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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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민족시인선양문학의 밤 강연 원고

일시: 2018년 9월 29일(토) 오후 5:00

장소: 피라미드 레이크 RV 리조트

          (45100 Copco Ave. Corman. 전화 213-725-3845)

강사: 최선호 목사(시인, 문학평론가)


일제 강점기에 시작활동을 해온 송몽규와 윤동주 시인들의 일생은 시에 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시시각각 번민해 오면서, 투옥되면서, 젊음을 불사른 자취가 너무도 역력하다. 이로 보면 그들을 시인으로만 기억하여 선양하기에는 참으로 부족함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 선양되어야 하리라. 당시, 혹독한 일제에 저항한 시인들이 이들만은 아니지만 이들은 시보다 조국을 위해 20대에 목숨을 잃었다. 그만큼 더욱 나라를 사랑한 사람들이다.이들의 가슴에는 조국이 분명히 살아 있었다. 이들의 조국은 일제 식민의 나라가 아니었다.진실로 대한민국의 국민답게, 대한민국의 시인답게 영예로운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었다. 지나간 역사로만이 아니라 민족시인들의 애국정신을 오늘을 사는 한국인 모두의 가슴깊이 새겨지도록 호소하는 바이다.     

 

<평론>

민족시인들의 면모

 

민족시인을 달리 표현하면 저항시인 또는 항일시인이라고도 한다.'한국이 낳은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도 윤동주 송몽규 이육사 한용운 등, 일제시대를 거쳐온 시인들이 우리 시문학사에서 일제에 저항한 자국을 남긴 시인들이 있다. 그 중에도 윤동주(1917~­1945)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여전히 높다. 그 이유는 주로 그가 일제말기의 한국민족의 정신을 대변한 이른바 '민족시인' '저항(항일)시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 세계에 대하여 모든 한국인이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전편의 시를 잘 알고, 그 모든 작품의 내용에 대해 관심을 두고 또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주변에 있는 한국인들도 윤동주라는 이름과 몇 편의 유명한 작품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작품들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윤동주에 관한 한 그 이름만이 앞서 가고 시 세계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상은 일본 시인 우에노 준이 그의 저서 '예언시인 윤동주'에서 언급한 말이다.
 우에노 준 교수의 글을 읽으며 나는 감격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타국인이면서 윤동주의 동포도 따를 수 없는 열정과 사랑과 끈기로 그의 학문과 시와 예술의 깊이와 진실을 계속 캐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학문. 예술이 뛰어났으며 그의 국적이나 행위의 여하를 가리지 않고 캐어가는 그 뛰어난 전통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안중근이나 김옥균 등도 그들의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욱 탐구가 넓고 깊다. 진리와 예술의 깊이 문제지 그 삶의 경향이나 영향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적인 학문의 태도 이것이 바로 저들이 오늘의 뛰어난 국력을 이룩한 바탕이요 뿌리였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민족적인 문제를 넘어서 세계적인 가치에까지 파내려가는가 하면 또 다시 그와 시의 종교관 철학관 미학관을 찾으며 원죄로부터 구원 말세 등까지 높이고 깊이 간 데 더욱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이 글 역시 같은 책에 유 영의 언급이다.
 이 글들은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를 크게 반성시키고 있다. 문학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앞서 문학정신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대정신과 맞물린 작가론과 작품론이 따르게 마련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가장 많이 애송되고 있음은 무엇 때문일까? 그 시를 구성하고 있는 시어나 윤동주 시인의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그 시가 탄생할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린 윤동주의 시심에 자신도 울면서 우리를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를 잠식당하는 민족은 문화민족일 수 없다. 우리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민족이기에 우리 문화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수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면 될 일인가?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우리가 기억하고 선양해야 할 문화정신은 얼마든지 있다. 창작이 매우 중요하지만 창작품을 연구 정리하는 일은 그만큼 값진 문화 활동이다. 이에 더욱 뜨겁게 접근하여 우리 문화는 물론 세계 여러 문화의 가치를 발굴하는 바른 문화정신을 함양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그의 인생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일은 더욱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 시문학사가 외치는 항일시인들의 면모를 알아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序詩」의 전문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滿)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윤동주「懺悔錄」의 전문

