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와 신경숙, 은희경의 영향 수수관계에 관한 고찰

2002.12.26 15:02

박경숙 조회 수:613 추천:2

1.

90년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 한국문학사에 있어서 오정희의 소설은 어떠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 글은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하며 아울러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얻기 위한 모색의 한 방편으로 쓰여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정희는 과작의 작가이다. 그는 데뷔작인 <완구점 여인>(1968)으로부터 최근작인 <새>(1995)에 이르기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작가 활동을 통하여 약 40편 가량의 중·단편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평균 잡아 1년에 한두 편 남짓 발표한 셈이 되는데 그 중에 장편은 단 한 편도 없다. 이와 같은 범상치 않은 필력을 통해 우리는 오정희의 작가적 기질은 물론이고 작품의 특성까지도 엿볼 수가 있다.
창작에 대한 엄격한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오정희의 결벽성 내지 완벽주의는, 비록 과작이긴 하지만 발표된 작품들 모두가 문체의 정치함, 주제의 깊이, 구성의 치밀함 등의 측면에서 고른 수준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평자들은 오정희의 소설을 두고 '쓰여졌다'기보다는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또는 '제작되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그의 소설은 강한 흡인력으로써 읽는 이를 빨아들이게 하는 독특한 힘을 지니게 되고, 그런가 하면 상투적인 독법을 견지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쉽고도 편안하게 읽히지 않는 오정희 특유의 소설적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엄격함, 언어와 문장에 대한 결벽증적인 완벽주의를 지향함과 아울러 또한 이에 걸맞는 고른 수준의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오정희는, 현재의 문단에서 후배 여성작가들이 즐겨 사숙(私淑)하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위치에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들 90년대를 여성 작가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 이전인 7,80년대에도 주목할 만한 몇몇의 여성 작가들은 남성작가들 못지 않은 문학적 성과를 보여준 바 있다. 이른바 '여류'라는 통념을 뛰어넘으면서 남성작가들과 변별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학적 영역을 개척해 온 여성작가들의 활약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박경리, 박완서, 오정희, 김채원, 윤정모 등의 작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오정희의 작가적 위치는 각별하게 보인다. 인물의 내면심리 추구를 통한 여성성의 탐구라는 일관된 작품 세계와 이야기의 정황과 긴밀하게 맞물려 표현되는 적확한 비유와 상징으로 다듬어진 독특한 문체 등, 오정희만이 지니고 있는 소설적 특성으로 해서 독자들은 물론이고 평자들 나아가서 같은 작가들에게서조차 꾸준하면서도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한 이 글의 최종 목표는 현재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오정희 소설의 위치 및 그 의미를 탐색해 보는 데에 있다. 이 글이 지향하고자 하는 이러한 소기의 목적을 무난히 이루어 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오정희 소설들이 90년대 여성작가들의 작품에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이들은 그 영향을 자신들의 작품 속에 어떻게 변형시켜 형상화하였는가라는 점에 대하여 주목해 보고자 한다. 본고의 이와 같은 과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오정희의 작품들과 90년대 여성작가들의 작품과의 구체적인 비교, 분석을 통해 그 유사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필자의 의도대로 작품들과의 직접적인 대비를 통해 그 유사성이 명확하게 밝혀진다면, 양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영향의 수수관계 또한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최근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여성작가들의 문학 활동은 그 이전에 선배 여성작가들이 쌓아올린 문학적
성과의 연속성 위에서 이루어진, 한국 문단의 자연스러운 세대적 흐름의 한 양상이라는 관점을 전제로 하여 쓰여진다. '모든 텍스트는 예외 없이 인용구들의 모자이크로 구축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쥴리아·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 (intertextuality) 이론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어느 시대 어느 작가이든지를 막론하고 그 이전에 존재했던 많은 선배 작가들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학적 사실 또한 이 글의 전제로 삼는데 있어서 충실한 논거가 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이와 같은 전제와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작가와 작품은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와 <새>, 신경숙의 <밤고기>, 은희경의 <새의 선물> 등이다.



2.

