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낀 초상화 3. <하나로 합친 얼굴>

2007.09.01 03:33

배희경 조회 수:42 추천:3


         안경 낀 초상화 3.              <하나로 합친 얼굴>            

    그의 유품 속에 간직된 까만 테 안경과, 한국에서 갖고 온 누렇게 변색된 태극기를 오랜만에 꺼내 본다. 옅고 짙은 색상이 그의 초상화 화폭에 번지기 시작했다.

   선을 보기 위해 나타난 까만 테 안경의 남자는 공중에서 바람을 타고 내린 선풍이었다. 빳빳이 선 바지 줄로 키는 더 커 보였고, 얼굴은 코가 높은지 아주 좁았다. 선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잊은 듯, 주위 한번 살피지 않고 아버지와 큰 소리로 대면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랬다. 그런 한참 후, 그의 눈이 번쩍 긴 방 끝자리에 앉은 나를 쏘듯 스치고 지나갔을 때, 나는 그가 확실히 자기가 온 용건은 기억했구나 싶어 속으로 웃었다.
   선을 보고 난 얼마 후, 둘이서 만났으면 한다고 전해 왔다. 6.25 후, 피난 와서 살고 있는 구포 기차역 프랫홈에서 그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약간 들떠 있었다. 구포는 부산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도시였고, 남자는 대구에서 부산에, 또 부산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여기까지 와야 했다. 초봄이었다. 새로 돋아난 나무 잎새들이 살랑살랑 연두색 소리를 내고 있는 하늘 아래서 두 번째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많은 객들이 기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나타난 것은 제일 끝 차간에서, 그것도 아주 느린 걸음으로 내린 객이었다. 선풍 같다고 생각한 그에게 이런 느릿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를 다시 보고 있는 순간, 하늘이 기쁨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안경을 쓰도록 함세.” 내 어머니가 한 말을 그는 오래도록 기억했다. 자기의 예리한  눈을 감지한 말씀이라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주위 가족들이 어떤 여자가 시집 와서 저 사람과 맞추며 살까한 기우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 눈의 위력을 감지하지 못한 어리숙한 여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지킬 날이 있소. 하나는 내가 난 날이고, 또 하나는 내가 죽었다 살아난 날이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사는 이 집이지만 그에겐 자기 한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세상을 뜰 때는 자기를 다 지우고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 것은 세월이란 처방약 탓일까. 아니면 그 처방약이 났을 때의 무구의 몸으로 돌아가게 한 탓일까. 그는 성인같이 되어 세상을 떴다.
   두 개의 얼굴!  하나는 자기 신념으로 꼭꼭 짜 진 수공예품 같은 얼굴이고, 또 하나는 사랑과 희생으로 수정으로 변한 얼굴이다.  AB형인 그 사람은 동전같이 앞과 뒷면이 뚜렷하게 다른 얼굴이 있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나는 지금 피카소의 그림같이 양쪽이 서로 엇갈린 얼굴에 붓질하고 있다.

   그가 세상 뜬 후 한국에서 그의 큰형수가 다녀갔다. 내 맏동서다. 남편과 싸우면 언제나 자기편이 되어주었던 시동생이었단다. 그를 많이 아꼈다. 얼마나 허전할까 했는데 그와 꼭 닮은 손자가 자박자박 집안을 걸고 있었다. 빈자리를 메워준 것이 기쁘셨다. 그 다음 일이 걸작이다. 동서가 웃으며 한 말은 내 손자와 놀며 일어난 일이다. 그 녀석이 의자에 앉아계시는 그 분의 발등을 모르고 밟았다. 어찌나 아팠던지 아야!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녀석은 빙 돌아서서 다시 그 발을 밟고 건너가더란다. 확실히 그의 분신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손자는 손자대로 보지 않던 늙은 할머니가 나타나 집안 식구 들이 절절 섬기는 것에 기분이 언잖았던 모양이다.    
   맏동서는 남편의 어릴 적 일을 많이 들려주었다. 그가 동네 아이와 싸웠다. 싸운 후 자기가 졌다고 생각된 모양이라 했다. 그 집 마당에 온 종일 돌을 던지더란다. 발을 되밟고 지나간 내 손자가 바로 그 라며 피는 속일 수 없다고 웃었다.  
   그는 오남매 중 삼남이었다. 큰누님은 출가했고, 두 형은 학교에 갔고, 동생은 어렸고 그래서 농사를 돕고 나무하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시아버님의 말씀 중에  “사봉(그의 애명)의 나무 한 짐이면 돼지 한 마리 잡을 수 있다.” 하신 것을 보면 그의 성실은 어릴 때부터의 성품이었던 모양이다. 비례해서 고집은 또 대단했고, 대학 진학도 맏형의 강경한 권고를 뿌리치고, 수차례 재수하면서도 가고 싶은 학교로 갔다.

