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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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평론>

 

인생과 자연의 파수꾼
-조옥동 시인의 시 세계-

 

 


   시를 사랑함은 인생을 사랑함이다. 시를 짓는 일은 로고스와 대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는 생명의 근원적 영혼의 울림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당대와 새 세대의 지팡이이다. 시인이 없는 세상!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삭막하다. 쓸쓸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언어와 제도와 풍습이 다른 이민광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 없이 절실하다. 이민의 삶에 부닥치는 무수한 고통과 역경을 가슴으로 안아내면서 조국을 사랑하는 충정(衷情)으로 모국어를 갈고 닦아, 우리의 꿈과 현실을 아름다운 정서로 승화시켜 감동으로 밝혀오고 있는 여러 시인들이 있다.

 

   현재 미주에서 수필가 · 시조시인으로도 맹활약을 하고 있는 조옥동 시인은 수년 전 「여름에 온 가을 엽서」제하의 시집을 냈다. 조병화 시인은 그 시집 서문에서 "1960년대 초, 조선 · 동아일보 학생시단에 여러 번 자리를 차지했고, 그것에 좋은 평을 받은 만큼 시에 대한 솜씨도 있고, 그 시의 경험도 있는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지금 UCLA 의과대학 생리학 연구실에 근무하면서 계속 시작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 인생 자체로서도 매우 훌륭한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치하했다.


   조옥동 시인은 화학자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가 토해내는 시들은 화학작용 이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단활동에도 남다른 역량을 보여 이민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나무는 옷을 벗는다
   추운 겨울엔

   풍요의 겉허울 지우려
   모든 것을 버리고 알몸으로 돌아서는
   순수의 계절
   부끄러움은 없다

   하늘보다 높게 날던
   겨울새 떨어지는 허공은
   바람도 헤엄쳐 다니는 겨울바다
   나목(裸木)은 수초가 되어
   몸을 헹군다

   -후략-
                                      「겨울나무」에서  
  
    집안의 시간을 밖으로 바깥 시간을 안으로 나르며, 하루를 드나드는 망각의 문 밖에서 만날 만한 사람 만나보고 쓸만한 물건 만져 고르는 작은 즐거움 속에, 발끝에 묻어 배회하던 하루, 햇빛 졸다 떠난 나뭇잎 언저리에 얇은 베일 덮어주는 저녁 시간 방안에 들어와 휴식의 손을 잡으면, 주머니 속에 묻어온 세상 물정이 시끄러워, 도로 갖고 온 진실은 시든 장미보다 허약하게 떨고 있다.            
                                           -「어느 하루」의 전문

   「겨울나무」는 순수를 생명으로 하고 있다. 인간은 슬픔을 당할 때 더욱 순수해지기 마련이다. 평소에 마땅치 않던 것들까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모든 욕심까지도 버리게 된다. 봄부터 가을까지 성장세를 누리던 나무가 겨울이 되자 옷을 벗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알몸으로 돌아섬으로써 부끄러움을 맑게 씻어낸다. 더구나 겨울바다에 수초가 되어 몸을 헹구기까지 한다. 내일이면 잉태할 새 생명을 보듬고. 이 얼마나 순수해지는 노릇이냐? 결국 겨울나무는 조옥동 시인 자신이면서 우리 인간 모두를 이입시킨 대상이다. 겉과 속을 맑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청결함에 마음이 끌린다. 이런 자는 분명히 천국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어느 하루」도 순수, 즉 진실을 생명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앞의 겨울나무와는 그 터치가 사뭇 다르다. 우선 형식과 소재부터가 다르다. 산문율 위에 일상적 소재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순수와 진실을 추구함에는 「겨울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일상의 삶을 아기자기한 표현으로 잔잔한 감동을 번지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끝 부분에서 "진실은 시든 장미 보다 허약하게 떨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보고나 설명이 아니다. 엄청난 절규가 아니면 처절한 신음이다. '진실이 이렇게 약해빠져서야 되겠느냐'고. '진실이야말로 무엇보다 강해야 한다'고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겨울나무」와 「어느 하루」는 서로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자는 자연을 소재로 했고, 후자는 일상을 소재로 했으므로 대비적 위치에 놓여있어서 마치 우방의 깃발을 맞들어 흔들고 있는 것처럼 서로 돋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마다 빗장을 걸고
   눈으로만 바라보는 세상
   표정을 지운 얼굴 위엔
   어설픈 가면을 쓰고
   배냇짓 몸짓은 벌써 잊고 산다

