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전설
2007.08.16 05:01
아픔의 전설 미주문학 2006년
십여 년 전 글이 서랍 제일 밑바닥에서 나왔다. 깊이 파묻고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글이다. 나는 데인 상처에 닿는 아픔으로 그것을 꺼내들었다. 읽어갔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나만으로도 그녀만으로도 안 되는 둘이서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새 건물을 짓기 위해 묵은 건물을 폭파시키는, ‘라스베가스’에서 있은 그런 폭발적 무너짐이 아니라, 모래성이 파도에 밀려 힘없이 무너지는 허무한 무너짐이었다.
큰 딸이 말을 꺼냈다. 그리 큰 일이 아닌 듯이 보이게 하려고 애쓰면서도 퍽 힘들게 시작하는 말이었다. 큰 동생과 올케가 어머니(나)를 받아줄 수 없겠는가고 둘째 동생에게 물었다는 얘기다. 그 말은 내 얼굴을 활짝 달아오르게 했다. 동뎅이 처진 수치심에 딸 앞에서도 부끄러워 슬쩍 일어서 나왔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런 기미도 모르고 산 미련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싫고 미웠다. 그 사람들이 그랬었구나. 같이 산다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구나. 나는 실성한 사람모양 걸으면서도 차 속에서도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하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배가 들락거리는 제방에 차를 세웠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나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던 ‘마리나 델 레이’ 항구다. 그 때부터 철철 내 가슴 밑바닥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칠 줄 모르게 내렸다. 배들은 전과 똑 같이 나가는 배 들어오는 배들로 분비고 있었다. 돌아오는 배들이 눈에 띄었다. 저 배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다 기쁘게 돌아가는 것일까.
바다는 배가 지나갈 때 마다 출렁였다. 출렁이는 바닷물에 비눗물 빼듯 젖은 내 마음을 헹궜다. 헹구고 또 헹궜다. 얼마가 지났을까.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양팔을 머리 위에 올려놓을 만치 큰 해다. 수증기로 빛살을 잃은 벌건 알몸이 무언극을 하고 있다. 한치씩 한치씩 뚝 뚝 바다 뒤로 떨어지면서 허탈을 연기했다. 한폭 한폭을 젖은 가슴에 담으며 저 해는 내일도 뜨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갑자기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낯설고 외롭고 집이 그립다. 가족이 그립다. 견디지 못하게 그립다. 나는 돌아갈 곳을 생각했다. 내 집이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퉁퉁 부운 눈으로 집에 찾아 들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손자들은 밝게 재잘대고 있었지만, 방안의 다른 공기는 이 무슨 죽음 같은 적막인가. 발끝으로 걷는 그들의 조심스러움이 초상집의 무거움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내가 오래 전에 읽은 어느 소설 속 분위기와 같았다. 소리 없는 소리가 거기에 있었고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소설 속이다.
[어머니가 고려장 할 나이가 되었다. 그 어머니는 남에게서 비웃음을 받지 않고 떳떳하게 죽어갈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이빨은 모두 너무 든든하다. 그것이 그녀에겐 다시 없이 부끄럽다. 그래서 부엌에 들어만 가면 부싯돌로 이빨을 없애려 하나 잘 부러지지 않는다.
큰 손자는 철이 없다. 아이까지 배게 한 배불은 계집아이를 데려다 놓고, 눈치 꼬치 없이 먹어제낀다. 그래서 양식은 더욱 말라간다. “내년엔 산으로 가야 하는가?” 아들이 중얼거린다. 어머니는 ‘나라야마’산으로 자기를 데려가는 일로 고민하고 있는 아들이 측은하다. 가까이 아들에게 가서 눈 위에 얹은 수건을 뗀다. 아들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다. 급히 덮고 “저렇게 마음이 약하면 안 되는데”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눈이 까말 때 아들을 더 봐 두고 싶다는 생각에 아들을 곁눈으로 지켜본다.
어머니는 상처하고 외로웠던 아들의 후처를 맞아드린 일이 더없이 흐뭇하고 기뻤다. 일상을 죽음의 준비로 하나하나 정리해 온 그녀는 이제 마음 놓고 산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일생일대의 힘으로 돌절구 모서리에 입을 쪄 박았다. 입 전체가 떨어져 나간 듯 얼얼하다. 피와 이빨이 입안에 가득 찼다. 도랑에 나가 양취를 한다. 이빨 둘을 뱉어냈다. “애고 겨우 두개네” 좀 실망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기뻐서 뛰어나가 동네사람들에게 소리소리 자랑했다. “이젠 이빨도 이렇게 나빠지고, 산에 갈 해(우리말로면 손 없는 날, 혹은 해)가 되어서...” 그녀는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자기가 자랑스럽고 기뻤다.]