'85년 <겨울 우화>로 등단한 이래 '90년 첫창작집『겨울우화』를 내놓은 신경숙은 3년마다 한 번씩 작품집을 상자(上梓)한다. '93년『풍금이 있던 자리』와 '96년 『오래 전 집을 떠날 때』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의 첫작품집에 실린 단편들을 읽다보면 그 이후의 창작집에 실린 작품들에 비해 작가적 기량이나 또는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작품들이 더러 있다. 『겨울우화』에 실린 <밤고기>가 바로 그러한 예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이 작품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밤고기>가 주인물이나, 모티프, 또는 작품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와 매우 유사한 면모를 띠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밤고기>는 초등학교 6학년인 '양희'를 둘러싼 가족들의 삶이 황폐하게 훼손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초점은 '양희'에게 맞추어져 있다.
서울에서 전학해 온, '형광등 불빛 같은 얼굴'을 한 채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정희'를 말없이 좋아하는 '까만 얼굴'의 '양희'는, 6학년이 되어서 가족들로 인하여 어린 아이로서는 미처 감당해내지 못할 일들을 겪게 된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오빠는 학생 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내내 다락방 속에 숨어 있다가, 서울의 어느 경찰서에서 왔다는 '낯선 사내들'에 의해 끌려간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저는 언니 '양옥'은, 어쩌다가 마을의 교회를 짓는 뜨내기 목수와 눈이 맞아 통정을 하게 된다. 이를 눈치챈 아버지가 매질을 가하고 머리를 자르는 폭력을 휘두르자 언니는 마침내 가출을 한다. 그후 '양희'는 마을 사람을 통해 언니가 임신을 해서 배가 부른 채 '뭔 꽃을 머리에다 잔뜩 꽂고는 정신없이 걸어'다니는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 와중에서도 아버지는 '곱게 분칠을 한', '이 마을에서 흔히 읍내 여자라고 부르는 포목집 주인 여자'와 포목점에서 혹은 과수원 풀숲에서 밀회를 즐기는데, '양희'는 우연히 그 장면들을 모두 목격한다. 이러한 일들은 지독한 가뭄과 '눈을
감고 다시는 뜨고 싶지 않을 만큼 사나운 폭양'이 계속되는, '모든 것이 이상스럽게 엉망인 올 여름'에 일어나게 된다.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정희가 발그레한 모습으로 풍금을 친다. (…… 중략 ……) 운동장으로 언니가 걸어온다. 빨갛게 입술을 바른 언니가 코치 선생님을 만나고 있다. 양희야! 언니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읍내 여자의 입에서 나던 달큰한 냄새가 난다. 어디선가 시작종이 울리고 갑자기 언니가 캐들캐들 웃기 시작한다. 오빠가 언니의 머리에 산만하게 꽃을 꽂고 있다. 내 브로치! 언니가 화가 잔뜩 나서 양희의 뺨을 후려친다. 양희는 목이 컥 막혀 마른 침만 꿀꺽 삼킨다. 언니가 갑자기 다시 운다. 배는 북통만큼 불러 있고 아버지에게 맞은 얼굴에 흉터가 졌다. 언니는 배를 마구 두들긴다. 네가 누구? 언니는 정말 양희를 모르겠다는 듯 뚫어져라 본다. 그러지 마, 언니! 양희가 언니의 남빛 치마를 잡는다. 언니가 걸어간다. 정희처럼 운동장의 햇살 속으로 다리를 절름거리며. 양희가 애타게 불러도 언니는 뒤도 안 돌아본다.
(『겨울우화』, 215쪽)

인용문은 '양희'가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갔다 오다가 논두렁에서 땀을 흘리며 혼곤한 낮잠에 빠져 꾸게 된 꿈의 내용이다. '양희'가 얼마만한 정신적 혼란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이제 겨우 열두어 살 난 어린 아이로서는 견뎌내기 힘든 일들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양희'는 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초경'(初經)을 치른다. 비로소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북더기가 켜켜로 쌓여진 곳에 배를 움켜쥐고 앉자, 멀리 미류나무길로 천천히 걸어가는 읍내 여자의 하얀 모시옷이 보인다. 물빛 양산은 어디다 뒀는지 여자는 저녁 햇살을 그냥 받고 걷는다. 읍내 여자의 모습을 보자, 다시 속이 뒤틀린다. (…… 중 략 ……) 달달달 …… 여전히 들판에선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지루하게 들려 오는데도, 처음 와보는 아주 낯선 곳에 혼자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답답하게 가슴을 조여 와, 싸르륵 아파 오는 아랫배의 통증과 메슥거림을 참고 저녁별을 등지고 앉아 꽤 오랫동안 운다. 초경(初經)이다.

