로 되어 있다. 그 <나>는 물론 시를 쓰는 나와 분리된다. 그러나 시의 끝 부분에 오면 화자는 <이게 오늘의 진리이고 사랑이다>라고 말하지만 <술집에서 말없이/벌떡 일어난 이승훈 씨>라고 불림으로써 인칭 전환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1인칭인 <나>가 3인칭인 고유명사인 <이승훈 씨>로 전환되고, 물론 이런 전환은 시를 쓰는 <나>가 수행한다. 이런 전환은 다시 「당신이 얼굴이다」에서는 2인칭으로 전환된다. 요컨대 이 시에서 내가 노린 것은 <나>, <당신>,<이승훈 씨>로 불리우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다. 과연 누가 나인가? 시를 쓰는 <나>라고 하지만 그<나> 역시 어디 있단 말인가?
대학생 시인이며 제자이기도 한 조하혜가 보여준 시 노트에는 추운 저녁 카사블랑카에서 나를 보았다는 시행이 있었고, 그렇다면 <나>는 추운 저녁에 잉그릿드 버그만을 기다리며 거기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건 하혜의 자유이다. 아무튼 시를 쓰는 <나>가 있다고 하지만 시를 쓰는 순간 그런 자아는 소멸한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자아는 다시 시 속의 화자인 <나>가 되며, <당신>이 되며, <이승훈 씨>가 된다. 결국 <나>는 글 속에만 있다. 내가 <나>,<당신>,<이승훈 씨>라고 부를 때만 나는 존재한다.
세째로 독자에 대한 전통적 인식에 대한 비판이다. 전통적으로 시인은 독자와 대립된다. 독자는 시인이 쓴 시를 읽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시와 독자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시의 공간에 독자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으로, 예컨대 「이승훈 씨의 일생」에서는

그가 처음으로 웃은 건
언제였던가?

나는 모른다 대학을 서울에서
다녔으나 그에게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에서 나고 그의 가슴에서 나고
그의 팔에서도 나고 아침에도 나고
한밤에도 나고 아무튼 무슨 소리가
나고 덜거덕거리는 소리 사슬 끄는 소리
한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며

물론 지금도 소리가 난다
독자들에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술을 마시는 건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참을 수 없으면 웃는다

괴로울 때 웃음이 나오고
이승훈 씨는 마침내

그런 나라에서
그런 시를 쓰는
그런 시인이 되었도다

처럼 노래한 바 있다. 인용이 길어서 미안하지만, 이 시에서도 물론 <나>와 <이승훈 씨>의 관계가 노래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나>와 <그>는 대립된다. 그런가하면 이 땅에서 내가 시를 쓰게 된 동기도, 부끄럽긴 하지만 솔직하게 노래된다. 무엇보다도 <이승훈 씨의 내부>에서 나는 소리를 <독자들에겐 들리지 않을 것이다>리고 말한 대목에 유의해주시기 바란다. 이런 형식은 독자와 시의 관계에 대한 나대로의 조심스런 시도이다.
네째로 작품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과 다시 관련되는 것이지만 이미지의 비연속성, 말하자면 단절과 병치의 기법을 들고 싶다. 내 시가 짧은 시행들을, 그것도 다소 속도를 넣어 병치시키는 기법을 애용하는 것은 우수 때문이다. 우수의 시선 속에서는 전체가 사라진다. 남는 것은 파편들이, 병치 뿐이다. 이런 노력은 예컨대 「하염없이 살았다」에서

하염없이 실았다
삶이라는 허구와
연구실 창문에 어리던
겨울 저녁
으스스한 피와
들판의 상처와
추운 밤과
징그럽던 고독과
나를 더욱 춥게 만들던 너와
허리 걸리던 밤

같은 식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일종이 자동기술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이 모여 환기하는 것은 현실과는 관련이 없는,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나의, 물론 이 <나>는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쓸쓸한 내면 풍경이다.
끝으로 이것 역시 자율성 비판과 관련되지만 개방적 텍스트에 대한 지향과 반복성을 들고 싶다. 자율성 미학이 강조하는 것은 내적 통일성이요, 따라서 그것은 폐쇄적인 구조를 지향한다. 그러나 답답하다. 사는 것도 답답한 터에 시까지 이 모양이라면 숨이 막혀 어떻게 살겠는가? 내적 유기성을 파괴하고 싶은 것도 결국은 우수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내가 비슷한 이미지나 내용을 반복하는 것도 사정은 같다. 반복이란 무엇인가? 끝 없음이 아니던가? 그것은 순환성, 혹은 의미없이 뒹구는 삶의 풍경이다.
개방적 텍스트에는 끝이라는 게 없다. 내적 유기성도 없다. 끝은 끝없이 지연된다. 그리고 이런 게 인생이다. 의미도 끝없이 지연된다. 이런 사정을 나는 예컨대 「할 일이 없는 이승훈 씨」에서 비슷한 내용을 여섯 연으로 나누어 반복하는 형식으로 나타냈다. 5연과 6연은

할 말이 없도다
그대는 태어났으며
집에서 자랐으며
학교를 다녔으며
학교를 졸업했으며
선생이 되었으며
해질 무렵엔
술집에 앉아 있었으며
머리가 아팠으며
안개 속을 헤맸으며

할 말이 없도다
그는 태어 났으며
집에서 자랐으며
어른이 되었으며
(이하 생략)

과 같다. 비슷한 이미지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우수 속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삶의 파편들만 바라볼 뿐이다. 이 시를 쓰고 그래도 조금 기뻤던 것은 이런 반복을 <이하생략>이라는 말로 끝낸 점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끝난 게 아니다 계속된다. 계속이 아니라 지연이다. 지금도 계속된다. 우울하게 계속된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아 지금도 계속되는, 그렇기 때문에 한이 지연되는 이 삶이라는 무의미.
이 글도 <이하생략>으로 끝을 내야겠다. 그러니까 끝난 게 아니다. 세상에는 끝이라는 말만 있을 뿐이다. 3류들에게는 언제나 끝이 있다. 그러나 인생엔 무슨 정리도 없고, 완성도 없고, 언제나 미완성이고 계속되고, 지연된다. 빗발 속에서 하루자 저문다.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면 추워지리라. 우수 속에서, 이상한 증오 속에서, 맺힌 게 많은 삶 속에서 계속된다. 우수가 계속되고 어디에도 없는 내가 계속된다. 청탁 매수를 넘겨 <현대시학> 의 주간이신 정진규 시인에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원래 나는 사는 것도 그렇지만 요령껏 글을 쓰는 재주가 없다.

*이 글에서는 우수가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憂愁
*이 글은 현대시학 1994년 11월호에 "나의 시의 형식 "이란 특집으로 게제된 글이다. 이 기 획에 참여한 시인은 다음과 같다.
김종길, 이승훈, 오규원, 박상배, 윤석산, 이하석, 이기철, 박상천, 이승하, 차창룡, 함성호, 설태수, 성귀수 등이다.

* 개인적으로 나는 이승훈의 초기 시를 좋아한다. 특히 나는 그의 시집 <사물 A>를 읽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 시집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의 후배들은 군대생활 하는 나를 위해 <사물 A>에 실린 시들을 위문 편지 대신 필사해서 보내는 사역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물 A>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쫓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命令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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