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일

2007.06.18 13:05

배희경 조회 수:48 추천:1


        어느 봄날의 일                       “글마루”  2004      

   봄은 좀처럼 와 주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밖으로 뛰어나왔다. 북녘 땅에서 타고 내리는 냉한 공기는 아직도 햇살에 끼어 있다. 나는 해양한 성천강 앞 둑에는 봄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희숙이와 연숙이를 불러 같이 가 보리라고 마음먹었다. 쭈그렸던 몸을 다시 길게 펴고 그들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그 집 대문 앞에는 반짇고리에만 있어야 할 바늘이 땅에 온통 깔려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에 떨리기 시작했으나, 엄마를 기쁘게 해 줄 욕심으로 바삐 바늘을 손바닥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는 더 크고 다급한 목소리로 그들을 불러댔다.
   “희숙-아, 연숙-아 아이 놀겠니이?” 나는 바늘 일로 몹시 불안했다.  “노올자” 하는 그들의 대답은 안채와 바깥채에서 똑 같이 들려왔다. 곧 그들은 큰 대문 속, 쪽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보자 황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버렷! 그 바늘 빨리 버렷!” 한다. 갑작스런 벼락에 나도 기겁을 하며 손바닥의 바늘을 땅에 뿌렸다. 물결치듯 반짝였다.
    우리는 버선발로 진창을 밟듯 바늘 위를 건너, 뛰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래 어째서?” 하는 내 물음에는 대답도 없이 둘은 앞서서 달렸다. 나도 따라 달렸다.  숨통이 끊어지게 달렸다. 얼마만큼 갔을까, 연숙이가 숨을 몰아쉬며 말을 꺼냈다. “할부지 첩이 울 식구 죽으라구 바늘 뿌렸대.” “어째서 죽으라구 그랬니?” “할부지께 젊고 고운 새 첩이 생겼대.”    “ ?  ..... ”

    그들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채 변호사의 손녀들이다. 집이 대궐이었고, 안채에는 할머니와 큰아들 가족 즉 희숙이네가 살았고, 앞채에는 둘째 아들 연숙이네 가족이 살았다. 그리고 사랑채에는 셋째 넷째 아들들이 기거하고, 그 뒤 독채에는 변호사 사무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제왕 같은 할아버지의 나쁜 버릇은  첩을 꼭 큰댁 바로 옆집에 두고 사는 일이었다.  
   그 첩이 물러나게 되었다. 새 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묵은 첩은 이를 갈며 바늘을 뿌리고 떠나갔다 한다. 그런 그 바늘을 줍는 사람은 죽는다고 했다. 나는 연숙의 말에 두려움에 떨며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또 보고 있었다. 연숙이는 이런 말도 옮겼다. 어른들은 그 여자가 저주하며 너무 이를 갈아서, 차차 이빨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얼굴이 하얗고 참 보기 좋았던 그녀가 합죽 ‘호구랭이’가 돼 있을 얼굴을 연상하며, 왜 어른들은 좋아했다가 또 저리도 미워 죽으려고 할까 생각했다.  
  
   우리는 성천강 둑까지 왔다. 생각대로 둑에는 봄이 와 있었다. 저 발아래 슬픈 일 뿐인 세상과는 달리 봄기운이 흥건히 퍼져 있었다. 둑엔 내가 잘 아는 뱁쪼개며 쑥, 돈나물등 각종 햇풀이 파릇했고, 아래 강물은 은색으로 반짝였다. 하늘은 눈부시게 화사했고 멀리 보이는 능선은 어느새 겨울 태를 벗고 연두색으로 변해 있었다. 봄은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답게 찾아와 주었을까. 내 마음은 기뻐서 터질 것만 같았다. 풀풀한 봄내음이 내게서 모든 두려움도 걷어갔다. 아직까지도 쌀쌀한 강바람은 빨갛게 달은 우리의 볼을 시원하게 식혀주고 있었다.

   이렇게 내가 기다렸던 봄은 어른들의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에게 온 몸으로 안겨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어느 먼 봄날의 일을 되새기고 있다.
   아홉 살, 소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 해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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