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2007.08.31 05:20

성민희 조회 수:51 추천:2


아침 8시 50분. 언제나처럼 오늘도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복잡한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자, 다왔다. 내려라”

쟈켓을 들쳐입고 가방을 한쪽 팔에 거는 아들이 어서 내리기를 기다리다

가 문득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는데, 조그만 등에 가방을 메고 우르르 달려

가는 까만 머리, 노랑 머리들 사이로 반듯하게 빗어넘긴 은색의 머리 카락이

끼어서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고동색 조끼에 베이지색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 입으신 할아버지. 종종 걸음의 아이들 걸음에 맞추느라 바쁘시다.  하얀

토끼가 얌전히 앉아있는 토끼장을 양손으로 움켜 잡으시고 나폴거리는 손녀

의 치맛자락을 놓칠새라 마음이 급하신 모습. 따라와 주지 않는 다리가 안타

까와 허리를 굽히시고 걷는 할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니 아! 아버지, 우리 아

버지시다. 막내딸의 출근 시간이 조금이라도 수월하라고 손수 두 손자 손녀

를 태우고 안경 속의 눈을 부비시면서 아침마다 운전대를 잡으시는 우리 아

버지. 오늘은 손녀 학급에서 애완동물 보여주기나 토끼에 관한 공부를 하기로

했나보다. 소란스런 학교 주차장 귀퉁이, 겨우 발견한 좁은 공간에 어렵게 차

를 대시고는

“자, 무겁다. 할아버지가 니네 교실까지 들어다 줄테니까 교실이 어디니?

앞서거라. 보자.”

하면서 내리신 모양이다.   아이들 틈에 끼여서 건물 안으로 사라지시는 아버지

의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아버지” 하고 가만히 소리 내어 불러본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참으로 멋장이셨다. 옛날 60년대, 그 시절에도 아버지

는 핑크빛 와이셔츠를 멋지게 차려 입고 다니셨다. 먼데 출장이라도 다녀 오시

는 날에는 언제나 알록달록한 비닐에‘대구 능금’이라고 쓰인 사과 바구니랑

천안 호두 과자를 사 오셔서 우리 6남매에게 늦은 밤의 횡재를 안겨주셨다.

약주를 즐기지는 않으셨지만, 간혹 취하신 날에는 손에 쇼빵을 들고 오셨다.

잠든 우리들을 모두 깨우시며 생전 부르지 않던 콧노래까지 곁들여 방안 가득

당신의 기분 좋은 저녁을 풀어 놓으셨다.

“얘들아, 아버지 오셨다. 빵 좀 먹어봐라.”

씻지도 않으신 손으로 볼록볼록 튀어나온 식빵을 한덩이씩 뚝뚝 잘라서 나눠

주시면, 우리들은 모두 눈이 부신 전깃불을 한쪽 손으로 가리며 방금 자다 일어

난 마른 입으로 꾸역꾸역 잘도 먹었다. 걱정스런 어머니의 눈빛도 아랑곳 없이

그렇게 먹어대도 체했던 기억이 없으니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취하신 날이 좋았었다. 아버지는 또 일요일마다 산수 문제를 내어주셨다.

덧셈 뺄셈 모두 10문제씩. 모두다 맞으면 빨간 색연필로 커다랗게 100점 하고 써

주셨다. 우리는 너무 좋아서 아버지만 계시면 산수 문제 내어달라고 졸랐다. 그게

하기 싫은 공부인줄도 모르고. 덕분에 학교에서 100점을 받아오는 날에는 상으로

돈을 주셨다. 액수는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항상 그 돈으로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어느 날엔가 마당을 뛰어나가는 내게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희야, 또 만화방 가나?  만화가 어디가 그리 재밌니?”

나는 뒤를 휙 돌아보며 대뜸 받아넘겼었다.

“아버지는 담배가 뭐가 그리 맛있어요? 어른들 담배 피우는 맛하고 똑 같습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나의 당돌한 대답을 대견해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낯이 화끈

하는 되바라진 대답인데도.

고만 고만한 6남매가 한 집에 있으니 우리는 수시로 쿵쾅거리며 싸우고, 힘 있는

형은 씩씩거리고  동생은 울곤 했었다.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둘을 다 불러 앉혀놓고

발바닥을 때리셨다.  아버지는 우리를 체벌 하실때는 발바닥이나 손바닥을 때리셨다.

얼굴을 붉히며 때리시는 아버지를 뵌 기억이 없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몹시

화가 날때는 머리고 등이고 엉덩이고 할 것 없이 마구마구 때려주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그럴때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섭게 화를

내지 않으셨는데--조목 조목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게 하시고 몇 대의 매를 맞고 싶냐고

물으시곤 하셨는데---) 어느 새 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자신을 보곤 한다.

반듯하고 멋장이시던 아버지도 어느 듯 머리가 희어지시고 은퇴를 하셨는데, 무슨 바

람이 부셨을까 회갑을 바라보시는 나이에 이민을 오셨다.  노인답지 않으신 삶에 대한

열정과 성실로 낯선 땅에서 운전도 배우시고 자리도 잡으셨다. 올망 졸망 아버지 얼굴

만 바라보고 살던 우리들도 이젠 모두 어른이 되어 각각 자기 모양들로 가정을 꾸려가며

언제 부터인가 또 다른 소리로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 오늘은 지현이 축구 시합이라서 공원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아버지, 오늘부터 석준이 바이얼린 레슨 시작해야 합니다.”

“아버지, 성현이 농구를 오늘은 YMCA에서 한답니다”

수시로 보채대는 우리들의 부탁을 아버지는 기억하시기에 바쁘시다. 그래서 아버지의

차에는 온갖 약도와 아이들의 시간표가 어지럽다.

“아버지, 스케쥴이 자꾸 바뀌어서 정신이 없죠? 제가 아버지 머리 많이 쓰셔서 치매 걸리

지 말라고 자꾸 자꾸 바꾸고 있습니다. 히히히”

“그래 그래, 자꾸 바꾸어라. 나도 낯선 곳 많이 가보니까 구경이 좋다.”

막내 동생의 애교를 미안해서 하는 말인줄 다 알아들으시고 허허허 웃으시는 우리 아버

지. 어느새 연세가 일흔 여섯이 되셨다. 듬성듬성한 머리에 약해진 아버지의 목을 뵐 때

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를 부르기만 했지 무엇 하나 해 드린 게 없는 것 같아  죄송

하다. 건강하시니까 여든 살은 수월히 넘기시겠지. 갓 이민 온 덕에 아무 것도 몰라 회갑

잔치는 가족들 모두 모여 저녁 한끼 먹는 걸로 넘겼고, 칠순은 여행 다녀오시라고 돈만

드리고 말았는데.  나는 그게 마음에 걸려  남의 부모 회갑이나 칠순 잔치만 보면 속이 상

한다.  회갑, 칠순 못하신 우리 아버지, 팔순 잔치는 너무너무 멋지게 차려드려야지 하는게

요즘 나의 바램이다. 평생 자식들을 가슴에 안고 무거우셨을 아버지. 그 날에는 모든 삶의

짐을 다 풀어놓으시고 활짝 웃으시라고 해야지.  

나는 건물 안으로 사라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에다 대고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는

팔순 잔치에서 우리 모두 예쁜 옷 차려 입고 할께요’ 하고 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