 

  「서시」에는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괴로워하면서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 즉 고난과 역경의 길을 가겠다는 자아의식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의 자아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찾을 일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현실인식을 확실하게 다듬고 있다. 여기에 자아의식이 내면으로 더욱 분명하게 앉혀지고 있음을 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은 일찍이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 나타난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중 二樂에 속한다.

 

  이 시에서 깊은 시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3, 4행이다. 사실 '잎새에 이는 바람' 정도라면 괴로워 할 대상으로까지 여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토록 섬세한 감정의 승화로 우리를 울리고 자신도 울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자아의식이야말로 참으로 처절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 시가 쓰여질 당시의 우리 민족의 자아의식의 표본이랄 수도 있다. 일제에 밤낮없이 시달리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모습이 눈에 어린디.

 

  「참회록」에는 망국의 부끄러움으로 뒤덮인 역사 속에 유물로 욕되게  남아있는 자아의식이 뚜렷하다. 이 부끄러운 고백을 후회하면서 자아를 자아다운 자아로 구현하기 위해 '구리거울 속에 낀 녹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역사의 떳떳한 십자가를 지고 갈 홀로의 자아가 구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분명한 자아구현이 내면에 자리하므로 내적 자신의 모습 발견에 성공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 자아구현은 조국광복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개인적 욕구와 공동체의 욕구가 병행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우리 민족 전체의 자아가 시인 자신에게 집약적으로 내면화 되어 있다.

 

 숟가락

우리 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었다.

잡힐 것은 잡혀먹고 더 잡힐 것조차 없었다.

- 여보! 어디 좀 나가 봐요! 아내는 굶었건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없었다.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여보 좋은 수가 생겼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뭐요? 좋은 수? 무슨 좋은 수란 말에 귀가 띄었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우리 결혼할 은숟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아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숟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웠다. 우리가 결혼할 - 외국(外國) 가 있는 이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것이다. 그리고 그때 숟가락과 함께 써보냈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너희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희도록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숟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희가 가정을 이룬 뒤에 이 숟가락으로 쌀죽이라도 떠 먹으며 굶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 숟가락에 쌀죽도 띄우지 않으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그러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마저 잡혀야만 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겠소 있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아내를 다시 달래보았다. 아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다.

굶으면 굶었지 그것은 못해요. 아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겠소.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아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아 있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빨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겠소 라고 말하였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아내는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 더 흘러 내려오고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숟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팠다.

그것이 은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 망명한 아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예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자네 것이 건 자네 아내 -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 되네 이렇게 쓰였던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 것만은 잡힌지가 벌써 여러 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자를 크게 쓰고 아래는 나와 아내의 이름과 결혼이라고 해서(楷書) 똑똑히 쓰여있다.

나는 그것을 잡혀 ,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말없이 쌀을 받아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 있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밥은 다 되었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 놓고 우리 부부는 마주 앉았다.

밥을 막 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렇게 권해도 아내는 못들은 체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아내의 볼을 흘러 내리었다. 저러고 있을고? 생각하던 나는 !하고 외면하였다.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아내의 숟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던 까닭이다. --동아일보 193511일자에 게재된 신춘문예 콩트 부문 당선작인 송몽규의 「술가락」 전문. 아명인 송한범(宋韓範)으로 게재. 1934 무렵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그는 '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큼직한 사각도장을 마련해서 자기의 책을 분류, 정히하는데 썼다. 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 속 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남아 있다 <송우혜 저,윤동주평전에서>

 

() ≫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 송몽규(宋夢奎)


고요히 沈澱된 어둠 (__かに夜の帳が下りた暗闇)
만지울 듯 무거웁고 (__れるそうで重く)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夜は海よりも深い)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一人夜を過ごすこの心は)
險한 山길을 걷고―――  (__しい山道を__き)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我が夢は夜よりも深し)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__れ動く水の音を後に)
-ㄹ 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遠くの星を見上げ口笛を吹く)

(1938816일 작、『조선일보』1938 9 12일자 참고, 번역 이수경) 현재 남아 있는 송몽규의 시 <()>이다. 이 시에 나타난 어둠’, ‘무거웁고’, ‘깊구나’,’깊어등은 일제 치하를 상징하고 있다. 이로 보아 송몽규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보이고 있다.
 