    그런 그의 얼굴 이외에 아무도 몰랐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는 것은 모두가 놀랄 일이었다.  “아니 당신에게 이런 재주도 있었소.” 그와 총각 때부터의 직장 동료가 한 말이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재주를 그가 갖고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이민 온 첫 해다. 윌셔 거리에 200불 달세를 내고, -Antique repair- 그 사람 자신이 조각한 간판을 걸고 골동품 수리 상을 시작했다. 우리 단독 고안이 아니었다. 유학 온 그의 조카가 부업으로 얻은 경험을 삼촌에게 알리면서다. 기회의 나라라는 말만 믿고, 예술에 대한 아무런 견식도 없이 시작한 첫 일이 그것이다.
    수리 상을 열고 서너 달이 지난 후다. 일하고 돌아오니 탁상위에 십오 인치 높이의 불상이 놓여있었다.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팔을 재생해야 하는 일이란다. 동남아 불상은 팔이 어찌나 많은지 받아 놓은 불상은 팔이 열개였다.
   이튿날부터 그의 연구는 시작되었다. 작업실에서 하로 해를 끝내고 도서관에 들렸다. 부처를 연구하는 일이다. 불상을 스켓치 하고, 어떤 것은 복사도 해 왔다.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조사가 끝난 후 그는 작업을 시작했다. 팔을 먼저 열 개 만들었고, 팔 끝에 각기 다른 형태의 손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두터운 돋보기를 쓰고 밤늦게까지 조각한 작품은 우리 눈을 의심할 정도로 정교했다. 콩알보다 작은 손의 손가락들은 다 살아 숨 쉬고 있었고, 그 섬세함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놀람은 더 컸다.

