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의 무대

2007.06.24 01:24

배희경 조회 수:42


                갈매기의 무대                     2002년

   항상 마음속에서 찾아 헤맸던 곳, 그곳과 같은 곳을 찾았다. 내가 많이 외로웠을 때 그 품에 끼어 주었고,  갈팡질팡 눈이 허공에 떠 있을 때 나의 눈을 잡아 주었던 곳이다. 돛단배가 수도 없이 드나들던 바닷길을 보며, 배는 갈 길과 돌아갈 길이 있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울었던 곳이다. 그 곳은 갈매기가 가고 오는 배를 반기고 있었다. 그런 곳과 같은 장소를 찾아서 나는 지금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바다 위에 갈매기가 유유히 날고 있다. ‘웨더맨’이 빗줄기를 그려 넣으며 비가 온다고 호들갑을 떨었어도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가까이 하얀 구름이 회색으로 바뀌고 있는 것만이 예보를 조금 증명할 뿐이다.
   갑자기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왔다가 급회전해서 돌아간다. 무슨 이유로 일제히 날았을까. 군중심리였나? 새들이 하는 일이 점점 재미있어진다. 광대한 바다에 잠깐 한 마리의 갈매기 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몇 초 일 뿐, 일곱 여덟 마리가 다시 여기저기서 날아오른다. 더 더 많이 날아오른다. 아니 이것은 갈매기들의 방대한 무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검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과 회색 빛 구름 위에서 새들이 연출하는 무대임에 틀림없다. 출연진이 무리가 되었다 하나로 또 열로 무시로 바뀐다.
   누군가가 곱게 접은 종이제비를 다발로 날렸다. 갈매기들이 큰 곡선을 그으며 종이제비같이 떴다가 슬쩍 무대 뒤로 사라졌다. 어딘가에 가서 앉은 모양이다. 잠깐 동안 파도 소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막간인가. 그러나 막간치고는 너무 짧다. 다시 왼쪽에서 철떡 철떡 날개를 접으며 떼를 지어 등장한다. 다음 도약을 위해 충전하고 있는 동작인가, 여유 만만한 연기가 장관이다.
   올려다보았다. 한참 높이 솟은 유선형 가로등 위에 참새 두 마리  앉아있다. 얼마나 되었을까. 한 마리가 그곳을 떠난다. 금세 다른 한 마리가 그 뒤를 따른다. 둘은 부부인 모양이다. 저 두 부부도 우리들 사람처럼 내일을 걱정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들도 한 순간에서 한 순간으로 넘어가는 다음 순간이 내일일터이니 어찌 걱정이 없겠는가.

    파도를 타고 희끗 희끗 물결이 굴러온다. 갈매기 날개 밑에 희끗 희끗 시간도 굴러간다. 문득 오늘 아침 일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짓는다. 세수 하고 거울을 보았다. 앞머리가 희끗 희끗하다. 또 물을 드릴 때가 되었다. 귀찮다. 차라리 머리를 길러 얹은머리를 할까 생각하다가 곧 나를 제어한다. 병이 들면 시중드는 사람이 힘들겠지 한다. 군더덕지 같은 생각이다. 거울 앞에서 시들히 물을 드리며 나 자신을 비웃는다.

   다시 자연 무대로 돌아온다. 회색 구름 위에 검은 구름이 덮치더니 파란하늘에서 천둥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갈매기들이 바삐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먹이를 찾으려는 모양이다. 다급해 하는 그들의 몸짓에서 내 마음도 바쁘다.  
   한참동안 그러고 있는 내 눈앞에 쌍둥이 유모차가 공원의 종려나무 아래를 총총히 지나간다. 참 바쁘기도 하다. 공원까지 왔으니 좀 더 지금을 즐겼어도 좋으련만. 왜 이 순간은 없고 다음 순간만 있을까. 오늘보다 내일 걱정으로 밀려 사는 인간사가 짜증스럽다.

   바다에 면한 공원의 잔디밭을 본다. 수 십 마리의 갈매기가 떼로 와서 앉았다. 잠깐 후 그 중 한 마리가 후루루 날아오르니 모두 따라서 날아, 목책으로 처진 나무 등거리에 가서 앉는다. 나란히 나란히 등을 돌리고 일렬로 앉아있다. 그들은 자연을 무대로 좌석을 메운 관중이다. 바다만 보고 있다. 사람이 사는 육지를 바라보는 갈매기는 한 마리도 없다. 웃음이 난다. 어지러운 우리 인간사를 비웃는 듯해서다. 엄숙히 앉아있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금방 박수갈채가 터져 나올 것 같은 착각에 당황하며, 나도 같이 관중 속에 끼어든다. 허허하게 비어가기 시작한 마음이 수천 입자가 되어 자연에 빨려 들어간다. 세상의 어지러움이 정화되어 마음이 비어 가는 순간이다. 인간이 언젠가는 이 대자연과 합쳐지는 엄연한 섭리를 나는 왜 번번이 잊어버리는지 모르겠다.

    방파제에 하얀 파도가 부서진다. 돛단배 한 척이 높은 파도를 타고 오른 쪽에서 뛰뚬 뛰뚬 나타나 갈매기 무대에 끝막을 치며 왼쪽으로 건너간다. 나도 인간사의 시름을 접고, 끝장을 알리는 객석에서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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