후쿠오카서 옥사한 송몽규, 윤동주의 재판판결문과 잡지 <문우> 고찰, 그리고 지배받는 조선인 옹호로 20대에 목숨을 잃은 시인들- 이 기록은 서울 출신으로 도교 가쿠게이대학교(일본국립대학법인), 일본 국립교사 양성 사범대학의 중심 교육학부 전임교수 2005- 현재, 이수경 박사에게 간네받아 요약 발췌 했다.

 

1. 국경을 넘어서 사랑받는 시인 윤동주

1917 12 30,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보다 3개월 정도 늦게 같은 집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교사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몽규와 같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중간에

중국 관립학교인 대립자에 1년을 더 거친 뒤, 평양의 숭실중학교, 광명학원에서 수학. 그 뒤, 윤동주는 의학부 진학으로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고뇌하지만, 조부의 이해를 얻고  부친을 설득한 결과, 1938 4월에 송몽규와 함께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문학공부를 한다.

1941 12월에 졸업을 하게 되는데, 그 당시 <서시> 등이 게재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출판을 생각하지만 일본이 총력전으로 치닫던 당시 상황에서 출판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은사의 충고로 단념, 친구에게 내용을 건네줬던 것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면서 민족시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942년 다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깊이 있는 문학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을 한다. 같은 해 4월에 릿교대학교 영문과 선과에 입학하지만, 기독교인인 그로서는 국가 신도의 강압에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퇴학한 뒤, 10월에 자신이 존경하던 시인 정지용의 출신학교이기도 한 교토의 도지샤대학교 문학부로 옮긴다. 송몽규의 하숙집과 가까운 사교우쿠 다나카다카하라쵸(田中高原町) 27번지인 다케다(竹田)  아파트(현재는 교토조형예술대)에 숙소를 정하고, 동경의 대상이었던 도시샤대학 출신의 시인 정지용의 기억과 더불어 유학생활에 젖었던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나 고종사촌형 송몽규와의 모임을 이유로 귀향하기 직전인 1943 7 14일에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혐의로 체포되었다(송몽규는 과거 제남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고향에서 구류된 전력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감시 대상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교토가 아닌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 되어 매일 밤, 원인 모를 주사를 맞다가 1945 2 16일에 운동주가 비명의 옥사를 하게 되고, 같은 해 3 7일에 송몽규도 생을 마친다. 두 번 다시 고향을 밟을 수 없게 된 두 사람의 사망 당시 연령은 27세였다. 지금은 윤동주와 더불어 고향의 땅 명동의 동산에 잠 들어 있다.

2. 윤동주의 운명, 고종사촌 형 송몽규

송몽규는 1917 9 28일 간도성 연길현 용정신촌 명동(間島省 延吉縣 龍井新村 明東: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윤하현 장로 집 맏딸 윤신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하현의 외아들 윤영석의 누나이다. 그리고 동생 윤영석도 12 30일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윤동주이다. 같은 집 같은 땅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고종사촌 형 송몽규와 3개월 뒤에 태어난 윤동주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집에서 자랐고, 향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유학, 교토 생활, 그리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할 때까지 일생을 통한 동반자적 운명을 걷게 된다.