(『겨울우화』, 218쪽 )

<밤고기>의 끝부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지막 구절인 '초경이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이 작품 전체에 미치는 지대한 파급 효과 때문이다. 우선 앞에서 '양희'의 입을 통해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진술되는, '배가 싸르륵 아파온다'가 지니고 있는 암시적인 의미가 이 '초경'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서 완전히 밝혀진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작품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초경'이라는 낱말을 작품 맨 끝에 배치해 두고, 이에 대한 타당성 있는 암시를 주기 위해 '배가 싸르륵 아파온다'라는 귀절을 몇 번이나 앞서서 진술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우리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작가가 고심끝에 생각해 냈을 법한 이 '초경'이라는 말 한 마디로 해서 이 작품은 비로소 온전한 성장소설적 구도를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작품 전체의 이야기만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를 성장소설의 한 유형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 말미에 제시된 '초경'이라는 말을 통해 이 작품은 비로소 완전한 성장소설적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어린 초등학생 여자 아이를 주인물로 설정하고, 그로 하여금 여자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초경'을 치르게 함으로써 비로소 성인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밤고기>의 작품 구도는 신통하게도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와 그대로 닮아 있다. 물론 작품의 배경이나 등장인물들, 또는 진행되는 사건의 내용 등은 다르지만 그 기본적인 얼개는 같다.
<중국인 거리>는 6.25 직후를 배경으로 하여 화자인 '나'가 초등학교 3학년에서 6학년이 되기까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초조'(初潮)를 경험하기까지의 성장의 기록이다. '나'는 '아홉 살배기 버짐투성이 계집애'일 때 식구들과 함께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는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우는 소도시로 이주하여 살게 된다. 이곳은 '뙈놈들'과 함께 '양갈보'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다. 특이한 이국 정서 속에 성적 방종의 모습과 아울러 하층민의 삶의 고난이 뚝뚝 묻어나는 중국인 거리에서 '나'는 여러 가지 진기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한다. '나'의 성장의 징후는 탄생(출산), 죽음, 성(性)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기본적인 통과의례에 대한 의식의 눈뜸에서부터 비롯된다.
'나'는 생명의 탄생 혹은 출산에 대하여 아이답지 않은 조숙한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는 곧 어머니의 다산(多産)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한 아기의 탄생이 '한밤중 천사가 안고 오는 것이라든지 배꼽으로 방긋 웃으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벌거벗은 두 다리 짬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온다는 것쯤'으로 익히 알고 있으리만치 영악하고 조숙하다. 게다가 '나'는 '여덟 번째 아이'를 배어서 '수채에 쭈그리고 앉아 으윽으윽 구역질을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여자의 동물적인 삶에 대해 동정'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 생명의 탄생뿐만 아니라 죽음에 관해서까지도 일찍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게 된다. '나'가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는 죽음은 '검둥이'의 손에 의해 죽은 '매기 언니'의 죽음이며, 곧 이어 풍을 맞아 '다시 아기가 되었'던 할머니의 죽음도 경험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다산과 함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나'는, 마침내 생명의 탄생은 곧 죽음과 등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고 방식을 갖기에까지 이른다. '나'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섬찟한 일을 겪고 난 이후부터이다.

고양이가 골방에서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자 할머니는 고양이에게 미역국을 갖다주었다. 그리고는 똑바로 고양이의 눈을 쳐다보며 나비가 쥐 새끼를 낳았구나, 쥐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구나 하고 노래의 후렴처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날 밤 고양이는 새끼를 모조리 잡아먹고 대가리만 남겨 피 칠한 입으로 야옹야옹 밤새 울었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일곱 개의 조그만 대가리들을 신문지에 싸서 하수구에 버렸다.
(『유년의 뜰』, 70쪽)

오정희 특유의 섬뜩함이 배어나는 인용문을 주의해서 읽어 보면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은 고양이는 곧 일곱 번째 아기를 배고 있는 어머니로 치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양이 새끼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내 죽음을 맞게 되고 그런 과정을 지켜본 '나'는 생명의 탄생이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을 갖게 되며, 나아가서는 여덟 번째 아이를 배어서 입덧을 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머니는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성에 대한 희미한 의식의 눈뜸은 친구인 '치옥이'의 집에 세들어 사는 양갈보 '매기 언니'의 방에 들락거리면서 시작된다. 학교에 같이 가기 위해 '나'는 아침마다 '치옥이'를 부르러 간다. 갈 때마다 '그때까지도 침대 속에 머리칼을 흩뜨리고 누워 있는 매기 언니'와 '비대한 검둥이'의 모습을 보게 되는 '나'는 그저 막연히 남녀의 성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의 성에 대한 이러한 모호한 의식은 자신의 육체적 성장과 함께 어떤 중국인 청년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하여 더욱 구체화된다. '마악 생기기 시작한 젖망울'로 해서 '홑이불의 스침에도 젖이 아파 가슴을 싸쥐며 돌아누워 앓'는 '나'는, '치옥이'와 함께 이층집 '매기 언니' 방에서 놀다가 우연히 '중국인 거리의 이층집 열린 덧문과 이켠을 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과 마주친다. 그 이후 '나'는 그 '젊은 남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고 어느 날 그에게 종이꾸러미로 된 선물을 받고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초조'를 치르게 된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산고(産苦)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숨바꼭질을 할 때처럼 몰래 벽장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한낮이어도 벽장 속은 한 점의 빛도 들이지 않아 어두웠다. 나는 차라리 죽여 줘라고 부르짖는 어머니의 비명과 언제부터인가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를 들으며 죽음과도 같은 낮잠에 빠져들어갔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를 찾아내었다.
초조(初潮)였다. (『유년의 뜰』, 81쪽)

