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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평론□


기독교문학 창달을 위한 제언

                                                                     12-7-2009 재 교정 원고 

 

기독교문학이란?

 〈기독교문학〉이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는 인간의 문학적 소산을 말한다. 은혜를 받거나 성령님을 모시는 일은 순간적으로 성취 될 수 있지만, 문학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독교문학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그만한 환경과 그만한 역사와 또 그만한 생활에서 절절히 우러남으로써 형성되는 문학적 결정(結晶)이다. 기독교의 유일무이한 문학적 결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주신〈성경〉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문학의 창달이란 성경을 성경대로 확산시키는 일이다. 성경을 성경대로 전하지 못하고 인본적 사고를 가미하거나 가변적 자세로 대하게 된다면 기독교문학의 창달은 고사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축마저 허무는 결과가 될 뿐이다.

 "기독교에는 위대한 성경이 있으므로 성경으로 만족하면 되지 그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하냐"고 말할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성경 중심의 기독교문학은 그 질과 양을 더해 갈수록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인간 모두에게는 커다란 복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기독교문학

 서양문학의 바탕을 이룬 줄기를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Hellenism과 Hebraism이 그것이다. 간단한 예로 예수를 메시야로 부르는 것은  Hebraism의 반영이고,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Hellenism의 반영이다. 굳이 따지자면〈성경〉은 이 두 사조 중에 헤브라이즘에 속하고, Homer의 서사시 「Iliad」나 「Odyssey」와 소포클레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삽포의 작품 등은 헬레니즘에서 우러난 문학이다.

〈성경〉만으로 보더라도 시적(시가서), 소설적(서사적), 수필적(고백적) 요소를 띠고 있으므로 운문과 산문을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 성경에서 제재를 택한 작품으로 대표적인 것은 밀턴의 「실락원」이나 센케비치의 「쿠오바디스」 등을 들 수 있다. 기독교 정신을 부각시킨 작품으로는 빅돌 유고의 「레미제라블」, 찰스 디킨즈의「크리스마스 캐롤」, 존 번연의 「천로역정」, 단테의 「신곡」, 헤르만 헷세의 「수레바퀴 밑」, 「페터카맨찐트」, 부르제의 「제자」, 모리악의 「테레즈데케이루」, 기독교 고독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작품 이외에 존 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 등 적지 않은 작품들이 그 물결을 이루고 있다.

 앞서 말한 Hellenism과 Hebraism은 Renaissance 이전의 사조들이다. Renaissance  이전의 문학은 중세문학으로써 창조성이 희박하여 제작풍(製作風)의 작품들이었으나 Renaissance 이후부터는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여 작가가 신과 동일한 창조적 위치에서 작품을 생산하였으므로 작가를 Creator라 일컫게 되었다.  

 Hellenism은 그리스 정신의 문화주의로서 현실을 긍정하여 육적, 향락적이며 인간 중심으로 이성을 추구하는 인도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반면에 Hebraism은 현실을 부정하고 영적, 극기적 경향을 나타내며 내세를 추구하는 도덕적 윤리적 성향으로 인류의 해방을 선언하고 유대교의 맥을 이룬 사조로써 히브리 민족정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편 등, 성서문학을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세 스콜라 시대의 아우그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토마스 아켐피스의「그리스도를 본받아」 등의 작품도 Hebraism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다.

 한편, 기독교문학의 초점을 흐리게 한 사조로는 탐미주의를 들 수 있다. 이 사조는 예술을 위한 예술지상주의로 에드가 알렌 포우의 영향을 받아 보들레르에 의해 고조되어 오스카 와일드에 의해 꽃을 피웠다. 또한 프로메테우스의 문학이라는 바람이 불어 문화 창조를 위하여 영웅적 투쟁을 하는 강렬한 의욕을 소유한 문학이 나타나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 있으므로 기독교적 요소가 부각되기 어려워지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니이체의 "신은 죽었다", 장 폴 싸르트르의 "신은 사망했다"는 등의 외침은 기독교적 요소를 희석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John Calvin은 음악을 제외한 모든 예술을 부정한다고 했고, 칼 바르트는 인간적인 것, 문예적인 것을 모두 부정한다고 했다. 이런 이롭지 못한 요소들 속에서도 기독교문학은 시들 줄 모르고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경륜과 인간의 믿음에 달린 것이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을 구원의 길목에까지 안내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문학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기독교문학의 불모지보다는 기독교문학이 찬란한 빛을 비취는 시대와 그 지역을 하나님은 더욱 사랑하신다.

