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2007.09.04 05:26

배희경 조회 수:5


                “고맙습니다”                   2007년

   이층에서 밖을 내다보며 누군가에 고맙습니다 하고 있다. 연연히 이어진 산등성이 위에 길게 누운 구름 사이로 아침 해가 뜬다. 빛을 받아 퍼지는 우주 신비의 찬가다. 신이 없다고? 누가 그랬는가. 태양이 확하고 뿜어낸 각가지 물감 위에 살짝 감색을 더한 화살이 내 가슴에 와 박힌다. 살아있다는 고마움에 몸을 떨며, 얼마나 더 이런 속에서 살 수 있을까, 그리 많지 않는 세월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감동 시켰을까. 햇살을 받으며 고맙습니다 했을 때 분명히 나는 어떤 큰 힘을 본 듯 했다. 그러나 그 감격은 단 한 순간이었다. 대자연의 신비가 아무리 엄청나도 보이지 않는 분을 한 순간의 충동으로 찾기는 힘들었다. 고맙습니다로 진지한 인사를 드리며, 저 미지의 세계와 가까워 질 수는 없을까 하고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또 언제서부터 윗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한국어 방송 뉴스가 끝나면, 두 아나운서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맙습니다 한다. 그전 같으면 감사합니다 라고 했을 말이 고맙습니다가 되었다. 오십 여 년 전 임택근 아나운서도 인사를 했을 테지만, 고맙습니다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 말이 만 국민을 향한 공인의 인사말이 되어 어색하지 않게 우리 몸에 와 닿게 된 것이 기쁘기만 하다. 아나운서의 인사말이 간지럽게 귀에 들어오면, 가끔은 나도 고맙습니다 하고 웃는다.
   내 후배는 가끔 내게 편지를 보내온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는 이렇게 쓴다, ‘감사해요’ 라고다. 고마워요 하면 약간 존경사가 빠지는 것 같아서 이렇게 쓰고 있는 모양이다. 읽다가 이 구절에서는 어김없이 걸려, 신사복에 짚신 신은 인사말이네 하고 웃는다. 한문은 신사복이고 짚신은 한글이 되는 내 사고부터 뜯어고쳐야 되겠지만 나도 뾰족하게 듣기 좋은 존경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고맙습니다하고 ‘습니다’를 붙이면 되겠다. 이렇게 좋은 말이 있었다.

   고맙다는 말은 끝없이 이어갈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에게 칭찬을 한다. 그 칭찬은 가끔 완전히 칭찬할 수 있는 칭찬이 아니라도 이 정도면 되지 할 때의 칭찬이 더 많다. 그러면 칭찬 받은 사람은 칭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러면 먼저 사람이 답해  줘서 고맙다고 또 인사한다. 이런 식으로 그 고마움을 받는 고마움이 있어 고마움은 끝도 없이 이어갈 수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면서 자연히 사랑도 옮아간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가. 고맙다는 말 뒤에는 따듯한 눈매가 있다. 끈끈한 정도 맡아진다. 나도 같이 즐겁게 웃을 웃음소리도 들린다.

   남을 칭찬하는 마음속에는 또 존경하는 마음도 있다. 불전에 상불경(常不輕)이라는 보살이 있었다 한다. 그 보살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합장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돌팔매질도 받았지만 합장을 계속했다. “나는 감히 당신을 내려다 볼 수 없습니다. 당신도 언젠가는 부처가 되겠기에 말입니다”라고. 남을 존중하는 배려는 바로 나를 존중하는 심증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살을 떼어주기나 하듯 칭찬을 아낀다. 아니 절대 하지 않는다. 인색한 사람들이다. 거기에서 돌아오는 고마움을 모른다. 그 중에서 고맙다는 말을 죽어도 못하는 두 부류의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첫 사람의 예다. 친구가 내 집에 와서 이십 여일을 묵었다. 그사이 친구의 딸과 한두 번 통화했다. 누구나 상식적으로도 기대하게 되는 인사를 그 딸은 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가서 폐가 많습니다 라든가, 수고하시지요 고마워요 라던가, 무슨 인사가 있을 법 한데 한 마디의 인사말도 없었다. 고등교육도 받았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예의도 충분히 알 중년도 훨씬 넘긴 여인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랄 때 그녀는 곤경 속에서 컸다. 항상 남에게 고맙다는 말만 했어야 하는 신세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고맙다는 말은 자기 굴욕적 말로 되지 않았을까 하는 내 해석이다.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말 하고 있다. 자기는 고맙다는 말을 떼기가 아주 힘들다고 했다. 과거 만석군집 딸로 초등학교 때 까지 머슴에게 업혀 학교에 다녔다. 그 만석군 시대가 옛 고리짝이 된지가 까마득한데도 긍지는 아직도 살아 있는 모양이다. 남들이 쉽게도 고마워 고마워하는 말을 들으면 이화감이 생기고 부끄러워진다는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산 사람은 그 말을 할 수 없는 자기의 묘한 생각착오가 있고, 항상 남에게서 고맙다는 말만 들어왔던 사람은 그 말을 자기가 하게 된 입장이 어색한 모양이다. 우리 보통 시람 들의 머리에서는 짐작이 안 되는 일들이다.

   고맙다는 생각! 만날 때나 헤어질 때의 인사말에도 언제나 고마움의 표시가 있다. 일본 사람들의 인사문화는 어느 나라도 따르지 못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옛날은 대단했다. 헤어지는 인사만 하더라도 맞서서 인사, 몇 발짝 물러나서 인사,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서서 인사, 멀리 가서도 또 돌아보고 인사, 영원히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인사를 수도 없이 하고 헤어진다. 물론 인사를 받는 사람도 상대와 똑 같이 인사한다. 인사치레라고만 넘기기엔 너무 아름다운 뜻이 담겨있다. 고마움의 인사, 잘 있으라는 인사, 또 만납시다 라는 인사 등,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지만 항상 풀라스가 됐던 것들의 가치관이 마이너스가 되어 새로운 가치관을 찾는 전환기를 맞을 그때, 그 전환기에서도 하나 살아있는 것이 있다. 인간사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말 고맙습니다가 있다. 세상을 하직하는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기도 한 “고맙습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