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친구
2007.09.26 04:42
다섯 친구 글마루 2007년
친구 다섯에 대해 쓴 글을 찾았다. "극진한 친구“에 대해서라 했을 때, 일순간에 머리에 떠 오른 이름들이다. Z, A, W, S, J, 아마 수를 더 늘렸다면 고르는데 시간이 걸렸을런지 모른다. 틀림없이 이 다섯 친구는 내가 죽으면 많이 슬퍼해 줄 벗이라고 적고 있다. 한국에 살고 있었던 세 친구는 슬퍼해 주기 전에 먼저 세상을 뜨고 없다. 나는 또 적고 있다. 그들이 가면 펑펑 많이도 울게 될 것이라고. 정말 펑펑 많이도 울었다.
이 다섯 친구는 각기 참 달랐다. 성격, 취미, 사고, 생활환경 등 그렇게 다를 수 있었을까. 심지어 태어난 도까지 틀려서 말씨까지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 같은 것이 있었다면 그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는 점이다. 첫 친구 Z는 동전같이 크고 새까만 눈을 가진 자연산 서구 미인이었고, 둘째 친구 A는 ‘잉그릿버그만‘과의 합작 재원이다. 그리고 유달리도 살결이 흰 팔등신 미인은 W 라는 벗이고, 친구 S는 동양화 미인도 속의 미인이다. 마지막 J는 강물을 타고 오르는 잉어다. 육십이 가까왔어도 씽씽하다. J의 미는 늙을 줄 모르는 데에 있다.
그 남달랐던 용모 외의 그들의 특성을 말한다면 모두 특종 감 들이다. 첫 친구 Z는 한자리에 앉혀놓으면 백년이라도 그냥 앉아 있을 정물 같은 여자다. 또 A는 어느 누구도 못 따라갈 패기로 꽉 찬 정열파다. W는 억새풀, 절대 지지 않는 쓱달바 전형이고, 또 한 친구는 사물에 괄호를 붙여서라도 확실해야 하는 S이다. 친구 J는 자기를 최고의 미인으로 아는 자신파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나는 내게 없는 그들의 성격과 생각이 신기해서 경이로 그들을 바라보며 좋아했다.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 했지만, 나는 그 중의 어느 한 사람과도 같지 않으니 아상하지 않은가.
죽은 친구 A다. 그녀의 영전에 이런 독백을 얹어 보낸 글이 있다. <너는 기관차와 같았다. 석탄은 너의 정열이고 그 정열로 기관차는 불을 뿜으며 쉴 새 없이 달렸다, ...... 세계에서 이름난 네 손녀의 바요린 연주를 들으며 나는 손녀보담 네가 더 자랑스러웠다. 모두 네가 이루어 놓은 정열의 결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너는 왜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이 그리도 많았니? 자식 손주를 나노라 키워놓고도 무엇이 부족했니? 영어공부는 혈압이 너무 높아 누워서 했다지. 새 것으로 새로 시작한 것이 창이었고, 창을 배운다고 했을 때 나는 그저 헐헐 웃었다. 아직도 할 것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였다. 창의 참 소리를 들으려면 삼년이 걸린다는 말을 서두로 너는 나를 웃기기 위해서도 신명났었다. 수만리 길 타고 들려왔던 네 장난기가 마지막일 줄 누가 알았겠니. 그때 웃고 또 웃었던 일을 나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너는 네게 많은 쓸거리를 준 사람이다. 마음속에 담겨있는 네 글을 한 장씩 넘기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내 글도 네게 넘기게 할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너는 가고 없다. 글 쓸 이의를 한 쾌 잃었다.>
첫째 친구 Z로 돌아간다. 그녀는 노처녀 담임선생의 예단 수를 놓느라 지쳐 있었다. 뛰어났던 바느질 솜씨로 수예시간이면 선생님 일만 해 드려야 했던 벗이다. 지겨운 일을 싫다는 내색도 못 내고 속으로만 삼키던 그녀. 서로 안타까움을 교환하면서도 나는 수를 놓지 못하는 내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크고 젖은 눈으로 애원하듯 쳐다보던 그 눈이 육십 여년 후에도 그대로 있다.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문장과 한석봉의 글체로, 살아가는 시름을 가득히 담아 보냈던 그녀의 글은 내 편지함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이 글이 끝나면 오랜만에 함을 내려, 빨강과 파랑 줄 처진 옛 항공엽서를 뒤져 낼 것이다. 서로 너무나 그리워 주고받았던 편지들, 얼마나 퇴색되었을지 오래도 묻어두었다. 그녀의 편지는 나를 또 울리겠지.