중국인들과 양공주들이 모여사는 빈민촌에서 많은 형제들로 인해 어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탄생과 죽음 그리고 성의 눈뜸이라는 삶의 주요한 통과의례들을 보고 겪으면서 성장하던 '나'는 마침내 '초조'를 치르게 됨으로써 비로소 성인의 세계로 들어선다.
'나'가 자신의 여성다움을 최초로 인지하는, 즉 '초조'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어머니가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는 순간과 일치한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생명의 탄생을 곧 죽음으로 인식하고 있 '나'는, 여성에게 있어서 '제 2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 '초조'를 경험함과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의 이미지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밤고기>와 <중국인 거리>의 내용 및 그 구조를 이와 같이 살펴볼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양자 사이의 주요한 유사점을 몇 가지 발견해 낼 수 있다.
먼저 이 작품들은 주인물인 여자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삶의 양태와 그 비극성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점차 정신적 성숙을 이룩해 나간다고 하는 성장소설로서의 전범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소설의 개념을 '유년기에서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한 인물이 겪게 되는 내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각성의 과정을 주로 담고 있는 소설들'이라고 다소 거칠게 정리해 볼 수 있다면 이 작품들은 이에 합당하는 전형적인 작품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유사점보다도 정작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작품 모두가 주요 제재로서 초경 모티프를 이용하였으며 아울러 '초경이다' 또는 '초조였다'는 같은 의미를 지닌 구절로 끝나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이 한결같이 '초경'(초조)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끝맺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 자체로 보나, 작가의 입장에서 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초경'이라는 한 마디 말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이 작품들이 온전한 성장소설로서 읽힐 수 있다는 점, 초경을 앞둔 다시 말하자면 낯설고 불안한 성인 세계로의 진입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앞두고 있는 '양희'와 '나'의 정신적 혼란과 불안을, '초경이다' 또는 '초조였다'라는 구절을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해 볼 수 있다.
이 구절이 가지고 있는 소설미학적인 가치 또한 주목할 만하다. 소설에 있어서 결말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의 정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결말은 작품 전체의 의미가 해명되고 제시되는 지점이다. 한 작품의 성공적 결말은 그 작품이 지닌 중심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잊지 못할 선명한 하나의 '인상'을 간직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결말은 작품 전체의 문학적 가치를 깨닫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의 하나에 해당되며 이것에 의해 독자들의 태도의 변화, 즉 세계관적 변화와 그 지평의 확대가 이루어진다. 결말이 이러한 기능을 능률적으로 수행해내지 못할 때 독자는 작품 자체에 대한 선명한 인식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작품은 쉽게 잊혀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와 같은 결말의 미학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정교하면서도 길게 확장된 결말 구조를 제시하거나 또는 순간적으로 짧게 끝나 버리는 인상적 결말 등의 다양한 변화를 구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두 작품의 '초경이다' 또는 '초조였다'로 끝나게 되는 결말 처리는, 작품 전체의 의미가 해명됨과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강렬하면서도 선명한 하나의 인상을 갖게끔 하고 나아가 진한 소설적 감동과 여운을 맛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다고 보인다. 요컨대 이 구절은 작품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이른 바 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모든 작가들은 공식적으로 등단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기 전에 그 준비를 위한 수련 시기, 즉 습작기라는 기간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 기간 동안에는 많은 선배 작가의 작품들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그대로 옮겨 쓰는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쓴다는 자체가 실제로 소설 쓰기 공부에 현저한 도움이 되더라는 고백들을 하기도
한다. 그 사숙의 대상이 되는 작가로는 최인훈, 김승옥, 조세희, 오정희 등이 주로 거론된다. 신경숙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자신의 습작 시절에 여러 선배작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오정희의 작품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고백을 인터뷰, 작가 탐방 등의 잡문을 통하여 여러 번 밝힌 바가 있다.

나의 20대의 얼마간은 오정희로 인해 유지되었다고 고백하려다가 참는다. 어쩌면 그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글쓰기에 꿈을 둔 나와 비슷한 연배들 중의 얼마간은 다들 그랬을 것이므로. 최루가스의 거리와 예술론의 강의실 어디에도 마음을 못 붙이고 선배작가들의 작품을 내 노트에 옮겨보는 일로 나의 회색을 참아냈던 시절, 가장 빈번하게 옮겨졌던 소설이 그의 작품들이었다. 강의실을 떠나 도서관의 문학실에서 전갈같은 한 때를 보낼 때도 옆엔 늘 오정희가 있었다.