 서양에서의 현대 기독교문학은 계몽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를 바탕으로 한 산물로 특히 낭만주의 시대에 재발견되어 매우 적극적으로 유럽문화에 동화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Hohoff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콘스탄틴 황제 때로부터 바로크 시대 초기까지의 유럽문학이 기독교적이었으며, 기독교문학에 대한 질문은 유럽문학이 기독교에서 벗어난 때로부터 대두되었다. 기독교문학은 문학의 순수한 정신과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기독교적 주제와 명제를 다른 주제와 명제로 대치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의 주제는 교권적 기독교로부터의 해방된 이성을 가진 인간이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성공회와 장로교회에 도전하려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수세기 동안 계속하여 대결하는 동안 과학과 문학이 기독교로부터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기독교문학에 투쟁정신을 심어 주었다. 유럽에서의 이러한 대결은 문학을 희랍사상과 로마정신에 나타난 숭고한 문학에로 복귀하려는 의도와 직결되었다.

 프랑스는 문학운동을 통해 가톨릭의 갱신이 시작되었다.

 T.S. 엘리옷트, 그레엄 그린은 그들의 시문학적 서술에 성공하였다. 기독교문학은 죄악에 찬 도시와 선한 농촌에 대한 테마에 문학성을 제한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룻소의 예찬과 민주주의 적이거나 무정부주의적인 자유의 원리까지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도시의 죄악상을 드러낸 소설의 대중적인 전신인 기독교적 농민소설에서 농민들은 그리스도로서 나타난다. 독자들은 이런 소설에서 민속신앙, 기독교적-이교도적 자연숭배, 현대 활력론과 과학적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이 현저하게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적으로 고풍의 언어로써 연대기적으로 양식화된 소설은 소위 많은 작가들이 실패한 신낭만주의의 우상이었다. 또한 기독교문학은 의도적으로 17세기의 찬송가 가사를 이용하였다.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여 그 새로운 방향으로 가기 위해 모든 전통적 가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은 그 만큼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안 믿는 인간이 비극적이라고 보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안목에서 보면 이데올로기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낭만주의 태동 후에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시인들은 모든 민속적인 전설에서 벗어나서 냉철한 분위기로 아름다운 시들을 이해하려 했다. 가톨릭 화 된 낭만주의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작가들의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고전주의와 동일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현대 조형예술이 실패한 것은 감성과 순수한 경건이 결핍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문학과 순수문학은 서로 친화관계에 있다고 문학관을 가진 약간의 문인들은 기독교와 문학의 경계선에서 활동했다. Paul Claudel 과 Paul Val'ery, Rainer Maria Rilke 와 George Trakl, T.S. Eliot, Ezra Pound 등이 그 대표적 작가들이다. Thomas Mann, Willian Faulker도 포함될 수 있겠다.

 문예부흥 이전까지에는 문학을 종교와 대립되는 대상으로 오인하여 문학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요물로만 알았다. 문학은 '악폐의 유모, 탕자의 어머니'란 말도 있지만 문예부흥 이후로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 바뀌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복음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인간 중심의 사고가 싹트면서 문학의 지평이 신 중심과의 종적관계에서 횡적 관계로 넓어지기 시작했고 복음은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연관성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을 이루었고, 점진적으로 미의 탐구에서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신의 문제까지 포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과 문예부흥 이전에는 문학을 대립의식으로 보아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사고가 있었으나 점진적으로 바뀌어 문학과 종교와의 협력관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Samuel Johnson 이후로 하나님을 칭하던 Creator란 용어를 인간에게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작가는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돌이켜 보면 14세기 말-16세기 초까지 일었던 문예부흥이나,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1789년의 산업혁명, 동 ․ 서양의 여성해방 등도 문학의 힘에 의해서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문학

 우리 민족 반만 년 역사에 기독교문학은 과연 어떤 것인가? 어느 시대, 어디에서 누가 기독교문학을 형성했는가? 눈을 비비고 보아도 우리민족의 문화 속에는 기독교문학의 이렇다 할 모습을 찾을 길은 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정신이 역사의 심장에 배어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의(義)를 찾기 위한 민족의 얼이 담겨진 신앙문화를 통해 대를 이어 무한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렇다 할 기독교의 신앙적 소산이 없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신앙의 선각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 당한 예는 있을지라도 민족적 정서가 기독교 신앙을 도외시 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은 없다.