세 번째 W는 천하의 걸작이다. 말싸움이건 완력이건 져 본 일이 없는 친구다. 그런 그녀가 어찌 자기 앞에 떨어진 불을 보고만 있었겠는가. 그녀는 미국에 놀러 와서 엄청난 얘기들을 들려주고 갔다.
남편이 어떤 여인과 바람을 피웠단다. 물론 내게 놀러왔을 때는 이미 남편은 세상을 뜨고 없었지만, 그녀가 만면에 웃음과 노기를 띠고 한 얘기는 이렇다. 하루 친구는 남편의 그 여자를 밖으로 불러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거리였단다. 친구는 그녀를 보자 눈에서 불꽃이 튀더란다. 조용한데로 가고 새고 할 새 없이 그 자리에서 발로 문드러지게(그녀의 표현이다) 밟아주었다나. 한 달을 움직이지도 먹지도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고소했는지 몰랐다고도 했다. 입을 딱 벌리고 그 말을 들으면서, 이런 행동파 친구를 대견해 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몰랐다. 그 친구도 이제 이 세상을 뜨고 없다. 곡절이 많던 질곡의 날들을 뒤에 하고 영원히 가고 없다. 오년 전만 해도 팔팔하게 살아서 온갖 울분을 토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 그녀였지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나를 진정으로 도와준 친구가 또 그녀였다.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응! 의석엄마 힘들어? 얼마, 얼마? 내 도와줄게.” 이 말은 우리 가정의 역사같이 자식들께 알려온 말이다. 그녀와 여기서 같이한 한 달이 없었다면 나는 그녀를 지옥에 찾아가서라도 (천당에 갔을 리 없을 테니까) 지나온 고마움을 갚으려 했을 것이다.
이제 친구 S다. 이 친구의 긍지는 하늘을 찌른다. 훌륭히 성장한 다섯 자식을 배경 삼아서가 절대 아니다. 자기 자신만이 갖는 자긍심이다. 남보다 못 해 보이는 것을 절대 참지 못한다. 심지어 받는 친절 까지도 자기가 준 것 보다 더 받는 것은 절대 싫다. 더 건네는 것도 기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정사각형이다. 반듯하게 정(正)이라야 한다. 실수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또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먹어가는 나이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지금은 벗어날 때도 종종 있게 되었다.
항상 모나리자의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는 팔십이 다 되었어도 여전히 아름답다. 하얗게 깨끗하게 늙어가고 있다. 전화에서 S의 목소리가 들린다. “해피 밸런타인스 데이!” 오늘을 우리끼리 자축하자는 전화다. 이런 날이면 더욱 허전을 실감하는 두 늙은이다. 맛있는 점심도 먹고 영화구경도 하잔다. 일주일이 멀다고 만나는 우리들이지만, 오늘을 위해 오늘 만나야 한다는 안에 나는 쌍수로 찬동했고, 우리는 초콜렛을 떼어 먹으며 연인같이 하루해를 즐겼다.
친구 중에서 가장 젊은 마지막 벗 J는 알 찬 밤송이 같은 여자다. 어느 때 보아도 자신만만하다. 일하지 않고 살아도 아쉬울 것 없는 친구지만 아침 여덟시부터 종업원과 같이 돌아간다. 돈을 열심히 벌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가 마음이 동해서 뜰 때가 되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집을 떠나 없다. 돈을 쓰려고 가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며 복지사업도 하고 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줄 아는 슬기로운 친구다. 성격에도 모가 없어 하루 종일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산다. 그 모습이 여간 아름다운게 아니다. 나를 엄마같이 따라서 가끔 이름이 붙는 날이면 봉투가 날아오기도 해서 감동시키고 있다.
지난번 그녀의 생일에 안 사실이다. 육십이란다. 나와 같이 지낸 연륜으로도 사십 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 나이 틀림없는데도 나는 깜짝 쇼 보듯 그것을 들었다. 자기를 최고의 미인으로 아는(사실 그렇기도 하다) 자신파의 처세술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비결이라도 가졌단 말인가.
젊은 밤송이 같은 J와 정자형의 S를 빼고 다른 세 친구는 인생 깜짝할 사이에 갔다고 표현하고 싶게 갔다.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살면서도 사람의 정은 두텁게 남아 지금껏 그들의 생각으로 울고 웃고 하고 있다. 가슴 밑바닥에서 숨 쉬고 있는 이 다섯 친구의 우정에 세워진 비석은 없지만, 나와 함께 살아있는 그들이 있고, 있었다는 것으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적으면 조금 과장 같아서 이렇게 말하겠다. 내 다섯 친구도 나를 좋아했지만 나는 그들을 더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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