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수필 - 반쪽 남은 무

2013.02.28 23:56

지희선 조회 수:327 추천:68

<반쪽 남은 무>

저 높은 곳에서 늘
지켜봐 주신 당신,
오늘은 키 낮추어
날 눈여겨 보십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
측은하다는 듯이...
애썼다는 듯이...

그러나

저는 봅니다.
당신의 깊은 눈망울에서
샘물처럼 찰랑이는
사랑을 ...

그토록 잡으려 애쓰던
지푸라기마저 놓아버리고
이제,
가장 낮은 자세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당신은 나의 사공,
나는 빈 나룻배.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맑고 바람 불어 파도마저 살랑이는 날
그 어느 하루를 택하여
당신 곁으로 날 인도해 주소서.

저는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겉은 검버섯이 피고 속은 바람이 들어 숭숭 구멍이 난 무. 이젠 더 이상 쓸 수가 없어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무.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 오고 가벼운 전류가 흐르듯 찡- 해 왔다.
   검버섯 때문이었을까. 한 70 아니면 80쯤 되어보이는 우리의 어머니가 떠오르고, 바람이 들어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나고 상한 모습은 혼자 속을 삭여온 뭇어머니의 속내를 보는 듯했다. 허긴,상처를 받으면서도 혼자 아픔을 감내해 온 사람들이 어디 어머니 뿐이겠는가.
   그런데,위에서부터 밑둥까지 세로로 잘린 모습 때문이었을까. 누어 있는 모습이 마치 나룻배 같았다. 지상의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는 고향의 포구에 누어 안식을 취하고 있는 만신창이 나룻배. 주변에는 여기저기 지푸라기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평생을 잡으려고 발버둥쳐 온 지푸라기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 손을 놓아버린 무욕의 모습이다. 빈 들엔 바람마저 스쳐가기 미안한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누구도 범치 못할 경건함마처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눈빛을 보았다. 마치, 측은하다는 듯이, 수고했다는 듯이 지긋이 내려다 보고 있는 눈빛 하나.그 눈빛은 샘물처럼 사랑으로 찰랑이고 있었다. 천상의 상급을 평안으로 보상해 주는 이. 나는 사랑과 연민으로 넘치는 주님의 그윽한 눈빛을 보았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주님의 그윽한 눈빛에 담긴 그 마음 하나로 지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평안을 얻었으니-  
   비록 버려진 무 반쪽에 불과하지만, 강 하류에 도착한 강물처럼 그렇게 평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모든 지상의 고통이 끝나고 '그 분'의 사랑 하나로 완전한 평화를 얻게 된 반쪽 무. 내 마지막 날에도 이런 마음 평화 하나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찡- 했던 연민의 마음은 결국 기도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언제 불러도 좋다는 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 사진은 커뮤니티 작가 겔러리 방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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