   산다는 일
   연민의 돌부리에 채이며 아프게 가는 길

   허기보다 무서운 갈증에
   잠겨진 마음마다 열어 줄
   열쇠를 만들고 싶다

   -중략-

   눈과 눈이 마주쳐
   서로의 마음을 이어내는 가느다란 빗줄기로
   너와 나 열쇠고리 매달고

   가만히 웃으며 흔들고 싶다
                                      -「열쇠를 만들고 싶다」에서

   슬퍼할 시간이 없다
   위로할 시간이
   기뻐할 시간도 없다

   -중략-

   가속을 매다는 스트레스 밧줄 위에
   숨찬 곡예사의 창백한 얼굴 얼굴들
   머물러 쉬어갈 영혼의 식탁에
   함께 손잡을 믿음이
   신앙이 그리운 시대
                                      -「인색한 시대」에서

   전자와 후자 역시 그 주제가 상통하고 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마음상태를 매질하면서 그 치유책을 제시하고 있다.  전자는 '열쇠', 후자는 '신앙'을 갈구하고 있으면서 '열쇠'와 '신앙'을 그 치유책으로 삼으려 한다. '열쇠'는 은유적 표현이면서 '신앙'은 원색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열쇠'와 '신앙'은 같은 이미지이다. 즉 양심, 질서, 진실, 성실, 봉사, 사랑, 은혜…, 이런 것들은 참다운 신앙에서 얻어지게 마련이고, 참다운 신앙에서 얻어진 것으로라야 인생을 행복하고 보람있게 열고 나갈 수 있는 열쇠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옆으로 접어 내린 세월
   억 겹으로 쌓인 고뇌는
   살과 살이 으스러져
   뼈와 뼈로 포개 얹고
   포효하는 계곡  
   밝은 대낮에도 발갛게 피가 흐른다

   전설을 쌓으며
   천년의 침묵을 다스리는
   신비의 그림자
   시지프스(Sisyphus)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역사의 한을 눈으로 읽는다

   통한의 설움도 입술로 깨물고
   깊게 도려낸 아픔의 자리

   얼어붙은 인고의 언덕에서
   지평을 흔들며 흠모하던 질서
   앙상한 화석으로 태초를 본다

   고통의 응어리
   알알이 점 이어간 밀어는
   심연 속으로 함몰되는 분노의 메아리
   말을 잃고 돌아서는 순례자

   벼랑에 서서
   석비(石碑)의 아픔을 닮아가고 있다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의 전문

   태고의 마을엔
   하늘과 오직 하늘을 열고 일어서는 무거운 기암들

   -중략-
   매달린 자국마다 깊게 패여 내민
   찢겨진 손톱끝

   -중략
   조그만 돌멩이로 굳어지는 순례자
   굴러 떨어지며 부딪히는 끝
   모서리마다 침묵으로 다듬는
   거룩한 시온성 닮아 갈
   인고(忍苦)의 성(城)
                                 -「자이언 캐년(Zion Canyon)」에서

   -전략-

   사랑이 모래로 날리는
   메마른 인정 황막한 사막에서
   돌아서는 세월의 옷자락 붙잡고
   서성이는 영혼
   머무를 그 종착역
   어디쯤 있을까?
                                      -「팜트리(palm Tree)」에서

   자연은 보이는 심령, 심령은 안 보이는 자연이란 말이 있다. 조옥동 시인은 자연을 자신의 심령세계에 불러들여 지극한 애정으로 감싸줌으로써 죽어 있는 자연까지 살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조옥동 시인을 통하여 죽어서 오히려 살아난 자연들은 만나게 된다.


   「그랜드 캐년」은 그랜드 캐년을 가 본 사람만이 감동을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조옥동 시인은 엄연히 죽어 있는 이 엄청난 자연을 의인화하여 설려내 놓고, 생명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역사적 사실까지를 부둥켜안고 "벼랑에 서서 석비(石碑)의 아픔을 닮아가고 있다"면서 자신도 자연의 일부가 되면서까지 뜨거운 가슴으로 지극한 애정을 퍼내고 있다. 여기서 자연에의 원대한 사랑을 넉넉히 만날 수 있지 않는가! 이렇듯 예시한 「자이언 캐년 」이나 「팜트리」도 「그랜드 캐년」과 같은 이미지에 접근해 있음을 보게 된다.

