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숙[-g-alstjstkfkd-j-]단편집 『안개의 칼날』서문

  박경숙
  

                         -마음의 뜨개질-

뭔가 견딜 수 없을 때는 뜨개질을 한다. 우르르 밀려올라오는 마음 밑바닥의
것들을 한 오라기 실로 뽑아내어 컴퓨터 앞에서 무엇인가를 짜낸다. 그것이 어
디에 쓰일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뽑아져 나오는 실 줄기를 감당할 수 없기에.

미주에서 소설을 써왔던 지난 9년여의 세월동안 멈출 수 없던 마음의 뜨개질
은 이렇게 열한 편의 단편소설과 두 편의 중편소설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결
코 급한 속도도 아니었고 조금은 게으르고 꾸준했던 내 나름대로의 작업이었
다.

처음 소설을 썼던 열아홉 살의 대학 일학년에서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파릇
한 젊음을 고뇌하며 네 편의 소설과 여러 편의 콩트를 대학 교지와 신문에 발
표하고 졸업을 했던 그해 봄, 고향집 골방에 처박혀 책 한 권을 읽었다. [문학
과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의 소책자였는데, 무심코 읽어나가던 나는 멈칫 책장
에 눈을 고정시켰다. ‘인생에 대한 복수심이 없다면 문학을 할 수가 없다’라
는 글귀 때문이었다. 인생에 대한 복수심이라…….

미래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젊은 나에겐 참으로 끔찍한 구절이 아닐 수 없었
다. 그 당시 나는 대가족 제도의 일원이었고, 고향 땅은 체면과 체통을 중시하
던 지역사회였다. 우리 가족 누구의 삶을 보아도 그야말로 복수심을 품을 만
큼 불행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나 자신이기 전에 아버지의 딸이란 것이 더 잘
통하던 그곳에서, 고뇌하는 문학인보다는 행복을 꿈꾸는 환한 처녀의 이미지가
내게 훨씬 잘 어울렸다.

그러나 모두가 잠이 든 깊은 겨울밤 사그락 사그락 원고지장을 넘겼다. 하얀
눈이 고요히 마당에 쌓여가는 동안 나는 세 편의 소설을 완성하였다. 문학을
꿈꾸는 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봄직한 신춘의 문턱, 예고했던 낙방엔 씁쓸함도
없었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복수심이 에너지가 될 만큼 치열하다는 문학을
체념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그 다음 생각한 것은 어머니처럼 살리라는 소망이었다. 나는 요리를 잘 하는
여자가 되리라. 집안을 윤기 나게 가꾸는 여자가 되리라. 더도 덜도 말고 어머
니처럼만 살리라.

소망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었다. 나는 어느새 미국 땅에 앉아 내 감성을
뜨개질하고 있었다. 너무 손을 놓아 솜씨가 퇴색해버린 뜨개질은 때로 나를 우
울하게 했다. 그런데 왜 멈출 수 없던 것인지. 어떤 것은 너무 성글게, 어떤
것은 올이 튀어나오게 한 작품씩 뜨개질이 완성될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성
에 안 차지만 이것들을 한꺼번에 꿰맞추어 내 시간의 기록으로 이렇게 내놓는
다. 그 쓰임을 감지하는 것은 읽는 이의 마음에 있다고 믿으면서.

어머니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해 써 내려갔던 이 소설들을 어머니
영전에 바친다. 그마나 이 엉성한 뜨개질을 할 수 있던 것은 당신이 내게 주
신 그 삶의 뿌리 때문이었다며. 다음엔 더 완벽한 것을 당신께 바치리라
며.    
                                        
            2003년 6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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