이 소설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다. 작품명은 ‘나라야마부시코’(木酋山節考). 일본 제1회 中央公論 신인상을 탄, ‘후까가와시찌로’(深川七郞)작이다. 나는 가끔 그 작품에서 얻은 감동이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때가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바로 그 광경의 분의기다. 자금 이 정적이 그 속의 것과 똑 같았다.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에 떨었다. 일본 고 서점을 뒤지고 다녔다. 드디어 찾았다. 수풀 속에서 바늘을 찬아 낸 기쁨이 있었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가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당당히 자기를 세우면서 살았다. 말다툼도 없이, 질시도 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면서 둘이서 성을 쌓듯 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혼자만의 내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십 삼년이란 세월을 그들이 나와 같이 살아주었으니 기쁘게 물러가야 되지 않겠는가. 며느리 복은 하늘에서 내린다 했다. 내 그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소설은 계속된다.
[‘나라야마’산에 가는 날이다. 겨울이 시작되는 추운 아침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은 아들을 어머니는 책하듯 독촉한다. 가족을 깨울세라 툇마루로 나와 아들의 등지게에 올라탄다.
길은 있어도 길이 없다는 길을 올라가니 바위 뒤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질겁하여 물러선다. 송장이다. 아들은 발이 옮겨지지 않는다. 등에서 어머니 손이 내젓는다. 앞으로 빨리 가라는 손짓이다. 올라갈수록 송장은 더 많이 흩어져 있고, 까마귀도 그 숫자를 더 해 갔다.
길에 밥그릇이 eld굴고 있다. 먼저 온 사람에게 이런 마음씀이 있었다는 것에 감동한다. 아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자신이 탄스러워 더욱 슬프다.
어머니는 송장이 없는 판판한 땅에 내리겠노라고 알린다. 아들은 어머니를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한다. 다른 얼굴이 되어있다. 죽음을 암시하는 상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아들이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려놓는다. 아들은 뜨거운 목욕탕 속에 있듯 전신이 땀으로 젖는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지킴에 아들은 어머니를 태웠던 지계를 공중에 높이 치켜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술 마신 사람같이 비틀비틀 산에서 내려온다. 그 때 나무사이로 흰 가루가 날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가 항상 말하던 “내가 산에 갈 때면 눈이 올 걸세” 한 그 말대로 눈이 내리고 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되었다. 아들은 산에서 지켜야 한다는 산신령의 지킴을 단호히 물리치고, 발길을 돌려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눈이 온다는 이 기쁨을 어머니와 같이 나누고 싶었다.
"어마이! 눈이 내리오. 눈이...“ 아들은 아래서 외친다. 한곳만 응시호고 연불을 외우고 있던 어머니는 가라고 손짓만 한다. ”어마이! 얼마나 춥소. 얼마나...“ 목이 메어 울부짖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이고 머리를 가로 젓는다.
천지는 어느새 하얗게 눈에 덮이고 이젠 한 마리의 까마귀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추운 바람에 쏘일 일도, 또 까마귀에 뜯길 일도 없이 눈 속에 파묻혀 잠들어 갈 것이다. 아들은 쫓기는 짐승마냥 아래로 달려 내려왔다.]
글 속의 아들과 글 속의 어머니! 나는 글 속에서 내 아들을 볼 수 있었고, 나도 내 아들의 어미로 그 어머니와 비슷한 자신이 될 줄 알았다. 그랬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어처구니없이 슬프다. 지게에 지어 버려진 것도 아니요 큰 아들에서 작은 아들로 가면서 미치도록 슬프다. 이것은 체신머리 없는 늙은 어미의 엉석이다. 아침에 눈을 떴다. 항상 맞는 아침과 전연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는 죽음의 시작이다. *****
손에서 원고지를 놓았다. 폭풍같이 내게 덮쳤던 아픔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렇게 무너지듯 끝났다. 그러나 이제 그 아픔은 소설 속 일 같이 내 인생에서도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 속의 어머니 같이 되지 못한 나를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전설이 되고 말았다.
(나는 소설 줄거리를 주로 모자간의 정서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그러나 그 속엔 다른 관점, 즉 가난이 죽음을 선택하게 한 시대상이라던가, 삶에 대한 또 죽음에 대한 성찰 등이 있었다. 말하자면 죽음의 선택이 삶의 포기라기보다는 필연성이었다는 것과, 죽음과 대조되는 인간 본연의 생의 분출을 민요(나라야마부시)로서 엮었다. 이런 것들이 생략되어 내용이 평면화 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감동으로 시작해서 감동으로 끝난 책 한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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