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국화일까

2007.07.29 01:34

배희경 조회 수:49 추천:5


   가을은 국화일까                              글마루 2006년

   “가을꽃은 누가 뭐라 해도 국화지”  “그래?”  ”더욱이 대륜의 흰 국화는 일품이야.“ ”그래?“ ”고개를 다소곳 수그리고 기다리는 영상이 좋아.“  ”그래?“  그녀의 국화에 대한 찬사에 나는 연상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이학년. 그 때의 나는 일어서서 책을 읽게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다리가 떨리고 목이 꽉 잠겨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런 기가 있지만) 사람 앞에 서는 공포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요새의 의학용어로 라면 내게 약간의 자폐증 증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그렇게 주눅이 들어있었던 나였다. 그런 내가 하루 벌을 섰다. 학교라고 들어가서 처음 서는 벌이었다. 조용히 하라는 선생님의 주의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뒤의 아이와 할 얘기가 있었다. 내 이름을 호령하는 선생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교단 앞에 나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학행들이 항상 나가서 벌을 서는 그 교단 앞이다 아찔했다. 딛고 있는 땅이 한 바퀴 도는 것 같았다. 내가 있었던 세상과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낯선 외계의 아주 기분 나쁜 세상이었다.
   공포의 비틀거림으로 교단 앞까지 간 내 앞에는 높은 상대에 놓인 화분이 있었다. 대륜의 국화꽃 한 송이었다. 그 꽃이 바로 코앞에 와 닿는 순간, 향기인지 긴장에서인지 쓰러질 것 만 같았다. 험한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선생님은 또 돌아서라고 명령했다. 나는 돌아섰다. 친구들이 다 나를 보고 있었다.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가슴에 박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항상 벌을 서는 아이들은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세상에서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의문을 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번 당하면 그 다음은 그런 일쯤 식은 죽 먹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른이 될 때 까지 이 국화와 국화 향내가 싫었다. 국화는 내 악몽의 상징 같았다. 가을이 되면 일본인은 언제나 국화로 교실을 장식했다.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어서 은근히 천황의 존엄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대륜의 국화는 제일 먼저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위엄으로 다가선 꽃이기도 했다. 촉촉이 방 한구석을 온기로 싸는 꽃은 죽어도 될 수 없는, 새벽에 덩그렁 떠 있는 달의 무료한 모습과 같았다. 가을바람 속에서 꿈을 기다리는 코스모스의 들뜸도 없고, 삶을 곱씹는 갈대의 회한도 없다. 그렇다고 푸른 잎을 빨갛게 물들이는 단풍의 정열은 더욱 없다. 그래서 국화는 내가 좋아하지 않아도 탓할 수 없는 꽃이라 해도 되었다.
   그런 국화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랜 후에 절대 싫어할 수 없는 꽃이 되고 말았다. 내 남편의 관꽃이 그 꽃이었다. 남편과는 달리 퍽 둔탁하지만 나는 그 꽃이 건불같이 가볍게 변한 그를 잘 지켜주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조객들이 울며 그를 기렸다. 묵직하고 큰 하얀 꽃 밑에 깔리듯 누운 그가 많이 애처로워서였을 것이다. 가끔 그 꽃으로 그가 우뚝 설 때가 있어 가까워지고 말았다면 조금 쑥스럽기도 하다.  
  
   왜 나는 둥글고 투박스런 꽃만 말 했을까. 국화에는 수도 없이 많은 종류가 있지 않은가.  청초하게 계곡에 핀 들국화서부터, 별사탕같이 앙증스런 애교떵이도 있다. 이런 꽃들이 흙탕 속에서 싸우다 일어선 승자의 멋쩍은 모습으로 닥아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방관자의 수집음으로 꽃가게에서 말하는 보조꽃 (filler)로 쓰이는 꽃이 되기도 한다. 우리 기호에 부담도 없고, 보조 역할로 없어서도 안 되는 꽃이 되는 것이다. 가끔은 수백 개의 연 보라색 눈을 가진 국화를 다발로 엮어, 화분에 드리우면 요세미티의 ‘캐스케이드 폭포’가 무색하다. 꿈 색으로 빛나는 폭포를 올려다보며 수포를 받을 때의 흥분이 있다.
   처녀 때부터 이런 흥분을 누렸다고 자랑하면 실없다고 하겠지만 그랬다. 은행에 다녔던 나는 점심시간만 되면 은행 안에 있는 온실에 들렸다. 각 방을 장식하기 위해 나무와 꽃을 자급자족하는 온실에서 그들이 안겨주는 환희와 꿈과 그리움을 사치같이 즐겼다. 평생을 이런 기쁨 속에서 살았으면 하곤 했던 때가 있었다.  

   국화꽃은 어느 꽃보다도 내게 여러 형태의 영향을 많이 끼쳤다. 싫었으면서도 싫어해서는 안 되는 꽃, 삼십 년 꽃일 하면서도 항상 낯설었던 꽃이다. 그러나 이젠 친구가 묻는 물음에 “그래?” 하지 않고, “그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을은 국화일까? 내게 다시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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