송몽규는 여덟 살 때 윤동주, 문익환 등과 현지의 명동소학교(교장은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에 입학하였고, 월간잡지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그 뒤, 화룡현립 제1 소학교 6학년에 편입 후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다 1932 4월에 송몽규는 은진중학교에 입학, 그 곳에서 동경제대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 민족의식이 강했던 명희조 선생의 영향을 받고 중학생 때인 1935년에 남경의 김구 산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제님(濟南) 소재의 이응일 산하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1936 4월 경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본적지인 웅기경찰서에 구류되어 취조를 받은 뒤, 같은 해 8월에 석방(이후 요시찰인).

중학에 들어간 송몽규는 문학활동 및 학업에 열중하게 되고, 1934(은진중학 3학년) 12월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부문에 (숟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 되어 당시의 고향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942 4, 교토제국대학교 문학부사학과 선과생으로 합격, 1944 4 13일에 선고 되어 같은 해 4 17일에 확정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3 7 14, 한국 유학생 모임에서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한 것을 이유로 송몽규는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 책동>이란 혐의로 체포 되었다.

3. 연희전문학교 유학과 잡지 <문우>

1936 8월에 석방된 송몽규는 다음해 4월 용정 대성중학교에 입학 후 문학활동 및 학업에 열중하였고, 1938년에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문과에 입학. 문과 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 (1932년에 창간)를 이어서 송몽규가 문예부장을 맡았던 1941년에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목차에는 “하늘과 더브러”로 표기), 윤동주는 <새로운 길>, <우물 속의 自畵像>를 발표. 발행 후기는 송몽규의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에 대한 당시의 상황을 시사하는 글이 게재. 아이러니하게 <문우>의 폐간을 담당하게 된 송몽규의 심경이 후기의 짧은 문장 속에 응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문우>는 이수경 교수가 20118 23일에 제공 받았던 연대 도서관 국학자료실 서고에서, 지금은 펜슨홀 윤동주 기념실에 소장 중, 20135 29일 현재)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아무래도 2-3 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알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여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받고 싶다. 국민 총력 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러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서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 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4. 송몽규 재판 판결문 전문에 대해서

1) 송몽규는 조선출신학교 교사 집에 태어나서 중학교 교육을 받았는데 어릴 때부터 중화민국의 박해를 받고 민족적 비애를 체험하였고, 민족적 학교 교육 등의 영향으로 치열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어 1935(소화 10) 4월 경에 선배의 권유로 중학교 중퇴를 하고 남경 소재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 일파에 참가하여 의식을 높였고, 같은 해 11월 경에 제남 소재 독립운동단체 이응일파 산하에 참가하여 활동하다 다음해 4월 경에 본적이 있는 응기경찰서에 유치 취조를 받고 같은 해 8월에 석방된 경력을 갖고 있으며 그 뒤, 간도성 용정의 국민고등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거쳐서 1942 4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산과생으로 입학했으나 여전히 민족적 편견으로 조선의 각 학교의 조선어 교수과목 철폐 및 언문으로 만든 신문 잡지 폐간 등의 사실에 관한 제국 정부의 조선통치에 대하여 일본이 고유문화를 절멸시켜서 조선민족을 멸망 시키려 하기에 조선의 독립국가 건설을 반드시 이뤄야 하고, 그를 위해 조선인의 대중 의식을 앙양 시키는데 힘을 써야 한다는 것.

2) 1942 12월 초순 경, 하숙집이었던 교토 사쿄우쿠 기타시라가와 히가시히라이쵸 60번지(京都左京區北白川東平井町 60 番地)에서 같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던 고(다카시마:高島) 희욱에게 향후의 독립운동의 학구적 논리적 빙책을 지시하였고,

3)1943 4월에 윤(히라누마; 平沼) 동주에게 총독부 정책에 의하여 소학생 중학생이 조선어를 사용할 수 없는 실태가 되어 있는 것과, 만주국의 조선인과 내지인(일본인-역자 주)의 식량 차별, 조선위 징병제도에 관한 민족적 입장의 상호비판을 행하고, 그 징병제를 조선독립 실현의 위력으로 이용할 것을 서로 논하면서 상호 독립의식을 고양했다는 것,

