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2007.08.31 23:52

배희경 조회 수:46 추천:2


       一切唯心造                        1997년

   내겐 두 오빠와 남동생 셋이 있다. 십년 전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그랬다. 그랬는데 지금은 동생 하나, 오빠 한분이 세상을 뜨고 없다. 그래서 넷이 되었다.

   그날은 내 둘째 동생의 환갑날이었다. 조촐하게 형제들만의 모임을 가졌다. 동안의 동생을 보며 형제가 입을 모아 벌써 환갑이라니 한다. 저라고 늙지 말란 법이 있읍니까 고 말하는 동생-.
   이 동생을 나는 많이 업어주었다. 업으면 좋아서 등 뒤에서 뛰면 나도 철없이 같이 뛰었다. 그러니 어찌 그 아이가 무사했겠는가. 아이는 내 등에서 내 머리 위를 거꾸로 넘어 땅 바닥에 떨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머리는 짱구다. 그 머리를 오늘도 모두에게 내밀어 보인다. 엉성해 진 머리숱은 그 세월들을 더 뚜렷이 보여주었다. 발뺌을 못하고 그 혹은 내가 만든 것이라고 시인하지만, 사람들은 그때가 그립기만 한 모양이다. 정겨운 미소만 짓고 있다.  환갑! 그렇게 등에서 펄쩍펄쩍 뛰던 동생이 환갑이라니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어휘였다.

   이 동생은 1950년대에 미국에 유학을 왔다. 이 땅에 내리니 육십 불이 손에 쥐어있었다. 학비는 면제 받고 왔다고 하지만 돈이 필요했다. 학교에서 일자리를 주었다. 첫날이었다. 학교의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엎드리는 순간 얼굴이 불 같이 달아올랐던 그때를 어제 일 같이 기억했다.
   그리고 십년 후 한국을 다녀갔다. 그때의 그의 말이었다. 이제 똥통을 져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가족들 앞에서 당당히 말했던 동생이다. 어떤 세월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 우리 모두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런 그는 어느 형제보다도 정이 많았다. 입고 입던 단 한 벌의 잠바라도 좋다고 하면 벗어주는 성품이었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도 남달라서 밤에 접시를 닦으며 번 돈을 꼭꼭 집에 붙여 주었다. 크라씩 레코드판이나, 잘잘한 전기용품들을 사서 집에 붙이면, 물품이 귀한 전쟁 후라 돈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 돈을 생활비로 보태 쓰면서 항상 눈물을 닦으셨다. 학비를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힘들게 번 돈을 받아쓰다니 하시며-. 그 아들이 접시 닦는 비눗물 증기에 쐬어 눈언저리가 다 헐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드디어 목을 놓고 우셨던 옛 일들을 얘기 하며 우리 모두는 눈시울을 붉혔다.  
   되돌아보면 자기가 부모에게 온 성의를 다해 기쁘게 해 드렸다는 사실은 지금의 자기 자신을 그만큼 기쁘게 흐뭇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 동생은 언제나 마음에 보물을 지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그지만 그는 아직도 저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형제를 다 미국 땅에 불러드렸고, 조망조망 어렸던 조카들까지도 자리를 잡고 이 사회에서 뒤짐 없이 살고 있는데, 어찌된 일일지 이 동생은 아니었다. 이렇게 조촐히 환갑을 맞는 그가 너무 측은해서 슬프기까지 했다.

   오가는 술잔이 자자지며 각기 나름대로의 기염을 토하고 있을 때, 오늘의 주인공이 한마디 하겠다고 말했다. 자리가 조용해졌다. 그런 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왜냐하면 돈도 없고, 이루어놓은 것도 없고, 자랑스러운 것도 하나 없는데, 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부자인 것 같고,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은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이다. 나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의 마음은 항상 부듯이 차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대로였다. 부모에게 남에게 인생에 아무런 회환 없이 살아온 사실이 그를 이렇게 기쁘게 만들었다. 물질적으로는 비어 있으나 마음은 차 있는 동생이었다.

   돌아오는 길이다. 그새 벼르고만 있었던 일을 이번에는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노스승에게서 전해 받은 글자 <一切唯心造>를 표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깐 동안 서예를 배우면서 글이 그림만치 아름답다는 것도 알았고, 노 스승의 성스럽기까지 했던 글을 보며 연신 감탄사만 터뜨렸던 나다. 오랫동안 그 일을 잊고 있었다. 동생이 한 말에서 떠오른 글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있다” 내 마음이 만든다는 스승의 깊은 뜻을 되새기며, 내일은 표구 상으로 달려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