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숙제

2008.03.26 06:29

성민희 조회 수:41


오랜만에 만난 문우가 예전과는 달리 까칠해진 얼굴이라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더니 줄줄 이 요즘 생활을 쏟아내었다. 작년부터 한국에 계신 친정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올케가 반지를 훔쳐 갔다 는 둥, 팔찌를 훔쳐갔다는 둥 속상해 하시며 부쩍 올케를 미워하셨는데. 그렇게 좋던 고부 사이가 어떻게 이렇게 깨어져버릴 수가 있나 싶어 나가봤더니 어머니는 신경 쇠약 증세로 몸과 마음이 몹시 피폐해져 계셨다고 했다. 혼자 사시는 노인의 외로움이 너무 힘들어 병까지 얻으셨나 싶어 어머니를 모셔와서 종합 검진 을 해 봤더니 신경 쇠약에다 치매의 조기 증세까지 겹치셨단다.  신경 쇠약을 고칠 것인가 치매의 진행 속도를 늦출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의사의 말에 종잇장처럼 마르신 몸부터 회복 시켜드릴 양으로 신경 쇠약 치료를 시작한 뒤부터, 조금씩 살이 오르며 보기가 좋아지긴 했지만 치매기는 진행되고 있어 금방 하신 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리시니 그것 또한 마음 아픈 일이었다.   발톱이 살을 파고 들어서 의사가 발톱을 빼어주셨는데. 벌겋게 된 발톱을 보고 언제 봉숭아 물을 들였는지 고개를 갸우뚱 하시더란다. 공원에 나가 봄 꽃들의 화사함에 감탄을 연발하며 행복해 하신 분이 돌아와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경치 좋은 곳에 놀러 가자고 조르시고. 시간만 나면 물건을 도둑 맞을까 봐 종이에 싸고 또 싸고 어디로든 숨기시는데, 돌아앉아서 물건을 싸고 계시는 모습을 상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의 보폭에 맞춘 느린 아침 산보에, 목욕에. 정말 힘들다는 소리에 나는 또 한번 우리 어머니께 감사하단 마음이 들었다.   영리하고 건강하신 옛날 이미지 그대로, 신체 어느 부분 하나 나빠지지 아니하고 잘 듣고 잘 보시고, 젊었을 때의 그 총기마저 간직하고 계신 어머니가 참으로 장하고 고마웠는데 요즈음, 몇 주간 병을 앓고 나신 얼굴에 주름이 부쩍 늘어나셨다. 하고 싶은 말씀도 입 속에서 중얼중얼 하며 삼키는 모습이나, 우리가 샤핑 간다면 절대로 빠지지 않고 따라 나서시던 분이 계속 사양하시는 게 인제는 영락없는 팔순 노인 이시라는 실감이 든다. 뇌수술 하신 시어머니를 돌보며 홀로 계신 친정 어머니를 안스러워하는 친구나, 구순 시어머니 손을 꼭 잡고 건강하심을 고마워하는 친구나, 치매를 마주보고 있는 어머니가 불쌍하다며 마음 아파하는 문우를 보며 우리의 아이들도 언젠가는 우리들을 보며 그런 마음을 가지겠지 하는 서글픔이 생긴다. 그런 날이 멀리 있지 않다는 초조함도 함께. 어느덧 중년 고개도 한참 넘어온 나이. 노년의 시간은 한 치 양보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겠지만 그 시간을 텀벙거릴 때 좀더 힘 있게, 깨 끗하게, 멋있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식들이 전혀 보호해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안스러워 하거나 불쌍히 여겨지지 않는 그런 씩씩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자식들 다 키우고 시간이 절절이 남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리고 열심히 준비해야 할 삶의 마지막 과제 중 하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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