(신경숙, 사로잡혀서 생(生)의 바닥까지 내려가기, 작가세계, 1995년 여름, 47쪽)

굳이 이와 같은 신경숙의 고백을 통하지 않고서라도 인물의 미묘한 내면 심리 묘사에 주력하는 작품 경향, 과거와 현실의 교묘한 교직(交織)에 의한 사건 전개, 감각적인 문체 등의 유사함을 통해서 우리는 신경숙이 선배 작가인 오정희에게서 적지 않은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가 있게 된다.


3.

본 장(章)에서의 논의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1995년 12월 『새의 선물』발간)은 근본적으로 오정희의 <새>(동서문학, 1995년 봄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품이라는 혐의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 <새의 선물>과 <새>의 유사성은 앞에서 살펴본 <밤고기>와 <중국인 거리>와의 그것만큼이나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은희경은 <새의 선물>이라는 단 한 편의 장편소설로 해서 단지 주목받는 신인작가가 아니라 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의 하나라는 호평까지 얻어낸 작가이다. 그러니까 은희경에게 있어서 <새의 선물>은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 되는 셈이다. 그런 만큼 <새의 선물>은 독자들에게서나 평자들에게서 호의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 바 있으며,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고 또한 빈번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새의 선물>은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앞뒤에 각각 설정된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의 '나'는, 1995년에 '무궁화호 발사 성공'이라는 T.V 자막을 보고 있는 현재의 '나'로서 까페에서 애인과 저녁을 먹고 자신의 아파트로 와서 정사를 갖는다. 카페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나'는 창문을 통해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쥐를 보게 되고, '나'는 곧 '어린 시절 변소에 쪼그려 앉아서 내려다 보곤 했'던 쥐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한다. 이것이 '겉 이야기'의 내용이다. 22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속 이야기'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기착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던 1969년 한 해 동안, 화자 '나'가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일 때 보고 들었던 자신의 경험의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액자소설의 형식을 갖춘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새의 선물> 역시 '속 이야기'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그래서 <새의 선물>은 하나의 전형적인 성장소설로 규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새의 선물>은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작품의 분량에 비해 그 짜임새 및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화자이자 주인물인 '나'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긴 하지만, 자신의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당찬 선언을 할 만큼 조숙하고 영악한 계집아이이다.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실성을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아버지는 어디론가 떠났기 때문에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부모의 사랑을 모른 채 할머니집에 얹혀 사는 '나' 역시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뒤틀린 심리와 조숙한 사고 방식을 갖게 된다.

나처럼 일찍 세상을 깨친 아이들은 어른들이 바라는 어린이 행세를 진짜 어린이 수준밖에 못 되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그럴 듯하게 해낸다. 그래서 어른들 비밀의 겉모습은 조금 엿봤을망정 그 비밀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한다.
( …… 중 략 …… )
또 한 가지 내가 어른들의 비밀에 접근하는 방법은 관찰이다. 할머니가 늘 칭찬하는 대로 나는 눈썰미가 있는 데다가 내가 본 것들을 내 나름으로 분석하는 데 흥미를 갖고 있다. 이따금 나는 동정심, 의리, 탐욕 등 사람의 마음속을 헝클어놓는 것들에 대해 실험을 하기도 한다. (『새의 선물』, 19쪽 )

'일찍 세상을 깨친 아이들' 중의 하나인 '나'는 운명이 자신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자신을 지켜줄 보호 장치는 위선이 아닌 위악임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순진한 열두 살 아이처럼 작위적으로 행동하면서 '관찰'을 통해 주위 어른들의 비밀을 하나 둘씩 캐내고 자기 나름대로 분석하며 또 실험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나'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 --같은 또래인 어린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자신보다 아래로 내려다 보고 조소와 비난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허위의식에 가득차 있는 위선적인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자신만의 잣대에 의해 분석, 평가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내가 아는 어른들의 비밀을 털어놓는 데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도, 빚진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인 '속 이야기'는 '나'에 의해 비범하게 관찰되고 비판되는, '나'를 둘러싼 주위의 어른들에 대한 '관찰 보고서' 내지는 '비밀 탐색 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다.
'나'가 기거하는 할머니집은 우물을 중심으로 하여 '마당 안쪽으로 들어앉은 살림집 두 채와 대문쪽에 자리잡은 가겟집 한 채까지, 다 합해서 세 채의 집으로 되어 있'는데 가겟집은 모두 세를 주어서 '뉴스타일 양장점', '광진테라', '우리 미장원' '문화사진관'이 들어서 있다. 흔히 '감나무집'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할머니, 삼촌, 이모, '장군이네 식구 전체, 즉 장군이와 장군이 엄마 그리고 그집 하숙생인 최선생님과 이선생님','재성이'를 업은 '광진테라 아줌마', '문화사진관 아저씨', '뉴스타일 양장점의 시다 미스리 언니' 등의 주역 및 조연들이 작중화자인 '나'에 의해 관찰되는 인물들인데, '나'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 하고 또한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된다. 이와 같은 작품의 전체 배경이 되는 공간 설정과 등장 인물들의 소개는 1장에 제시되어 있으며 2장부터 22장까지는 이러한 인물들과 관련된 자잘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화자가 22장과 에필로그를 통해, 어디론가 떠나있던 아버지가 나타나 자신을 '엄마라고 부를 계모가 있고 아직은 계모의 뱃속에 들어 있는 곧 태어날 동생도 있는' '그집'으로 데리고 들어간 일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60년대엔 나에게 아버지가 없었지. 그러니 이건 새로운 농담이 틀림없어, 70년대식 농담인거야.'라고 중얼거리면서 불쑥 나타난 아버지를 맞이한다. 그래서 '나'는 결국