 그 시대의 사상과 감정, 생활을 반영하는 문학을 통해 그 시대를 알 수 있듯이, 우리민족 정신사를 반영하는 문학을 통해 살펴볼지라도 이런 신앙심이 배어 있는 기독교적 결정체는 아직 찾을 길이 없다. 영원에로의 확실한 연결도 없다. 다만 주술적(呪術的)인 노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나 충(忠), 효 (孝), 예(禮) 또는 자연(自然)이나 세상살이에 맺힌 한(恨) 등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을 뿐,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현대로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표방하고 나오는 작품이 더러 선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정도를 가지고는 기독교문학의 형성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 기독교문학의 현주소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문학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종적(縱的), 수직적(垂直的)인 문학이라면 우리의 문학은 자연이나 인생살이의 애환에 얽매어 있는 횡적(橫的), 수평적(水平的)인 문학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 민족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위치는 그 터가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런 신앙문화의 황무함 속에 사는 우리가 무작정 민족복음화를 외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안타까움을 해소하는 선행조건이 바로 기독교문학의 몫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계에는 쏟아져 나오는 문학의 양은 많으나 기독교문학의 싹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렇다 할 대표적 작품도 구하기가 힘든 상태에 있다. 이는 마치 홍수사태 중에 물은 많으나 정작 마실 만한 시원한 물 한 모금을 구하기가 어려운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긴 하지만 한편 한국문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바도 아니다.

 한국은 기독교보다 불교, 유교 또는 선교의 영향으로 오랜 역사가 꾸며져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문학'이란 역사나 개념 또는 그에 걸 맞는 대표적 작품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학형태, 그에 따른 문학사가 제대로의 형성과정에 이르려면 그만한 세월을 겪지 않으면 역사와 사상이 배어들지 못 하기 때문이다. 불교나 유교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대가 오래일 뿐 아니라 우리 생활과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기독교 문학이란 개념은 아직 한국문학사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은 유, 불, 선을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를 이루어 왔고, 유, 불, 선이 판을 치는 바탕 위에서 기독교는 정통종교가 아닌 이방종교의 입장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는 거의가 기독교 문화권에 들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문학적 요소가 다양화되어 있지만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아직도 불교나 유교 문화권이 강하기 때문에 '기독교문학'이란 용어를 내세워서 개념정립부터 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고 본다.

기독교문학으로 신앙승화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인간들로 하여금 정확무오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정서적으로 승화된 문학작품이 바로 기독교문학이다. 기독교문학의 창달이야말로 민족복음화를 위한 지름길인 동시에 인류 자손만대에 믿음의 고리를 이어주는 삶의 젖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자면 먼저 성경을 바로 알고 바로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를 구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경말씀을 문학구조물로 정서화 하여 사람들 마음속에 들여앉혀야 한다. 말씀을 통한 인간의 감동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닮아야 하고 불후의 명작, 그 이상의 감동을 갖도록 창작되어야 한다. 이 일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앞장 설 사명인 동시에 특히 교회와 기독교기관에서 모든 분야에 걸쳐 연구 · 개척해야 할 중대한 과제이다. 지금 시작한다 해도 먼 후일에나 빛을 보게 될 일이겠지만 기독교문학의 창달이야말로 <종교개혁>에 못지않은 신앙적 승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기독교문학의 주제

