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오면 -꽁트-
2007.06.18 02:20
때가 오면 -꽁트- 글마루 2003
그는 지금 암 삼기다. 그러나 아직도 내세를 바라보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가 편안했던 팔자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죽을 고생을 했다. 다만 이 세상이 좋아서이다. 처자식을 거느리고 오손도손 살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고, 가족을 떠난 딴 세상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굶으나 새나 식구들과 점벙점벙 살고 싶었다. 가끔 그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예수쟁이는 욕심도 많아. 죽어서까지 천당에 가겠다고. 난 그런 욕심 안 부리네. 내겐 여기가 천국이야.”
일 년 전 일이다. 그는 밤 낮 없이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사치로만 알았던 건강보험에 들었다. 그러나 그 보험이 생각한 것과 달리 금방 의사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육 개월이 지나야만 전부터 알았던 지병이 지불보장이 된다는 것이다.
기다렸다. 그는 배를 움켜쥐고, 가족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육 개월이 육년도 되게 길었다. 육 개월이 되자 미리 수소문 해 놓은 위장전문의에게 찾아갔다. 의사는 배를 만져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X레이를 찍어보아야 알겠지만 보기에 좋지 않다고 했다. 그와 가족은 그가 중증임을 직감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하루는 지옥이었다. 나흘 째 되는 날이다. 그의 처는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오빠를 찾아갔다. 오빠는 사무실에 없었다. 그의 집에 전화를 했다. 올케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소식 못 들었어요?” 전화 저쪽에서 주저하는 기척이 있었다. 그들은 벌써 뭔가 알고 있다. “알고 있군요?” 전화에 대고 울부짖었다. “고모께 말하지 말라 했는데...” 올케는 또 주춤거린다. 그녀는 애원했다. “내게만 먼저, 내게만 먼저...” 벌써 우는 소리였다. 올케는 마지못해 입을 떼었다. 위암이며 암이 간에까지 번져 아주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다. 세상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서 소낙비가 내렸다. 한 세상 한 세월을 한 목숨같이 살아온 그들이다. 그런 그가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살아진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막 보고 나온 남편이 미치도록 그립다.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는 발동 소리만 내고 있을 뿐, 눈에서 내리는 비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겨우 집에 왔다. 그를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눈은 물에 담긴 오징어같이 불었다. 마당에 널려 있는 물 호스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대고 물을 뿌렸다. 머리까지 다 젖었다. 타월로 얼굴을 닦으며 남편 방으로 들어섰다. 가까스로 수건 사이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은 빙그레 그 미소에 답했다. 그의 처는 그런 그를 보자 다시 격정이 일었다. 앞문을 차고 밖으로 뛰어나와 펑펑 눈물을 쏟았다. 호스로 물을 끼얹고 이번은 뒷문으로 들어갔다. 타월로 얼굴을 가린 채 그의 옆에 앉았다. 자신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소곳한 그의 모습이 또 갈기갈기 가슴을 찢으며, 그녀는 다시 호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끝낸 의사는 몇달 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암이 번져서 손을 댈 수가 없었고, 음식이 내려 갈 수 있도록 만 뚫어놓았단다. 가족은 그에게 이 사실을 속였다. 많은 거짓말을 해야 했다. 회전목마를 타고 돈 몇 주간의 곤두박질은 여기서 일단 멎었다. 이제 무슨 기계를 타고 돌지 그의 시한부 인생의 앞날은 미지수였다.
수술대에서 깨어나 하늘과 땅을 보았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그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팔층에서 보는 장난감 같은 차와, 개미같이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새털구름이 떠 있는 연초록색 하늘은 어쩌면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이것을 볼 수 있게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더 살고 싶다는 욕심이 불길같이 솟았다. 이상한 것은 항암주사를 맞고 있는 몸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 기뻐진다는 사실이다. 이다지도 괴로운 약이 암인들 안 죽이겠는가 하는 희망에서였다. 그는 기쁘기만 했다.
그 때 그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오래 살 수 있는 발상이다. 그 발상은 이런 것이었다. 하루를 한 달로 생각하며 사는 방도였다. 그러면 한달 서른 날은 서른 달이고, 반년이면 180달, 즉 15년이 되는 꼴이다. 십오 년을 더 산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착상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족했다. 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일 년을 넘기고 이년 째로 접어들었다. 이미 삼십 년을 산 계산이다. 그러나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까지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 자기는 죽는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영이 있어 하늘로 올라간다고들 한다. 그 말이 맞는 말일까. 과연 천당이라는 곳이 있을까. 그에게 수도 없는 의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은 점점 더 괴로워서 이젠 가족을 생각할 겨를도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덜 아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너무 아파서 정신을 잃을 때도 많았다.
“아버지!” 하고 그는 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처는 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히 간직된 분이었다는 것을-. 이북에 두고 나온 아버지였기에 아들은 평생,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살았다. “아버지, 저를 아프지 않게 해 주시오.”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눈은 철문같이 닫쳐 있었지만, 비는 마음은 간절했다.
그 순간이다. 내 아버지가 무한하게 자비로운 새로운 아버지로 변하고 있었다. “아! 아버지시여!” 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저를 걷어 주십시오.“ 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내세를 숨 가쁘게 찾고 있었다. 모로 돌린 고개 한 쪽 눈에서 한 가닥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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