4) 1943 4월 하순, 교토시의회의 야세유원지에서 윤동주와 릿교대학생인 백인준과 회합하여 징병제도를 일본이 패전했을 때 독립 실현에 이용할 수 있도록 모색한 것,

5) 같은 해 6월 하순 경, 고희욱에게 대동아전쟁은 결국 강화조약에 의해서만 종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회의가 열릴 때 단번에 조선독립의 여론에 횐기하여 돌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인도의 독립운동가인 찬드라 보슈(20대에 인도 독립전쟁 참전, 인도해방국민국 조직에 괸여-역자 주)와 같은 지도자를 영성하여, 일본의 전략이 피폐했을 때, 챤드라 보슈와 같은 자도자에 의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윤동주에게 역설했기에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징역 2년에 처한다는 펀결(1944 4 13, 교토자방검찰청 재판장인 고니시 노부하루 판사와 후쿠시마 노보루 판사, 호시 토모타카 판시에 의한 판결)이었다.

5. 윤동주 재판 판결문 전문에 대해서

1) 송몽규와 관련하여; 1943 4월 중순 경, 송몽규의 하숙집에서 회합을 가지고, 장병제도의 조선독립을 위한 이용을 논한 것. 같은 해 4월 하순 경, 하츠세우원지에서 송몽규와 릿교대학의 백인준과 회합하고, 징병제의 활용이나 우수한 지도지를 키워서 독립실현을 살천해야 한다고 역설. 같은 해, 6월 하순 경, 윤동주의 다케다 아파트에서 챤드라 보슈를 논의하고, 일본의 잔략이 피폐했을 때, 그와 같은 지도자를 출현하면 독립달성을 위해 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격려한 것.

2) 마츠바라 데루타다와의 관련; 같은 해 2월 초순 경,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내의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폐지한 내선일체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문화의 유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 달성이 필수라고 강조, 같은 해 2월 중순 경, 조선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상황에서 내선간의 차별 압박에 대하여 지적하고, 같은 해, 5월 하순 경, 같은 아파트에서 대동아전쟁에 대하여 항상 조선독립 달성과 관련하여 이야기하였고, 조선민족의 일본 동회를 염려하며, 조선민족으로서는 일본의 패전을 기대한다는 견해를 피력, 같은 해, 7월 중순 경, 민족 행복 추급에 입각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여 마츠바라에게 민족의식을 유발하도록 힘썼다는 것,

3) 장성언(白野聖彦)과의 관련; 1942 11월 하순 경, 같은 아파트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1942-43년 사이에 조선어 사용급지 정책에 반발하여 조선어를 지키려는 학회원 33 명이 체포되었고 개중에는 고문 끝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 체포자 속에는 교토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송몽규와 윤동주의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던 최현배도 있었으므로 그들의 교육을 받은 입장에서는 당연히 조선어 관련이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에 대한 검거를 논난한 뒤, 조선문화의 멸망을 염려하고 문화의 앙양에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같은 해, 12월 초순 경, 긴카쿠지(銀閣寺) 부군의 거리에서 개인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조선민족은 개인적 이해를 떠나서 민족 전채의 번영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 1943 5월 초순 경, 같은 아파트에서 조선의 고전 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하고, 고유문화의 발양을 위하여 조선 독립의 실현을 역설. 같은 해 6월 하순 경,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사 개설>을 대여하여 조선사 연구에 노력한 것.

이상의 내용이 국체를 변혁할 목적의 행위로 치부받아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에 징역 2년에 처해진다.

