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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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평론 

문학정신다운 문학정신

 

 

성경(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말씀에 나타난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은 어느 한 가지도 문학과 무관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하셨으니 문학이야말로 덕을 세우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학은 반드시 덕을 세우는 일의 봉사도구여야 한다.

문학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문학 본연의 임무를 기울이고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향을 띄는 풍조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문학 자체가 가지는 바른 정의 내리기에 앞서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문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범하는 우를 방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인류역사의 문명에 낀 때라고 여기고 싶다. 이런 예는 인간들에 있어 얼마든지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문학의 본질을 본질 그대로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고 변질시키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성경(5:1-47)에 나타난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보아라. 물론 그는 예수께 병 고침을 받았지만, 베데스다 물이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을 믿고 자기가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는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 하면 될 텐데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고 구차한 말로 답을 하였다. 이는 병자가 자기의 본분을 이미 잊고 있는 증거이다. 자기의 본분은 "낫고자 함"인데, 38년간의 오랜 병에 찌들어 있기에 정신적인 불안(못에 들어가야 한다는)에 싸여 "낫고자 함"을 이미 잊고 있었다. 오늘날 문학을 보는 눈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글을 통한 감동으로 덕을 세우면 되는 본분을 잊어버리고 오랜 세월의 때가 끼어 문학의 본질 자체가 변질됨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5:14)고 하셨다.

필자의 의도는, 오랜 세월에 찌들려 분명한 역사의식을 희석시키고 문학의 본질조차 핀트를 맞추지 못한 상태를 점검하여 그 원래의 본질을 회복시키자는 것이다. 이에 뒷받침이 되는 예를 보임으로써 이에 따른 지혜를 더하고자 한다.            

자연이나 인생에 일어나는 사물에서 자연스럽게 정서를 구해 내는 문학이야말로 참으로 좋은 문학이다. 문학이 일정한 목적의식을 띄면 순수문학이 아니다. 기독문학이라 해서 치우친 목적의식을 가지면 안 된다. 그 자연스러움은 일반문학과 다를 바 없다. 물고기는 물속을 헤엄치며 살지만 새는 창공을 날며 산다. 이처럼 기독문학, 일반문학도 물고기와 새를 구분하듯 분별해 본다면 조금도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경건함으로 충만하다.

문학이면 문학이지 일반문학이니 종교문학이니 하는 용어 사용이 필요한 것인가. 종교문학이든 일반문학이든 문자로 표현된 정서의 산물이면 그만이다. 굳이 그것을 일반문학이니 종교문학이니 구분지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문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문학이 어떤 틀에 갇혀 있으면 그것은 이미 부자유한 문학이다. 그 갇혀있는 틀에서 초월해야 비로소 문학의 단계에 오르는 것이다. 틀에서 초월한 문학- 그 자체는 어떤 틀로 명명 되어서도 안 된다. 일반문학이니 종교문학 또는 신앙문학 등의 용어를 붙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기독교문학 불교문학이라는 용어를 곧잘 사용하고 있다. 이는 문학에 필요 없이 담을 치고 고삐를 매놓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어쨌든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고 보면 당장 떼어버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기독문학을 편협한 문학이라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편협한 사람이다. 그런 문학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독문학과 일반문학을 차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기독문학을 기독문학답게 제대로의 문학정신을 발휘하면 일반문학이 따르기 어려운 경지까지 그려내고 있음은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반문학이 하는 구실을 기독문학이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문학 또는 신앙문학을 일반문학과 동일시하지 못하는 문인이 있다면 문학에 대하여 그만큼 미숙한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문학이 일반문학에 비해 편협하다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이 할 수 있을지라도 일반문학과 신앙문학을 비교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일반문학과 신앙문학은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일반문학은 독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신앙문학은 자신의 신앙대상인 절대자와의 관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작가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 퍼 올리는 영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신앙문학이 편협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문학을 편협하게 보는 사람이 편협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다.

