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의 자리

2003.10.10 17:41

박경숙 조회 수:243 추천:16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회색인의 자리

조선 오백 년을 포함해서 한국 근현대 사상사는 양자택일을 강요한 역사였다. 조선의 지배철학인 성리학은 본질과 현상을 하나의 합일된 체계로 해석하는 자못 통이 큰 이론이었지만, 임금의 행위와 관련된 구체적인 선택의 문제에 이르면 치열한 정쟁(政爭)을 자주 유발했다.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남인과 서인이 격돌했고, 인사문제로 청남과 탁남이 갈리고, 처벌문제로 시파와 벽파가 나뉘어 싸웠다. 해방 후에는 분단과 냉전이 있었다. 분단은 가족과 영토의 분단뿐 아니라 사상의 분단을 낳았다.

학문과 사유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사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지식인은 그것이 어떤 경계이든 항상 월경의 유혹을 느낀다. 지식인의 기질일까, 아니면 종합을 향한 지적 모험일까.

그래서인지 남과 북의 경계를 넘었던 문학인들은 수없이 많다. 일찍이 카프(KAPF)파를 대표하는 인물인 임화(林和)가 월북을 감행한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한가닥 흔들림 없이 삼팔선을 넘었는데, 이미 청년시절부터 준비되어온 선택이었다.

“오오 나의 그림은 분명히 나를 반역했다/ 뺑기냄새를 피우고 피냄새를 달랜다/ 그리할 것이다. 나는 이후부터 총과 마차로 그림을 그리리라”(임화, ‘화가의 시’, 1927년). 그러더니 ‘曇-1927’을 발표해 프로 시(詩)의 영토로 넘어갔다. 임화는 그가 선택한 이념의 땅에서 1953년 미제간첩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다.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불리던 벽초 홍명희도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남북협상을 추진하기 위해 월북한 후 귀환하지 못했다. 이들에 비하면 유리알 같은 언어로 감성적 시를 쏟아내던 정지용이 좌익계열의 문인들과 어울렸던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세간에 알려진 ‘향수’보다 훨씬 그의 심상을 잘 드러낸 시 ‘바다 2’에서 이데올로기적 혐의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바다는 뿔뿔이 달어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정지용, ‘바다 2’). 얼마 전 미확인 보도에 의하면, 정지용은 월북(피납?) 도중 산정호수 부근에서 미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어떤 회한이 스쳤을까?

이념의 경계선을 가장 첨예하게 다룬 작가로 최인훈이 있다. 그는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이념의 족쇄를 채운 시절에 그것의 본질을 과감하게 풀어헤친 작가이다. 가령 ‘회색인’이 그렇다. ‘회색인’은 이데올로기의 덫에 갇히기보다 끊임없이 거리를 두는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려낸다.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기에 그는 구름처럼 자유롭지만, 외로움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주인공 독고준은 이름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고독한 존재다. 북쪽의 W시(아마 원산인 듯한)에서 혼자 월남한 그는 일가친척이 없는 천애의 고아이자 대학생이다. ‘갇힌 세대’의 편집인인 그의 친구 김학이 독고준을 편집동인으로 영입하려 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도피한다. 절대 절명의 고독을 유지하는 것, 모든 인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현실과 이념의 괴리에서 생겨나는 언어(言語)를 되씹으며 기다리는 것이 독고준의 세계이다. 언어야말로 회색인이 위안을 느끼는 유일한 대상이다.

“제 그림자를 쫓고 제 목소리가 되돌아온 메아리를 되씹는 수인(囚人)의 언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건져올린다. 존재와 현실의 괴리가 끝나지 않는 한 그는 착륙하지 못한다. 그런 독고준을 착륙하게 만든 것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 이유정에 대한 사랑이었다. 마치 혁명을 선택한 ‘광장’의 이명준이 은혜에 대한 사랑에 착륙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중립국으로 가는 타고르 호 갑판에 내려앉은 갈매기에 은혜와 뱃속의 아기 얼굴이 겹쳐진다. 은혜와의 독백, 그리고 이명준은 푸른 물 속으로 사라진다.

송두율 교수는 그의 소신대로라면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경계인(Grenzgaenger), 그것은 ‘체조선수처럼 좁은 수평대 위에 올라선 위태로운 삶’이다. 송 교수가 그의 책 말미에서 고백한 대로, 어릴 적 정취가 밴 광주 충장로가 피로 물들여진 조국 현실에 쉽게 착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부유(浮游)는 남과 북을 객관적 시선으로 그려낼 가능성도 있었다는 게 학계의 기대였다. 그런데 왜 그는 북(北)에 서명했을까? 그리고 이제 제주도 같은 곳에 안착하는 꿈을 꾸게 되었는가? 사랑이 서명(書名)보다 진한 것일까? 그는 조국의 현실에 회색인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몰랐을까?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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