 예술의 한 분야인 문학은 인간의 감동을 바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여 인간을 정화시키는 언어예술이다. 넓은 의미의 문학은 문자로 표현된 모든 것뿐만 아니라 말(口頭)로 표현된 것들까지를 들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문학이라면 좁은 의미의 문학, 즉 예술적 창조성을 갖는 문자언어의 표현-시,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문학을 통한 개인적 욕구나 기호, 또는 시대적 지역적 요청에 따라 특수한 경향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경향문학처럼 일정한 목적 내지 주의 주장을 향하여 독자의 의지를 움직이려는 문학-해양문학, 농촌문학, 전쟁문학, 정치소설(문학) 등-이 이에 속한다. 이것들은 그 작품세계가 차지하는 시간 또는 장소에 따라 그런 방향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이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문학이라는 개념은 앞의 것들과 같은 계열에서 취급될 수 있는 개념과는 다르다. 해양문학, 농촌문학, 전쟁문학 등은 시간과 공간, 즉 그 작품의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이 붙여진 이름이지만 기독교문학은 시간, 공간의 특수성이나 제약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그 작품이 주는 감동의 미적 창조가 기독교적이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쓴 작품이라 해서 반드시 기독교문학은 아니다. 비 기독교인이 썼을지라도 기독교 정신이 나타나면 기독교문학이 될 수 있다.

 독일의 문학 비평가인 Cult Hohoff 박사는 "Was ist Christliche Literatur? 기독교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저서를 통해 "문학에서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소재적이거나 주제적인 상태이지, 어떤 형식적인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기독교문학은 주제적 상태만으로 기독교문학의 특징을 삼고 싶은 것이다. 소재적 상태라는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Hohoff 박사의 말 가운데 "소재적"이란 부분을 삭제했으면 보다 나은 이론이 성립되리라 생각한다.

 기독교적 주제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기독교문학이란 문학예술의 진실성으로 기독교의 본질적 이치와 신앙의 감동적 창조문학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성경을 통한 하나님 말씀의 중심은 인간을 향하신 무조건적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John 3:16, KJV).

 이 말씀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아가페)으로 믿음을 통한 인간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말씀이다. 이토록 순수한 기독교정신을 외면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적으로만 추구하려 할 경우 그 방향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파나 교단에 따라서는 신앙일변도나 광신적 본질에 사로잡혀 아전인수 격이 될 우려도 없지 않다. 한편 학문적으로만 이해하려 할 경우, 기독교는 비합리적인 세계관 내지 특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것이다. 기독교문학은 기독교 정신을 작품으로 승화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하고 인간 삶의 현장에 파고들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반열에 오르도록 하며, 은혜, 기쁨, 평안, 위로, 회개, 소망을 안겨주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Hohoff 박사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교만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해서 감동을 통한 정화를 목적으로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다. 문학이 종교의 차원을 감당하기는 불가능하나 기독교문학을 통해 징검다리처럼 믿음의 길로 안내하는 구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기독교문학의 본질

 Hohoff는 "기독교문학은 현대인의 종교적 충동을 자극하고, 서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급진적 세계성과 절대적 신앙을 종합하기 위하여 복음을 뒷받침해 주며 바울과 요한과 그 후의 천여 년간 논쟁이 되어 온 신학에 관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독교 정신을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현대인의 사랑과 신앙은 기독교문학의 이런 노력에 달려있다.

 세속적인 세계관과 성서적 신앙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곳에, 그리고 신앙에 대한 모든 역사적 편견과 의식들을 벗어버리는 곳에 아마도 참된 기독교문학의 새로운 본질이 있을 것이다."라고 결론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성서문학

하나님께서 감동하심을 인간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성경 66권 가운데 특히 구약성경에 나타난 39권을 살펴보면 율법서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5권을 들어 5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를 포함하여 6서(六書) 또는 6경(六經)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여호수아서는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에스라, 느헤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더 등과 함께 역사서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문예서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꼽는데 그 중에 잠언과 전도서는 수필적 요소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잠언은 문장이 재치가 있을 뿐 아니라 지혜적 요소가 풍부하고, 전도서는 사색적 요소가 다분하다. 예언서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을 친다.

