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친구

2007.08.31 05:37

성민희 조회 수:43 추천:3


       오랜만에 골프장엘 나왔다. 모처럼의 연휴를 사흘 내내 내리는 비바람 땜에

집안에서만 뒹굴다가, 아침 반짝이는 햇살이 너무 반가워 모두들 의기 투합했다. 근데

몹시 어수선하다. 나뭇가지가 통째로 부러져 누워있는가 하면,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다.  군데군데 패인 웅덩이에는 미처 땅속으로 스

며 들지 못한 빗물들이 고여 찰랑거리고, 바람은 아직도 겨울비를 만지던 그 감촉을

버리지 못한 채 찬 손을 벌리며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고 그나마 남겨졌던 몇 조각 나

뭇잎조차 빗물에 뺏겨 버린 앙상한 가지들은,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바람에게 앙탈을

부리느라 윙윙 소리를 내고 있다.

       얼마나 비바람이 몰아쳤었는지, 날려 보낸 공을 찾는 일이 여간 성가신게 아

니다. 공이 떨어졌음직한 자리로 달려가 나뭇가지도 발로 휙휙 저어서 밀어내고, 이파

리도 한 장 한 장 손으로 뒤적여보자니 골프를 치는 건지 낙엽을 치우러 나온 건지

분간이 안 된다. 그래도 오랜만의 만남들이라 재재거리며 즐거운데 3번째 홀을 들어

서다가는 모두들 그 자리에 서버렸다. 고개를 치켜들고 올려다 보면 풍성한 이파리

사이로 지나간 세월이 얼기설기 엉켜 붙은듯한 우람한 가지. 짙은 녹음을 머리에 이

고 넓은 그림자를 깔고 앉아 홀 그린과 파킹랏의 경계를 확실하게 그어 주던, 당당하

고 의연하고 도도하기 까지 하던 커다란 고목나무가 뿌리 채 뽑혀 넘어져 있었다. 하

늘이 휑하고 비어버린 듯한 눈 앞의 광경이 너무 엄청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진 나무에게로 달려갔다. 뿌리가 뽑혀 나가면서 패인 큰 구멍 안에는 부러

진 몸통 조각들이 허연 속살을 내보인 채 누워있고 거대한 밑둥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엔간히 몸부림을 쳤는지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져있다. 길게 늘어진 잔뿌리에는 아직

도 축축한 흙덩이가 달라붙어 갑자기 당한 자신들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 듯 멍한 눈

을 뜨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보다도 더 연약하고 작은 나무들도 가지 몇 개만

잃었을 뿐, 제 자리를 지키고 섰는데 어찌 덩치 값도 못하고 부러져 버렸을까. 너무

안타까워 자세히 들여다보니 뿌리 밑둥 한군데가 새까맣게 썩어 있다. 이처럼 웅장하

고 멋있는 나무 둥치 한 쪽이 꺼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는 줄을 누가 알았으랴. 오랜

세월 키워온 자존심 하나로 안 그런 척 버티고 서 있었지만,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작은 비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졌구나. ‘치유 받지 못한 상처'  문득 가

슴 깊은 곳에서  잊어버렸던 얼굴이 일렁이며 다가온다. 친구도 이렇게 썩어가는 상처

를 자존심으로 버텼을까.


    
  친구는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아쉬움 없이 사랑만

먹고 자란 딸이 지지리도 가난한 홀어머니의 맏며느리가 되겠다고 나섰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포항 공업 단지의 작은 사글세방으로 시집을 보내며 친구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많이도 우셨었다. 아직도 나는 천방 지축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캠핑장으로

스키장으로 뛰어다닐 때 친구는 작은 엽서에 올망졸망 살림 사는 이야기를 적어서 보

내주었다. 시어머니는 신혼 집으로 분가 하는 날, 온 가족이 모여 살 주택 마련 부금

통장을 내어놓으셨단다. 그리고 시동생의 고등 학교 월사금 봉투도 내밀더란다. 순진

하고 착한 친구는 며느리라는 이름을 몹시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풋내기 신입 사원

월급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어 자기는 남편이 먹다 남은 생선 뼈만 발라 먹고 있다

는 둥. 남편의 담뱃값이 아까워 하루에 두 개비씩 배급을 주고 있다는 둥. 전혀 그 애

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날아올 때마다 상상이 안 된다는 나의 투정에, 친구

는 주인집 안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전화선을 통해 설명을 해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그리고 아직은 세상살이가 어떤 얼굴인지 알지

못하던 나이이기에 친구는 경제적 어려움을 어렵다 마음에 두지 않고 즐겁게 사는 것

같았다. 주인집 아줌마와 함께 이불 빨래를 했다는 자랑도 하고, 빡빡 닦은 냄비가 반

짝 반짝 윤을 내면 행복하다고도 했다. 주위에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 느끼기 시작할

만큼 세월이 가고, 한번 다녀가라는 채근이 시작되나 했더니 임신을 했단다. 배 속에

아기가 살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 신비스럽다며 엽서의 내용이 점점 길어지더니 어

느 날 갑자기 친정 집에 와 있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홍역을 앓는 사람처럼 붉은 반점들이 얼굴과 온 몸을 덮

은 채 퉁퉁 부어 있었다. 임신 7개월의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뱃속에서 발길질이 시

작 되었다는데, 친구는 밥도 먹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 몸이 되었다. 곁에서 어머니가

꺼이꺼이 울며 하소연을 했다. 저축을 하느라 남편의 도시락만 싸주고 자기는 점심을

굶은 바보 딸, 매서운 시어머니의 호령에 심장이 쪼그라진 불쌍한 딸.자신도 모르는

새 곪고 썩어가는 마음 따라 육신도 함께 피폐해진 애처러운 딸의 신세를 통곡하셨다.

  소문난 병원도 필사적인 어머니의 민방 요법도 소용없이 친구는 팔삭 동이 딸

을 세상에 던져놓고 떠났다. 비가 몹시 오는 겨울. 남자들의 둔한 삽질이 시작되고,

파인 구덩이엔 빗물이 자꾸만 고이는데, 친구를 담은 관은 질척질척 물 웅덩이 속에

내려졌다. 축축하고 시린 땅에 친구는 그렇게 묻혔다. 사람들이 모여 봉분을 밟는 사

이, 구석 자리로 아들을 불러낸 시어머니는 보온병에서 뜨거운 커피를 따뤄 주고 있

었다. 아들도 넙죽 커피 잔을 받아 입에 갖다 대었다. “간 사람은 갔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시어머니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아들의 얼굴을 쓸고 내려갔다.  나는 새삼

추위에 몸을 떨었었다.


  대문을 가로막고 서서 “경숙아, 니가 지금 도대체 어데로 가고 있노.” 관을 붙

잡던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왜 오늘 갑자기 생각 날까. 뿌리 채 뽑혀져 나간 고목 나

무가 종일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