6. 일제 말기의 일본의 상황과 조선안을 옹호하다 20대에 목숨울 잃은 일본 시인들

1945년 당시 한반도에서 건너 온 재일 동포는 240만 명이었다. 그 중의 많은 동포들이 군 관련 시설 및 탄광, 토건(, 터널 공사), 공장, 도로 건설, 지하 군수 기지 등의 군사 노동력으로 투입. 일본 대장성 공식 자료<조선인 강제 연행 노동자>에 의하면 1939년부터 1945년 패전까지 동원된 노동자가 일본 국내만 724,727 ) 일제 말기 패전이 짙을 때 일본 왕족 및 주요 군부 시설이 지하 터널을 몰래 파는데, 도쿄서 4시간 정도의 나가노 마츠모토에 있는 마츠시로 대본영(육군 총사령본부와 왕족 일가의 거주지 밑 주요시설 포함)에는 조선인 노동자 7000여 명이 동원되었고, 그들의 야반도주나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선인 위안부의 위안소도 존재했다. 그곳은 한여름에 들어가도 차가운 암반의 지하 공간으로, 현재 공개되지 않은 벽 속에는 노동자들의 출신지 등이 새겨져 있다. 그런 일본의 강압적 지배 속에서 일본의 군국/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조선인을 옹호하느라 20대에 목숨을 잃은 시인들과 양심적 일본인이 있었음도 기억하자.

일부 소개를 해두자면,

나카시니 이노스케(中西伊之助, 1887-1958)

;1922, 당시 일본인 누구도 가혹한 식민지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해서 피해자측 입장에서 논하지 않던 시대, 나카니시는 식민지 정책에서 생활 터전을 잃고 수탈에 고통을 받는 한국 농민들 상황을 <적토에 싹트는 것, 개조사) 등의 작품을 통하여 고발. 사회운동가, 정치가, 교토 우지출신, 중의원 의원을 2.

우치노 겐지(內野健兒, 1899-1944)

; 한국에서의 반생을 통하여 한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재로 한 시를 적음. 휴머니즘적 약자 옹호에 기인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생을 바침. 예명으로 아라이 데츠(新井徹)라고도 함.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

; 인권 변호사로 일본인 유일의 대한민국 건국훈장상 수상자. 2.8 선언 때 체포된 한국 유학생들 변호를 맡거나 박 열사 건, 조선공산당(사상자로 모함 체포하던) 사건 등의 변호를 맡으며 조선인 표적 체포에 대한 변호를 맡아서 수 많은 조선인 관련 변호로 동포들을 구하는데 진력. 평화주의자. 메이지대학교에 기념관이 있음.

츠루 아키라(鶴彬, 1909-1938) 본명은 기타 카츠지(喜多一二).

; 천재시인으로 불렸으면서도 전쟁 준비를 위한 군사훈련에 의문을 가졌다가 영창 생활을 한 뒤, 일본의 참략 전쟁의 모순과 한반도 지배정책에 대한 비판을 시(센류)로 발표하다가 1937년에 군부 반대로 치안유지법 혐의로 투옥, 고문 후 28세의 생을 마침.

마키무라 코(1912-1938); 본명은 요시다 도요미치(吉田 豊道)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왕족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강의를 할 정도로 신동이라 불렸지만 일본의 침략 전쟁 준비를 위한 군사 훈련의 모순에 저항하며 제국주의 일본의 폭압과 식민지 조선이 채해졌던 비참한 상황을 치밀하게 파악하여 대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발표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다 심한 고문으로 인해 2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오오카와 츠네키치(大川富吉, 1877-1940);

경찰관의 귀감이자 인도주의. 1923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진재(마그니류드 7.9)로 인해 도쿄 요코하마 주변이 궤멸상태로 빠지자 당시의 권력층들은 값싼 임금에 가혹한 노동을 하던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한국인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에서 왔다고 하던 죽창 등으로 자경단 등이 찔러 죽이거나 사태를 악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다.