새엄마와 열세 살이나 어린 동생,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것같은 아버지 어쨋든 그것은 나에게 있어 매우 새로운 삶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어른들과 달리 나는 내 삶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새로 만난 삶이 또 새로운 방법으로 나를 조롱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어짜피 그곳에서도 나는 삶을 멀찌감치 두고 보려고 애쓸 것이다. 그뿐이다.
(『새의 선물』, 383쪽 )

와 같이 아버지와 새엄마의 출현이라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조숙하고 영악한 아이답게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오정희의 최근작이며 중편소설인 <새>를 차근차근히 읽다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새의 선물>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줄거리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작중화자인 '나'는 열두 살 난 계집아이이다. '나'는 두 살 아래인 남동생 '우일이'와 함께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 아버지의 상습적인 구타에 못이겨 어머니는 오래 전에 집을 나갔으며 막노동꾼인 아버지는 '댐공사'를 따라 '먼 고장'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남매는 얼마 동안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바람을 맞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던 할머니가 '오줌에 담갔다가 꺼낸 오리알을 열심히 먹었지만 빨래를 하다가 으어어, 하고 쓰러'지면서 바람을 맞자 이들은 외삼촌집으로 옮겨 간다. 그렇지만 '나'와 '우일이'가 들어간 이후로 생겨난 불면증으로 해서 '아침마다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을 하고 미치겠어, 미치겠어 큰소리로 중얼거'리는 외숙모 때문에 두 남매는 이내 '큰집'으로 가게 된다. '일수쟁이 여편네'라고 불리우는 큰어머니와 복덕방을 들락거리는 무능한 큰아버지 밑에서 지내던 이들은 댐공사가 끝나고 돌아온 아버지를 따라 '새집'으로 살러 들어간다. 아버지가 데려온 '황금색 머리털이 어깨 아래로 출렁거'리며 '눈썹이 까맣고 입술은 빨'간 젊은 여자와 함께. '새집'은 '빈틈없이 얽은 얼굴의 안집 할머니'가 세를 놓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다. 이곳에는 '과부새'를 키우며 혼자 살고 있는 화물트럭 운전사 '이씨 아저씨', '좀체 말이 없는' 외판원 '정씨 아저씨', 공장에 다니는 '문씨 아저씨' 부부, '몸을 못쓰고 누워 있는' 안집 할머니의 딸 '연숙아줌마'와 연숙아줌마의 남편 등이 살고 있는데, '나'는 생활에 찌든 이러한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하나하나 관찰해 나간다. 얼마 후 '연탄을 갈 때마다 맞붙어 떨어지지 않는 연탄을 부지깽이나 식칼로 내리치며 아아 이 웬수라고 절망적으로 내뱉'곤 하던 '그 여자'는 '개나리꽃이 피어날 무렵, 담밑에 피어나는 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꽃이 피누나, 꽃이 피누나 중얼거리'더니 결국은 두 남매를 남겨 둔 채 나가 버린다. 아버지 또한 여자를 찾아 데려오겠다며 집을 나가 버리고 난 후 '나'는 '우일이'와 함께 살림을 하면서 살아나간다. 말하자면 소녀 가장이 된 셈이다. 당연히 이들의 생
활은 척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리 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한 방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소리내지 않기, 소리내지 않고 웃기, 소리내지 않고 울기' 등을 지키면서 살아나간다. 그래서 안집 할머니는 '어쩌면 이렇게 빈방같이 조용하냐'고 말한다. '나'는 '연탄을 갈 때 독한 가스 냄새에 캑캑 숨막히는 소리를 내어 보고 도마질을 할 때 전혀 그렇게 생각지도 않으면서 짐짓 아아, 이 웬수라고 그 여자의 말투를 흉내내'기도 하고, '우일이'에게 '구구단 외우기와 받아쓰기를 시키'기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나가지만 어른들의 보호막이 결여된 '나'와 '우일이'의 삶은 서서히 망가져 간다. 만화방에 다니기 시작하던 '우일이'가 '항상 창고에 사는 언니와 오빠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눈썹을 밀고', '팔뚝에 심장을 꿰뚫는 화살 모양의 문신'을 한다. '잇사이로 침을 뱉고 얼굴을 조그만 늙은 원숭이처럼 찡그리고' 다니던 그가 하룻밤을 새고 들어 온 후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고 누워 지내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입을
삐뚜름히 하고 웃기 시작'한다. '혼자 있을 때도 말을 그치지 않는' '우일이'는 결국 방구석에 누워 서서히 죽어가고, '매일 밤 조금씩 더 멀리 집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하던 '나'는 마침내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면 우일이가 무서워할지도' 모르므로 '촛불을 켜서 머리맡에 놓아주고' '부엌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집을 나'선다.