〈성경〉만으로 보더라도 시적(시가서), 소설적(서사적), 수필적(고백적) 요소를 띄고 있으므로 운문과 산문을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 성경에서 제재를 택한 작품으로 대표적인 것은 밀턴의「실락원」이나 센케비치의「쿠오바디스」등을 들 수 있다. 기독교 정신을 부각시킨 작품으로는 빅돌 유고의「레미제라블」, 찰스 디킨즈의「크리스마스 캐롤」, 존 번연의「천로역정」, 단테의「신곡」, 헤르만 헷세의「수레바퀴 밑」,「페터 카맨찐트」, 부르제의「제자」, 모리악의「테레즈데케이루」,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작품 이외에 존 스타인 백의「분노의 포도」등 적지 않은 작품들이 그 물결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인류 문학사에 길이 간직될 보화들이다

유대인 목사 가브리엘은 창세기를 주제로 담론을 하는 중에 "창세기는 우리 히브리인의 문학이야…"고 했다. 시성 괴테는 룻기를 성경속의 가장 아름다운 문학이라 극찬했고, 욥기에서 파우스트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존 번연은 룻기에서 천로역정의 주인공인 기독도의 인간상을 구상했고, 존 밀턴은 가장 현숙한 인류의 여인이 바로 룻이라고 격찬했다. 레오 톨스토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탕자의 비유"(15:11-32)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10:25-37)를 문학 중에도 훌륭한 소설적 요소를 갖춘 문학이라고 극찬했다. 황석영 작 제9회 대산문학상 수상 소설「손님」을 박미섭 박사가 히브리어로 번역 출간(2008) 했다. 이는 히브리어로 출간된 최초의 한국문학작품일 것이다.

기독문학의 뿌리는 헤브라이즘(Hebraism,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된 작품들: 구약성경, 탈무드, 탈무드의 주석 미슈 또는 미드라쉬)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히브리문학의 출발점은 단연 구약성경이다. 한국문학의 뿌리는 무속신앙에서 출발했다. 고대의 구지가龜旨歌가 그 첫출발이다. 그 후로 황조가黃鳥歌 또는 공후인箜篌引 , 서정적인 작품이 나타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삶의 애환이나 서경적 풍취가 그 주조를 이루어 오고 있다. 헤브라이즘을 뿌리로 해야 바른 기독문학을 이룰 수 있다는 판단이다. 헤브라이즘은 유대인의 사상으로 하나의 종교적인 주다이즘보다 훨씬 넓은 바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언어개념의 폭이 넓고 그 의미가 강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히브리인은 민족적 개념보다는 사회학적 개념이 강하다. 헤브라이즘의 중심은 유일신(구속사적) 사상, 헬레니즘은 플라톤의 이데아사상, 한국의 한사상은 무속적 제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본다(현대영성신학 중에는 한 사상을 유일사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1416세기에 있었던 Renaissance 이전의 문학은 Hellenism(현실 긍정, 향락 추구) Hebraism(현실 부정, 구도)의 두 사조뿐이었다. Hellenism의 사조에는 Homer(Homeros)의「Iliad,Odyssey, 소포클레스의 여러 비극들, 로마시대의 키케로나 베르길리우스의 찬란함이 배경이 되고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Hebraism의 결정체는「성경」이다. 성경이야말로 기독문예의 알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2)의「그리스도를 본받아」등도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그레엄 그린의 작품들도 기독문학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기독문예는 인류를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거나 절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문예를 말한다. 예술은 인간을 더러움에서 건지는 효능이 있다고 말한다.   

문학은 머리와 가슴 중에 가슴에 가깝다. 헬레니즘은 머리도 가슴도 동시에 필요로 하지만 헤브라이즘은 오직 가슴이다. 이론으로 따지지 않는다. 가슴으로 느낀다. 이것은 유일신 사상에 접근하는 지름길이다. 이는 헤브라이즘이 오히려 문학정신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엄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인 중에는 일반문학에 치중하는 수가 많음은 아직도 문학(기독문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기독문학에 정진하는 이들 중에는 섣부른 자세로 설익은 떡과 같은 작품을 내놓는 경향이 없지 않다. 기독문학은 어설프거나 설익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문학보다 더 앞서야 한다. 어려운 여건을 헤치고 기독문학의 명저들의 끊임이 없음에 감사를 드린다.