   몇 달 걸려서 완성된 부처를 갖고, 돈 받을 기대에 부풀어 그는 골동품상으로 갔다. 그랬는데 그 골통품상은 파산 직전이었다. 돈이 없어서 수리비를 지불할 수 없으니 부처를 가져가도 된다고 말했다. 그때의 그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처 백을 주대도 60불 현찰과 바꿀 수 없는 사정이었다. 몇 달 걸려서 재생된 불상은 육십 불이 아니라 육백 불을 받아도 모자랄 열정과 정성이 깃든 것이었지만 말이다. 부처는 우리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천량을 얻은 기분이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1970년대는 미국의 경제가 공황을 만난거와 다름없는 시기였단다. 더욱이 이런 골동품상은 사치장사였을 것이다. 우리도 일 년 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다시 또 더한 옛날의 일이다. 이북에 부모를 두고 나온 그 사람은 공산주의사상에 진저리를 쳤던 수백 만 명 중의 한사람이다. 장기를 둘 때도 빨강, 청말 중에 빨강 말은 잡기 싫어했을 정도다.
   그의 아버지가 이북에서 처형을 당했다 했다. 왜 이북에 들락거렸던 공작대원들이 이남에 있는 가족들의 아픈 가슴에 더 부채질 했는지 모른다. 후에 알고 보니 모두 극적으로 지어낸 말들이었다. 처형당할 때 한 말씀이라며 이렇게도 전했다. “나는 죽어도 내 자식 넷은 이남에 살아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버지의 부음을 듣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그런 말을 들은 어느 아들이 빨강 말도 싫어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오랜 후에 알았지만 그의 부친은 팔십 여세까지 사셨으며, 미쳐 이남으로 데리고 나오지 못한 맏아들 손녀 셋을 데리고 갖은 고생과 탄식 속에서 지내셨다. 빨래를 비벼댈 힘도 없어 빨래 방망이에 빨래를 걸치고 훌훌 강물에 헹궈서 입으셨다는 전언도 있다. 남북이 왕래하기 시작했다는, 그가 그렇게도 갈망했던 기쁜 소식은 그가 세상을 뜬 후에야 들려왔다.  
   나는 태극기를 흔드는 세계 속의 붉은악마들을 항상 감격해 바라본다. 그러다가도 가끔 그들 태극기와 그 사람의 태극기가 다른 것 같아 당황할 때가 있다. 손 다림해서 벽에 걸어놓고 감회에 젖던 그의 태극기는, 대중 집결의 충동적 표출이 아니라 뼈 속까지 사무친 연연한 생명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가을 하늘 아래였다. 우리 둘은 오류동 논두렁길을 걸으며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 고장에 도시계획만 들어서면 가난을 벗는다. 지금은 휴지 값에 지나지 않지만 이 산은 우리를 호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꿈은 영영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지쳤고 가난을 견딜 수 있는 한계도 넘어섰다. 수중에 삼백 불만 남고 West LA 아파트에 정착을 마친 것은 1970년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호강이란 욕망을 모조리 버렸다.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를 기쁘게 살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날 벌어 그날 먹는 것으로 기쁘고도 남았다. 기대와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밑창이 달아본 일이 없었던 구두의 주인공은 흙투성이의 밭갈이 소로 변했고, 신사구두를 신어본지도 까마득한 옛 얘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고달프게 일 하고 돌아왔어도 이 순간을 천국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아파트 리빙룸에 자연을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양철로 된 주유소 간판을 구해왔다. 그 간판을 벽돌로 괴우고, 방구석에 붙였다. 아이들과 다니며 수집한 고목뿌리가 뒷산으로 변하고, 그 산 뒤에 갈대를 세워서 산림이 무성했다. 아래에 크고 작은 바윗돌을 눕혔고, 바닥에 자갈을 깔았다. 거기에 치렁치렁 물을 붓고 풀잎을 띄웠다. 강물이 있는 방구석에서 이민자의 고달픔은 조용히 치유되어 갔다.
   십 여 년 후, 여섯 식구로 터질듯 했지만 내 집이었다. 다시 뒷마당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십 여년을 눈에 달고 살아온 고향, 방축(芳丑)을 재현하고 싶었다. 시멘트 밑바닥에 수도 물을 틀어놓았다. 물 잘 타는 나무는 바닥에, 그렇지 않는 나무는 화분채로 배치했다. 심산유곡이 다. 널로 상대를 만들었고 물 위에다 술상을 보았다. 그러면 우연히 고물상에서 만나 안고 온 낡은 수문장이 옆에서 입을 떡 벌리고 지난날을 시설했다.
   이제 그 자리에 방이 들어섰고, 그때 그 정경도 가물가물할 뿐 인걸도 산천도 간데없다는 옛 시조 말이 되어버렸다.
  
   이런 정경들이 떠오르면 나는 내 열 손자들께 말 한다. 할아버지는 본래 농부였단다. 그래서 자연을 아주 좋아하셨어. 새 천지에 와서 막일을 하면서도 성실과 정열과 신념으로 기쁘게 살다 가셨지. 지금 그 분이 살아계셨다면 너희들께 바라는 것이 많았을까? 아니 없었다. 지나친 갈망은 고통뿐인 것을 체험으로 안 분이었으니까, 설사 너희들이 웃머리 사람이 되지 못했어도 기쁘게만 살았으면 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친구 집에 돌을 던졌던 고집 센 얼굴과, 예술적 재질로 빛났던 까만 테 안경 속의 고고한 얼굴과, 자기를 다 지우고 내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고 떠난 순교자 같은 얼굴이 하나로 합치는 순간이었다. 옅고 짙은 색상으로 그의 초상화는 그럭저럭 마무리 되었는가 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