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낚은 것

2007.07.22 04:36

배희경 조회 수:44 추천:3


        가을에 낚은 것                    “글마루” 2007년

   큰아들의 전화다.  단풍 보러갑시다.  벌써 그 때가 됐니?  벌써라니요. 일 년이 됐어요.  그렇구나, 가야지.  엊그제 보고 온 것 같은 단품이지만 따라나섰다.
   삼백마일 북쪽에 있는 ‘비샵’은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명한 곳이라지만 나는 갈 때 마다 실망했다. 단풍이라면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누렇고 색색이어야 하는데 거기는 노랑 단풍뿐이었다. 어쩌다 불그레한 잎만 보아도 “빨강 단풍!”하고 좋아서 소리를 지르곤 했던 단풍이여서 별로 기대가 크지 않는 길을 떠났다.

   차는 작년에 왔던 똑 같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노랗게 물든 단풍이 빽빽하다. 물이 많이 당기는 미루나무의 습성으로 단풍은 계곡에 더 들었다. 그랬는데 웬일일까. 오늘은 그것들이 잎이 아니었다. 눈부신 가을 꽃밭이었다. 전에는 눈에 들지도 않았던 단풍이다. 연한 물감을 풀어놓았다. 시기심을 말하는 노랑도, 구두쇠를 일컫는 노랭이도 아니었다. 비치도록 순수한 환희였다. 품었던 욕심을 버리니 아침 햇살로 빛을 더 해 천지를 찬미하는 꽃 잔치였다.
   차 속은 함성으로 달았다. 차가 곧은길에서 구부러졌을 때, 갑자기 눈 앞 하나가득히 들어온 미루나무의 찬란! 숨이 막혔다. 하얀 가지마다에 달린 금관수술은 천지를 소란스럽게 하며, 살랑살랑 살랑살랑 나풀거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은 죽지도 않고 또 와서, 장타령이라도 하려는지 차를 세운다.
   갑자기 까까머리로 변한 청춘의 남자, 갑자기 처녀로 돌아간 여자, 각기 자기반쪽의 머리 위에 낙엽을 뿌리며 낄낄낄 낄낄낄 웃음을 깔았다. 그 속으로 물차 한 대 지나가며 동그란 잎새를 뿌리니, 잎새는 차 꼬리에서 때글때글 구르며 동그란 기쁨을 날렸다.  

   이튼 날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윗트니 산’을 향했다. 차로 산 밑까지 가는 데도 아찔하게 높았는데 거기서 시작해도 아홉 시간을 걸어야 정상에 오른단다. 일직선으로 가팔라 보이는 저 산을 무슨 재주로 타느냐고 물었더니, 길이 갈지자로 나 있어서 어려운 길은 아니라 한다. 그래도 힘이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나. 몇 번 올라가 본 일이 있는 아들은 흥분된 음성으로 설명을 했다. 알프스 산이라도 탔다면 어떤 음정이었을까.

   차에서 내렸다. 서쪽으로 약간 기운 해가 암벽과 만났다. 햇빛이 산산조각이 되어 떨어지는 포말 하나하나에 가 앉는다. 작디작은 골짜기에 순간에 빚어진 빛과 물의 조화는 모두의 함성으로도 차지 않았다. 저기 폭포! 저기 폭포! 세상에서 처음 보는 폭포였다. 흥분의 대 소동이다. 요세미티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 수도 없이 많은 폭포를 보아왔으면서, 그래도 오늘의 폭포는 천지에서 제일 작은 또 제일 아름다운 폭포가 되었다.
   폭포 옆에는 이제까지 봐온 호수 중에서도 가장 조촐한 호수가 있었다. 낚시꾼이라면 절대 낚시 대를 드리울 리 없는 곳에 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습다. 아마 난생 처음 고기 낚기를 해 보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과 조금도 틀릴 것 없는 나도 다가가서 기웃거렸다. 물이 얕아서 고기가 다 보인다. 신기하다. 그런 거기에서 내가 평생 처음 경험한 사건이 일어났다.

   내 친정집 남자들은 오대를 내려오는 낚시꾼들이다. 금강산 구경을 일곱 번이나 시켜드렸다는 효자아들을 둔 할아버지를 위시해서, (그 할아버지 빼고는 오대를 두고 금강산을 구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그의 고손까지 낚시라는 소리만 들어도 눈이 금강석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이다.
  부산 피난 때도 낚시질은 여전했다. 삼대인 큰 오빠가 낚시 대를 챙기며 내게 말했다. “너 오늘, 고기 물때의 스릴 한번 맛보지 않을래? 따라와.” 한다. 오빠의 마음이 고마워서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덤덤했다. 그날 우리는 아무것도 낚아 올리지 못했다. 이때 기회를 놓친 나는 지금까지 그 감흥을 모르고 살았다.
   그랬는데 그 산, 그 조그만 연못에서 낚시의 스릴을 맛 볼 수 있었다니-. 연못에 많은 낚시 대가 드리워있다. 고기 떼들이 물 밑에서 빙빙 돈다. 물이 맑고 물길이 얕아서  노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그렇게 돌기만 하던 고기들이었다. 갑자기 그 중 한 마리가 먼 거리로 부터 쏜살같이 직진해서 내 옆 사람의 먹이를 물었다. 내가 보는 눈앞에서 고기가 덥석 먹이를 물었다. 어리벙벙해 있는 내 앞에서 즉시 낚시꾼이 줄을 낚아챘다. 고기가 푸들푸들 뛰며 올라온다. 그 장관! 한  뼘도 되나마나 한 고기지만 나는 장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흥분상태였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많은 고기를 낚았겠지만, 내가 본 것 같이 이렇게 먹이를 덥석 문 장면은 몇 번이나 보았을까. “드디어 보았다!”는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작은 오빠가 ‘바하 캘리포니아’ 에서 청새치(marlin)을 잡았을 때의 감격에 비해도 될 것 같았다. 양팔을 뻗고도 넘는 큰 고기는 박제되어 지금 그의 방벽에 걸려 있다. 오빠가 그것을 낚아챘을 때의 광경을 이렇게 표현한 글을 읽었다. “먹이게 걸려 고기가 하늘 높이 뛰는 순간, 해를 가렸고 하늘이 캄캄했다.” 고기가 그만치 켰다는 표현도 되겠지만, 너무 기뻐서 생긴 흥분 상태의 심리 표현이었을 것이다. 한 뼘도 안 되는 고기였지만 내겐 그와 못하지 않는 감격이었다. 큰 오빠가 안겨 주고자 했던 흥분을 육십  여 년 만에 안았다.  

   아들은 내 옆에 서서 은은한 눈으로 나를 지킨다. 며느리는 자기 앉을 앞자리를 내 놓고도 정겨운 미소를 잃지 않는다. 작은 딸은 끝나가는 여행을 아쉬워한다. 저녁을 분에 넘치게 대접해 준 큰 사위는 그래도 못 찼는지 아내를 시켜 빳빳한 것을 내게 건넨다. 그전에 나는 며느리들에게서도 받았다. 나오면서 농담을 던진다.  “애나하임에 갑부가 났네.”  내가 사는 시의 이름이 애나하임인 것을 몇 놈이나 알고 있는지.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한다. 이제 정말 볼 것 다 보지 않았을까. 시들찮게 생각했던 단풍도 꽃으로 보였고,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된 폭포도 보고 왔다. 칠십이 넘어서 낚시의 묘미도 알았다. 아무 때고 갈 준비가 되었다. 때가 오면 만족히 기쁘게 가리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며, 비샵의 단풍도 꽃 같이 아름다웠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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