그 때 요코하마 추루미 경찰서에는 한국인들이 끊임없이 연행되어 오던 터라 당시 서장이었던 오오카와는 흥분하여 감정적으로 조선인 죽이자며 경찰을 포위하며 외치는 군중들의 흥분을 우려하여 관내 소지사(總持寺)란 사찰에 경찰을 배치하여 한국 동포 301 명을 보호하였고, 그 사실에 항의를 하는 일본인들에게 유언비어로 이성을 잃지 말라고 설득, 301 명은 9 9일 가잔마투라는 배를 타고 각지로 이동, 나중에 생명을 구해준 그를 위해 재일 교포들이 감사비를 세웠다. 그는 1927년 갑자기 경찰을 사직, 이유 불명.

<참고문헌/자료 등>

송몽규 재판판결문 원문/ 윤동주 재판판결문 원문/ <文友>/ <아사히 신문>/ <연합뉴스>/

마츠시로 (松代) 대본영 및 윤동주 송몽규 관련 장소, 아키타현, 이수경 편저 <한일교류의 기억> 한국학술정보, 2010, .

청포도靑葡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 <청포도> 전문

 

이 시는 독립운동가,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자작시.〈광야 曠野〉·〈꽃〉·〈절정 絶頂〉·〈황혼 黃昏〉 등과 함께 대표작 중의 한 편이다. 1939 8월호 ≪문장 文章≫지에 발표되었다가 그 뒤 ≪육사시집≫에 수록되었다.

이 시에 나타난 칠월, 청포도, 하늘, 흰 돛 단 배, 손님, 청포, 은쟁반, 모시 수건 등이 돋보인다.   어휘들은 각각의 모습과 색채감을 가지고 나타난다. 특히 푸른 색과 흰색의 대비가 뚜렷하다. 흑백사진이 아니라 천연색 사진을 보는 느낌이 든다. ‘칠월’은 ‘팔월’의 앞달이다. 아마도 이육사 시인은 그의 강한 예지력으로 조국의 앞날을 내다 본 듯도 하다. 수십 년을 기다려 온 조국 광복을, 무르익에 가는 칠월의  청포도에 이입移入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은 내 조국에 광복의 기운이 감돌아 무르익고 있는 때를 노래한 것이다. 즉 자연의 변화와 인륜의 역사를 함께 조명하지 않았나 싶다.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는 광복의 역사적 여건이 형성되고 있음의 시적 형상화이다. //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도래하고 있는 광복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이다. 2연부터 4연까지는 광복을 맞게 되는 때가 점층적漸層的으로 강조되어 나타나 있다.

5,6연은 전체적으로 광복을 만나 누리는 민족적 환희를 표현하고 있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포도는 광복에서 맛보는 감격의 미각적 표현이다. 여기서의 “아이야”는 우리민족 누구라도 좋다. 광복을 맞을 준비를 “식탁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의 정성을 기울여 준비하자는 민족적인 열망의 부탁이 아닐까!    

 이 시 전체에 흐르는 의인법擬人法, 활유법活喩法 등의 활용에서 시의 생동감이 차고 넘쳐 머지 않은 장래에 부푼 꿈이 이루어짐을 예지시키고 있음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광복은 확실하게 우리 앞 식탁에 놓인 은쟁반에처럼 놓여진 하이얀 모시 수건 같은 것이 아닌가. 우리 민족의 소원인 통일도 이렇게 다가  왔으면 얼마나 좋으랴!

광야曠野

A.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B.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C.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江 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D.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E.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의 <광야> 전문

  

「광야(曠野)」는「청포도(靑葡萄)」와 함께 이육사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인은 일제치하에서 옥고를 겪으면서 조국의 광복(光復)을 소원해 왔다. 일제에 저항하는 삶 자체가 그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윤동주와 함께 저항시인으로 우리 詩史는 외치고 있다.

 

  5 15 행의 이 시는 현대 자유시(內在律)이며, 조국 광복으로 내달리는 꿈과 의지가 점철되어 있다. 이 시인이 처한 현실을〈지금 눈 내리고〉로 알 수 있다. 여기서의〈눈〉은 일제의 침략 · 압박을 상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도 이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여기서〈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는 조국의 내일을 내다보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독립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현실을〈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역사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일제의 침략과 조국의 광복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A연〈까마득한 날〉은 과거, D연은 현 시점, E연〈천고의 뒤〉는 이 시인이 기다리는 미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광야曠野에서 이 시인이 기다리는〈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야말로 우리 민족 모두의 염원이다.
                