 성서에 나타난 시(聖詩)로는 시편, 아가, 예레미야를 들 수 있는데 이 3 책들은 각각 완전한 시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출애굽기 15장에 이스라엘의 승리를 읊은 미리암의 노래와 사사기 5장에 나타난 드보라의 노래는 산문 속에 끼어있는 시편들이다. 욥기도 시작과 결말은 산문체로 되어 있으나 중심부가 운문으로 되어 시적으로 극시(劇詩)의 요소를 나타내 보인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창세기(37:1-50:26)에 나타난 요셉의 역사기록이야말로 온전한 소설이다”라고 했으며, 독일의 시성 괴테는 “룻기는 가장 아름다운 목가풍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소설적 요소의 대표적인 예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와 “탕자의 비유”(눅15:11-32) 등을 들 수 있다.

성서와 일반문학             

 일반문학의 훌륭한 작품의 출현이 있다고 해도 그 작품을 성서와 같은 위치에 놓을 수는 없다. 엄격히 말하면 성서도 문학의 범주에 속하긴 하지만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말씀이고, 인간 창작의 문학작품, 특히 기독교 문학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감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낙원, 또는 쿠오바디스, 레미제라블, 부활, 죄와 벌 등이 명작이라 해도 성서와 같은 위치에 놓을 수는 없다.

 필자는 이에 대한 예를 막 9:2-13, 마 17:1-3, 눅 9:28-36에서 들어 보이고자 한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갈릴리를 떠나시기 조금 전에, 죽으시기 약 4개월 전에 헬몬 산에서 있은 것으로 생각된다. 산상에서 변화하신 목적의 하나는 앞으로 고난의 날에 충격을 받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신성을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의 신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모세,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사실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님은 신성(神性)이 있으셨으나 엘리야, 모세는 없었다. 성서와 일반문학과의 차이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학일지라도 어디까지나 성경이지 인간의 문학과 동일시해선 안 된다. 인간문학의 바탕은 인간의 감동에서 온 것이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인간의 문학과 성경은 그 터가 완전히 다른데 있다.

기독교문학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

 첫째로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라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감동에서 오는 재미와 흥분에서 오는 재미가 그것이다. 이 둘 중에 흥분에서 오는 재미가 아니라 감동에서 재미가 오도록 해야 한다. 흥미 위주의 작품은 인간을 흥분시킬 수는 있으나 감동시키기는 어렵다. 흥분은 감동과 같이 인간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학, 특히 기독교문학은 감동적 재미를 느끼도록 창작되어야 한다.

 둘째, 자연스러운 완성에 도달해야 한다.

 기독교문학이라 해서 억지로 뜯어 맞추는 식으로 부자연스럽게 목적에 도달하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자연스러운 완성이란 광고나 선전, 또는 무엇을 보이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의 의식세계에 목적을 두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존재의식과 무의식 세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아가페적 사랑 창조의 발견에 두어야 한다.

 셋째, 기독교문학이 성서적이라는 오해로 어느 경우라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모방적 요소는 탈피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을 모르는 이는 기독문학인이 될 수 없거니와 또 되어서도 안 된다. 기독문학인은 성경의 핵심을 알며 영적 생활을 하는 이라야 한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천국열쇠까지 받은 수제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주님으로부터 '사단'이란 책망을 들었고,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한 사실은 베드로 자신에게 성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절대로 가치관이나 신앙관의 혼란이 없었다.

 기독교인으로, 글만 쓴다고 기독문학인이 아니라 믿음의 반열에서 인생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수많은 소재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의 대변을 위해, 이단 퇴치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문학적으로 정서의 승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기독교문학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기독교(박애사상)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의 위험이 따르게 된다. Paul Tillich는 그의 기독교 예술론에서 모든 예술은 신의 문제, 인간존재의 문제에 궁극적인 관심사를 포용토록 권장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술인들은 신과 인간과의 사이에 사랑의 연결고리를 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가장 좋은 무기가 예술임을 실감케 될 것이라 했고, Hazelton은 “우리가 쓰는 말은 찬양이 되어야 하고 문학은 복음에서 나타나는 죄, 용서, 회개, 사랑, 성령, 구원, 성삼위 일체, 성만찬 등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프랑소아 모리악은 "나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글을 쓴다. 인간이 지니는 모든 악과 어두움을 파헤치지만 그 어두움 속에 비치는 한 가닥 구원의 빛을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넷째, 기독교문학의 가치발현을 해야 한다.