 "기독문인이 도달해야 할 경지를 구약시대의 선지자 반열(班列)로까지 생각하는 문인은 사이비 기독교문인을 거짓 선지자"라고까지 혹독한 말로 힐책(詰責)한다,

시인(詩人)은 시()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다. 의인(義人)이 의()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고, 악인(惡人)이 악()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듯이, 시인은 두 의미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로 형성된 말이다. 그러므로 시 다르고 그 시를 쓴 사람이 다르면 이치에 맞지 않다. 그 사람이 쓴 시에 그의 인품도 정비례해야 한다. 시에는 언제 어디서나 그 사람의 인생(詩人論)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훌륭하면 그의 인생마저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훌륭해야 그의 시도 훌륭하다.  

인간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에서 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은 하나님의 말씀 들음에서 오고 들음에는 문자로 읽고 묵상함도 포함된다. 이를 돕는 한 가닥의 오솔길이 기독문예의 구실이다.    

기독문예의 방해물로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탐미주의(포우의 영향으로 보들레르로 고조되고 오스카 와일드에 의해 꽃 피운 예술을 위한 예술), 칼빈(음악 외에 모든 예술 부정), 칼 바르트(문예적인 것, 인간적인 것 부정) 등을 들 수 있다. 칼빈이나 마틴 루터 등은 초기에는 문학을 부정하였으나 후에는 문학 특히 수사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기독문예에 해당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기독문예는 어디까지나 문예이다. 신학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천사를 묘사했을지라도 이미 문학이 아니고 신학이다. 인간세계를 떠나면 문학이 아니다. 문학정신은 인간탐구에 있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문학이 기독문학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허무도 아니다. 헤르만 헷세의「수레바퀴 밑에서」「페터 까멘찐트」등 기독문예로 인정되는 바는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 최고의 몫은 인간의 "놀라움"이다. 喜 怒 哀 樂 愛 惡 慾 뿐만 아니라 聖과 美에 대한 놀라움은 예술의 영역이지만 문학도 이에 속할 뿐이다. 이 놀라움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바다에 요동하는 파도이다. 바다를 이루는 물만으로 파도는 형성되지 않는다. 바람이 수면 위에 물살을 흔들어야 파도는 제 구실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만으로는 문학은 형성되지 않는다. 그 문자들을 뒤척이는 감동적 정서가 문자에 어울려야 문학은 탄생 된다. 그러므로 바다가 수많은 양의 물을 갖고 있듯, 문인은 수많은 어휘를 갖고 있어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감동과 정서에 나부끼며 살아야 한다.  

올바른 신앙을 위하여 신학이 있어야 하듯이 문학이 가치를 지니려면 그에 따른 평론이 있어야 한다. 문학은 예술의 한 분야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구약성경에 41 번의 아름다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후 "좋다"라고 하셨다. 이 의미를 바꾸어 말하면 '완전하다'를 의미한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한다. 이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하였다. 구약과 신약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비유하고 싶다. 구약은 아버지이고 신약은 어머니라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의 말씀(Word)의 원뜻이 여성명사임도 무관치 않다.

 프랑스의 서정 시인이며 상징파의 수령으로 알려진 말라르메(Mallarm'e St'ephane 1842-98) "불확실한 현대를 바른 길로 이끌 정신은 바로 시 정신"이라고 했다. 말라르메가 말한 시 정신은 건전한 시 정신을 두고 한 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치우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시 정신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인이 사용하는 잉크는 순교자가 흘리는 피에 비유된다. 오늘날 우리의 문학이 갖는 사명은 너무도 분명하고 너무도 위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를 망각하지 말고 오직  그 길을 가야만 문학정신다운 문학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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