날이 저물었다.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어둠은 짙어졌다. 이 철로의 끝에 큰 도시가 있다. 아버지도 이 길로 떠났을 것이다.
우미야, 우일아.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철길 둑의 마른풀들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 어둠 속에 낮게낮게 가라앉으며 흐르는 개천의 물소리에 섞여 그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 …… 중 략 …… )
우주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 이름짓고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 이름지어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있었다. 우미야, 우일아. 그렇게 부르던 마음은 이제사 내게로 와 들리는가보다.
( <새>, 『동서문학』, 1995년 봄호, 85쪽 )

척박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정처없이 길을 떠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알지 못할 아득한 공중의 세계로 비상하는 '새'의 이미지를 읽어낼 수가 있게 된다.

<새의 선물>과 <새>의 유사성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먼저 사소한 몇 가지 사항부터 지적해 보자. 물론 그 상징적인 의미는 다르다 할지라도 두 작품 모두 '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제목을 정했다는 점이다. <새>의 '새'는 절망적인 현실로부터 벗어나고픈 화자와 '우일이'의 비상에의 꿈을 의미한다. <새의 선물>은 그 제목을 '자끄 프레베르'의 시인 '새의 선물'에서 그대로 빌어온 것임을 작품 앞에 시 전문을 실음으로써 밝히고 있다.
'쥐'에 대한 진술이 반복된다는 점도 지적해 볼 수 있다. <새의 선물>의 경우에는 작품 앞 뒤에 '나는 쥐를 보고 있다'는 동일한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쥐'라는 매개체를 통해 열두 살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또한 마감하고 있다. <새>에서는 <새의 선물>처럼 '쥐'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쥐'에 대한 서술이 반복되어 있음으로 해서 읽는 이의 관심을 끌
게 한다.
이와 같은 사소한 지적으로는 양자 사이의 유사성이 제대로 드러날 수 없을지 모르나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이에 대한 설명은 좀더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라 보인다. 우선 작중화자의 문제이다. 두 작품 모두 화자가 열두 살 난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로 설정되어 있다. 게다가 둘은 한결같이 부모의 부재로 인한 절망적인 현실 인식을 통해 어른들의 허위성, 가식성과 아울러 삶의 신산함, 비극성까지 일찌감치 깨닫게 된 조숙하고 영악한 아이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새의 선물>의 '나'는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선언하며, <새>의 '나'는 '나는 가끔 내가 늙은이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마른 나무들을 보면 내가 더이상 자랄 수 없는 나무처럼 자라버린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모티프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두 작품의 유사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새의 선물>과 <새>의 이야기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아이와 낯선 세계에서의 삶'이라는 동일한 모티프로부터 출발한다. <새의 선물>의 화자인 '강진희'와 <새>의 화자인 '박우미'에게는 아버지는 존재하되 어머니는 없다. 그나마 아버지는 멀리 떠나 있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아이들이다. 친척집에 얹혀 사는 수밖에 없지만, 거기는 또한 낯선 세계일 수밖에 없다. 낯선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나가자면 눈치가 빨라야 한다. 아울러 영악해야 한다.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작위적으로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들이 위악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람이 살아나간다는 것 자체에 일찍 눈을 뜰 수밖에 없게 된다. 세상의 황폐함, 삶의 지난함과 허위성, 세계의 비호의성을 이들은 일찍이 직접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두 작품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도 또한 동일하다고 보인다. 두 작품의 주인물들은 부모가 부재한 상태에서 친척집에 얹혀 살거나 혹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이들이 기거하는 곳은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아나가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새의 선물>의 경우는 '감나무집'이라는 공간이 그러하며 <새>의 경우에는 '안집 할머니'가 세를 놓아 여러 가구가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둘러싼 여러 어른들의 비밀스러운 삶의 모습을 엿보고 또는 관찰하면서 결국은 일찌감치 세상을 깨치는 조숙한 아이들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또한 두 작품은 모두 전형적인 성장소설적 구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먼 곳으로 떠나 있던 아버지가 화자 곁으로 되돌아 온다는 이야기 구조 역시 비슷하다. 