 문명의 이기가 토해내는 문화적 산물은 불철주야 홍수사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가령 , 예술분야의 종합예술인 영화나 연극은 물론, 단일예술의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조각, 공예, 건축 등, 전반에 걸쳐 이들의 영향으로 인류는 흥건히 젖고 있다. 그에 따른 주제는 거의가 “사랑”이다. 시,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음악이나 미술 등에서도 사랑을 표방하고 있다. 라디오, TV, 각종 출판물에 실리는 내용까지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언제 그칠지 모르는 장마로 인해 일반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홍수사태와 다를 바가 없다. 소나기를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져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흘러간다. 이는 마치 문명의 이기로 폭발되는 사랑사태와 같다. 이와 같이 사랑을 표방한 문화적 산물은 많으나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기란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을 찾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참사랑은 기독교정신에서 우러난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사랑의 사태가 폭포를 이루지만 정작 참 사랑을 만나보기가 매우 어렵다. 진정한 사랑이 후미져 있는 현실의 비탈길에서 과연 인류는 진정한 사랑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토록 시급한 상황인데도 기독교예술은 일반예술에 비해 다양하지도 않고 심오하지도 못하다는 그릇된 가치관이 오늘을 병들게 하고 있는 원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정작, 기독교예술을 일반예술보다 편협하다고 보는 그 사람이 오히려 편협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옳다. 모름지기 기독교예술은 일반예술의 뒷자리에 처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 예술은 일반예술보다 우위에서 끊임없이 인간을 감동시켜 은혜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헨델의 메시야 중〈할렐루야〉가 울려 퍼질 때 청중들이 왜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이것은 기독교적 존엄성, 위대성, 거룩성과 장엄함이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할렐루야〉말고, 일반예술 그 어느 예술이 언제 누구를 어느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던가?〈할렐루야〉가 지니고 있는 문학성과 음악성은 일반예술이 따르기 어려운 고귀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만으로 보더라도 기독교예술은 일반예술이 따르지 못하는 신비, 오묘, 장엄, 거룩을 수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은혜와 사랑으로 인간을 감동시켜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예술이야말로 무한의 감동세계로 인간을 안내하는 위대하고 장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 기독교 문학은 선교와 목회에 적극적인 봉사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모질게도 수많은 죄악이 깔려 있다.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는 죄성(罪性)들을 녹여내는 뜨거운 감동적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조명하며 찬양하므로 세상을 아름답고 새롭게 하는 작업의 끊임이 없어야 겠다. 작가의 인생관은 통속적이 아니고 우주적이고, 박애사상의 역사를 통찰하는 예지가 들어있어, 이를 사역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노발리스는 "시인은 영적 지도자의 사명을 져야 된다."고 했다. 이 직분은 목회자들이 져야 될 직분이다. 바꿔 말하면 목회자는 시인과 같은 심성을 지녀야 인간을 따뜻하게 이해하고 영적인 설교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상 최초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인간과 자연을 가장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말씀하셨던 영적 시인이었기에 그 분을 닮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쓸 수가 없다.

 오늘날 기독교 문인들에게 막중한 사명이 있다.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우주관, 세계관, 인생관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작가로서 성숙하지 않은 채 복음전파의 의욕만 가지고 글을 쓰면 설교문이나 선전문구로밖에는 안 되어 독자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된다. 아무리 재주 있게 썼다할지라도 작가 자신의 기독교적 밝은 눈이 뜨여있지 않으면 영적 감동은커녕, 오히려 기독교를 오도할 우려마저 없지 않다.

 문학을 사랑함은 인간을 사랑함이다. 글을 쓰는 일은 Logos와 대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인은 이 시대의 지팡이이다. 그러므로 문인은 위대하다. 문인이 없는 세상!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삭막하다. 외롭고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러므로 문인은 문인다워야 하고, 글다운 글을 지어내야 한다. 더구나 기독교 문인들에게는 더욱 막중한 사명이 있다.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우주관, 세계관, 인생관을 가져야 이 사명에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우리의 교구이다. 여기에 기독교문학 내지 기독교 문화의 확산이야말로 세계복음화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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