  A연의〈까마득한 날〉날은 태초太初를 말한다.〈하늘이 처음 열리고〉는 개천開天 즉 역사의 시작을 말한다.〈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닭이 어디서 울었느냐는 물음이라기 보다는 설의적設疑的으로 '어디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B연은 의인법의 활용이 잘 나타나 있다.〈범()하던〉은 "범하진"의 안동 사투리.〈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의 '이곳'은 광야이다.〈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에서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광야'임을 나타낸다.

 

  C연의〈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와〈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에서 활유법活喩法, 의인법擬人法의 표현을 본다. A-C연까지 역사의 태동과 발전이 점층적으로 나타나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D연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의지를 노래한다. E연은 미래를 향한 단단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끝 부분의〈하리라〉는 사동 조동사이다. 여기서의 광야는 넓은 들(廣野)의 뜻이 아니라, 인적人跡이 없이 아득하게 너른 허허벌판의 '빈들(曠野)'이다. 광야는 우리 조국을 상징하고 있다. 신성불가침의 조국 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목 놓아 부르게 하는 광야는 광복을 염원하는 조국의 모습이 확실하게 나타나 오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진보)이며, 퇴계 이황 14대손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 10 후반에 가족이 대구 이사한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 가입하였고, 1927 10 18 일어난 장진홍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연루된 혐의로 형인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2가지의 사연들이 전해져오는데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 음을 '二六四'에서 나왔으며,이육사(李陸史) 고쳤다하는 설이며, 또다른 설로는 이육사가 일본에 대하여 저항운동을 하다가 잠시 검거를 피하기 위해 사촌형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사촌형 이종형도 역시 한학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사람이다. 이육사가 어느 사촌 형에게 "형님, 저는 "戮史"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그의 사촌 형은 잠잠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래, 뜻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쓰면 시를 발표도 못하고 당장 잡혀 간다. 하지만 ''字를 쓰라. 字는 우리 나라 옥편이나 일본 한자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중국 자전에는 '' 같은 의미로 쓰이니 이렇게 하면 너의 뜻도 이루어지고, 일본놈들이 모를 것이 아니냐"라고 충고해 줬다. 이것이 오늘날 <이원록> <李陸史> 불리게 사연이다라는 설이 있다. 또다른 필명으로 이활(李活) 있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 대구, 경성부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32 6 중국 베이징에서 만국빈의사에서 노신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다. 후일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한국내에 소개하였다.

1943 국내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 1 16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구금 순국했다.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 의해 출간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하의 그의 항일 투쟁활동과 일제 강점기 하의 詩作활동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금관문화훈장' 추서하였다. 그의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는 고향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육사 문학관' 건립되었으며 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안동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 명명하였다.

최 선 호 崔善豪

1939년 충북 진천 출생
 
저서
<바른 말 고운 말> 서울시교육연구원 1974
< 뜻 따라-육영 반세기> 샘터 1984
< 땅의 실수 하늘의 은혜> 신지성사 1999
< 무지개 따라 한 평생> 개척자사 2004
< 시편정해> 창조문학사 2006
< 하늘빛 붓에 찍어> 공저 창조문학사 2007
< 나의 엘로힘이여> 예영커뮤니케이션 2008
< 증보판 시편정해> 대한기독교교육협회 2009
< 노래 중의 노래> 비전사 2009
< 해외감리교목회자문학> 뉴욕 에이스 2010

경력
경동고교, 무학여고, 용산고교 교사
월드미션대, 미주감신대 교수 역임, 한국문협, 미주문협 회원
재미시협 고문, 기독문협 크리스천헤럴드 편집고문

수상
신인문학상 시, 평론. 기독언론인상
가산문학상, 기독문학상, 재미시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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