다만 <새의 선물>의 아버지는 새여자를 얻어 다시 꾸민 안정된 가정 속으로 화자를 데려가는 데 비해서, <새>의 아버지는 화자 곁으로 되돌아 와서 잠시 동안 머물다가 다시 떠나간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고 아버지만 존재하되, 아버지는 화자를 돌보지 않고 멀리 떠나 있다는 상황 설정, 그리고 그 아버지는 결국 화자를 데리러 다시 나타난다는 이야기 구조는 두 작품이 동일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80년대의 문학이 광장의 문학이었다면 90년대의 문학은 밀실의 문학이다.'라는 어느 평자의 지적은 90년대 문학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진술 속에는 탈이데올로기로 인한 거대 서사의 실종, 개인의 내밀한 실존적 욕망을 그린 미시적 담론의 범람, 이에 따른 여성작가·여성성·여성소설이라는 용어들의 확산 등으로 요약되는 90년대의 문학적 특성들이 모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들어서서 이와 같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 것은 '여성작가들의 대거 문단 진출'이라는 또다른 주목할 만한 문학적 양상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러나 역사, 정치, 사회에 관련된 거시적인 문제보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한 개인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데 있어서는 작가적 기질이나 자질로 볼 때 아무래도 남성작가들보다 여성작가들이 더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여성작가들의 급부상'이라는 90년대적인 특이한 문학적 양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보인다.
90년대를 여성작가의 시대라고 상정해 볼 때 오정희는 이렇게 90년대 문학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요한 역할이란 가시적인 문단 활동이나 의식적인 작가 활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젊은 여성작가들이 즐겨 사숙하고자 하는 선배작가로서의 꾸준하면서도 일관된 창작 활동을 의미한다.
비록 과작이긴 하지만 오정희는 지금까지 창작에 대한 엄격한 장인정신을 견지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함으로써 후배 여성작가들이 은밀하게 모방하는 하나의 전범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의 여성작가들이 개인의 내적 성찰이라는 존재론적인 탐구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인물의 내면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들을 내놓는다든가, 혹은 여성들의 자아실현이나 자기 정체성 추구 등의 주제를 담은 페미니즘적인 작품들을 주로 발표하게 되는 것은, 등단 이후부터 현재까지 인물의 내면세계에 대한 집요한 추구와 여성성의 탐구라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지니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온 오정희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현대의 한국문학에서 취약한 부분으로 지적되는 내면의식의 추구라는 맥락에서 볼 때 오정희의 소설은 그 선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범상한 삶에 대한 범상치 않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적확하고도 꼼꼼한 언어구사력과 문체 정신을 그 도구로 삼아, 비의적(秘意的)이며 불가해적인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포착해내는 오정희의 소설들은 명실상부하게 후배작가들이 본받을 만한 하나의 전범으로 자리잡기까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관점과 인식을 토대로 삼아 오정희의 소설이 최근의 젊은 여성작가들의 작품에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 영향이 어떻게 변형, 발전되어 형상화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구체적인 작품 분석과 그 대비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다양한 소설들이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쓰여져 왔고 또 지금도 쓰여지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또한 여러 평자들에게 빈번한 비평의 대상이 되며 나아가 같은 작가들에게까지도 사숙의 대상의 되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작품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잘 쓰여진 소설일수록 다양한 해석의 통로를 열어두기 마련이다.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독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독법에 의존하여 소설 작품을 수용할 터인데, 잘 쓰여진 작품은 그 독자들 하나하나에게 각기 색다른,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잘 쓰여진 소설 작품들은 또한 후배 작가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라고 본다. 모든 작가들은 그 이전의 선배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읽고, 생각하고, 쓰는 방법을 터득하였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오정희는 잘 쓰여진 작품을 꾸준히 생산해냄으로써 한국 문학에서 흔치 않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개성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많은 후배작가들에게 사숙의 대상이 되는 오정희와 같은 작가를 보유하고 있는 이상, 21세기를 향한 한국 문학의 미래는 보다 더 풍요로운 터전을 일구어 낼 수 있으리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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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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