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을 수집하듯

2007.07.10 01:10

배희경 조회 수:49 추천:4


          보석을 수집하듯                     “글마루”2000년


    여행만 떠나면 한번 씩 감정을 터뜨리는 민망스런 버릇이 내게 있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자연의 위력에 내 밑바닥의 격정이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캐나다의 Canadian Rocky를 끼고, 광대한 계곡을 달린다. 곧 비를 뿌리려는가 높게 뾰족 뾰족 솟아난 돌산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구름을 휘휘 감아 스카프로 두른 여인네들이 어디를 가려는지 나들이 차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술렁거리며 부산하다. 그러나 멀리 오른 쪽에 보이는 산은 푸르다. 산엔 아직도 눈이 도마뱀 형국으로 남아, 사나운 짐승을 품은 아량을 보인다. 양쪽으로 가파른 돌산과 푸른 산맥이 좋은 대조를 이루며 눈길을 끌고 있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곳 국립공원의 이름을 딴 마을 Banff에 들어섰다. 이름을 따를 만도 해서 팔방이 비경이다. 필경 “갈리버 여행기”속의 소인국이다. 마을이 한 시간으로  내 손에 잡히는 앙증스러움이 간지럽다. 우리는 소설 속의 난쟁이가 되어, 상점 한번 들렸다가 앞 산 한번 쳐다보고 또 한 곳 들렸다가 뒷산 한번 쳐다본다. 병아리 물 쪼아 먹듯 경치를 쪼아 먹고 있었다.

   소인국을 나와 호수를 찾아 달렸다. 그 수많은 호수의 아름다움이란. 그중에서도 Emerald Lake는 이름과 같이 보석 그 자체, 금광석이지 물이 아니었다. 피라미의 입질 하나 없는 녹색의 호수는 그 색이 너무나 짙어 손가락으로 꾹꾹 찍어도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사방팔방 철철 흐르는 강물의 풍만함은 또 어땠겠는가. 메마른 사막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에겐 오관으로 받는 풍요의 적심이었다. 예년의 네 배가 더 왔다는 눈으로 그 넘침은 광기를 띤 자연의 열광이었다. 수풀 사이사이를 뚫고 넘쳐흐르는 물 물 물과 강물 또 강물, 우리는 넋을 잃고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차는 덩달아 상쾌하게도 달렸다.
   차에서 음악이 흐른다. 그것을 듣는다. 내 볼에 드디어 눈물이 타고 내린다. 찬란한 환희의 자연에서 인간 무상을 보는 허무-. 강은 오늘도 내일도 흐르나 물은 항상 새롭다. 물도 흘러가고 인간도 흘러 사라진다. 나는 자연 앞에 알몸을 들어내 놓고, 파고드는 위력에 떨며, 천애의 고아가 되어 운다.



   또 차를 몰고 멀리서 보아온 만년설을 설레임으로 밟는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얼음판은 건물 사십층 높이의 두께란다. 눈이 와서 위에서 다져지고, 그 밑바닥에선 계속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만년을 녹지 않고 있는 것 갗아 만년설로 이름 했겠지. 세계 인구가 다 서도 남는다는 어마어마한 면적의 얼음판에 섰다. 사람의 상상을 넘어선 자연의 힘이며 신비다. 마시면 백년을 더 산다는 얼음물을 마시니 세월의 맛인가 그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설사 물맛으로 백년을 더 산다 한들 만년의 세월 앞에 선 사람의 존재란 그것은 티끌도 아니었다.
   우리는 만년설을 뒤에 하고, 푸른 산이 둘러싼 Lake Louise에 닿았다. 거창하게 자리한 호텔의 하루 숙박료는 사백 불이라 했다. 그것도 지금은 성수기여서 방이 다 찼다고 하니, 반년 전에 우리가 묵고 있는 집을 예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노숙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어떠하든 이 호텔에서 식사만이라도 하기로 결정했다. 석양이 아직도 남아있는 이른 저녁이었다. 호텔의 칠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거기 그 앞에 갑자기 펼쳐진 광경에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했다. 한 눈 속에 들어온 두 개의 똑 같은 절경이다. 하나는 호수 속에 잠겨 있었다. 만년설을 인 푸른 산이 주황색 석양을 받아, 녹색호수에 투영된 색색의 배합은 창조주의 또 하나의 걸작이었다. 우리는 할 말을 잃고 포도주와 찬란을 마셨다.

   차로 또 달린다. 폭포가 있다는 계곡에 들어섰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골짜기로 흐른다. 물은 한을 푸듯 바위에 부서지며 계곡을 물발로 채운다. 먼 지난날에 많이도 보고 듣던 소리다. 정능 골짜기! 세검정 골짜기! 생이 기쁨으로 찼던 그 옛적의 내가 넋을 잃고 서 있다.
   항상 버스 종점에서 살았던 우리가족이다. 정능 종점에서, 허공 뛰어 효자동 종점으로, 효자동 종점에서 또 세검정 종점으로, 종점이 생길 때 마다 새 종점으로 밀려다녔다. 그러나 그 밀려다닌 곳엔 항상 물이 있고 물소리가 있었다. 남편은 흐르는 계곡에 둑을 쌓아 수영장을 만들고 아이들을 풀어놓았다. 그들은 한여름 내내 물고기같이 떠다녔다. 같은 물소리를 오늘 다시 듣는다. 까맣게 잊었던 날들이 내 앞에 와 우뚝 섰다.
   내 아이들의 아이들과 같이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낄낄댔다. 이 손자들도 그들 아비 어미와 같이 자연이 온통 이들의 몸속에 간직되겠지. 넉넉하지 못한데서 우연히 얻어진 풍요로움이 오히려 복이 되었는가, 자식들 따라 안 간데 없이 다닌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쁘지만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여행 내내 나는 이 기쁨을 같이 하지 못한 한 사람을 그리며 울었고, 자연의 위력에  인간무상을 보았다. 그렇지만 모든 아픔을 훌훌 털었다. 보석을 수집하듯 보고 싶은 것을 본 만족감으로 여행을 끝내고 싶었다. 틀림없이 내 보석함에 새 보석이 하나 더 낀 것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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