   목마른 바위들 날카로운 모서리 세상 물살에 담그고 모래 틈의 부드러운 감촉을 읽는다.
                                            
  살갗이 성을 내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어느 무덤의 바닥에서 체험한 무서움 털어 버리려, 차게 굳어진 육신을 받쳐든 돌멩이 그보다 차갑고 냉랭한 의식(意識)의 앙금들, 태워 불살라 버려도 타지 않고 응결된 그을린 낱말의 의미를.

    미움과 사랑으로 나누어 흐르는 영원한 두 줄기 강물 속에 작은 섬 하나씩 배처럼 띄우고 집착과 오기로 넘나든 세월의 두 그림자, 굽이굽이 절벽에서 구를 때 키리만자르의 갈라진 암벽을 울리며  굴러 떨어진 절망의 때보다 더 절망할 영혼들 깊이 묻어두고, 이름만 빠져 나온 하얀 비석들.

   죽은 자 안에서 살아남은 역사 그것이 두렵다. 발목을 상실한 제 그림자 뒤에 업고 또 다른 세월의 모래 틈에 묻혀 영원히 서 있을, 죽어버린 의식들의 무저항 행진…

                          -「살아남은 역사 그것이 두렵다」의 전문

   검은 허리에 온 힘을 매달아 달린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 벌판을

   어둠이 모든 것 삼켜도
   감추지 못하는 것
   소리, 소리들…
   칠흑 속을 송곳질한다

   길게 허리 눕혀
   부끄러움 가득 차 실려 가는

   어둡고 긴 상여(喪輿)
   오늘을 목놓아 전송한다

   나를 떠난 나의 소리
   메아리로 살아나는 모퉁이다
   달려 온 길 가쁘게 내일이 밀려들고
   차가운 평행선 위엔

   지난밤의 얘기들로 끝없이 길어지는 세월
   가까운 것들 떠나고

   먼 것들 다가와 다시 또 멀어지는
   우리 모두의 귀로에서
   만장으로 펄럭이는 인연들

   어둠은 어느 곳에나 있다가
   아침이면 사라져도
   너와 나의 소리는
   영원히 바람으로 실리는
   버림받은
   사랑이다
                                「어둡고 긴 상여소리」의 전문    
                                            
   인생은 대강대강 사는 것이 아니다. 또 그럴 수도 없다.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회계장부의 숫자보다도 더 정확한 존재로서의 움직임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어느 삶의 한 자락이라도 감출 수 없거니와 감추어지지도 않는다. 분명하게 존재하고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조옥동 시인은 치밀한 시각의 가늠자를 삶과 죽음 사이에 대어놓고 "살아 남은 역사 그것이 두렵다"고 설파하면서 "이름만 빠져 나온 하얀 비석들" 앞에 서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과 무관치 않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 그 이름이 남아 있다면, 또 이런 이름들만으로 무저항의 행진이 계속된다면 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두려운 일이겠는가. 따라서 조옥동 시인은 삶과 죽음 후를 번갈아 생각한 나머지 이런 사고(思考) 위에 칼같이 날카로운 낱말들을 동원하여 감성으로가 아니라 이성적 차원에서 인생을 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타포 속의 사물들을 의인화시킨 수법이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들어내고 있다.

 

   「어둡고 긴 상여 소리」는 죽음 후의 상황이다. 이미 구세대는 죽어 사라져 가고, 밀레니엄·새로운 천년이 도래했다. 구세대는 어둡고 긴 상여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오늘을 전송한다. 수런거리는 과거사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삶은 회한으로 남을 뿐임을 "너와 나의 소리는 /영원히 바람으로 실리는/버림받은/ 사랑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조옥동 사인의 인생을 보는 눈에는 매우 슬픈 빛이 감돌고 있다. 그것은 애정을 갖고 인생을 깊이 사유하기 때문이리라.

   곱게 접은 여백에 가을을 채색하여
   여름날 뜨락에 온 철 이른 소식에
   가슴 속 오솔길 하나 길을 내어 떠난다

   그리도 당당하고 오만한 웃음들
   뜨겁게 퍼붓던 신록의 그 너스레
   끝내는 돌아가는 길에서 부끄러움 숨기나

   흘러 간 구름으로 잊혀진 기억들
   네 색깔의 눈짓으로 다시금 살아나는
   빠알간 입술자국 찍혀진 여름날의 설레임
                                  
                                 -「여름에 온 가을엽서」의 전문

   수많은 동그라미 헤엄을 치며
   하늘나라 글씨를 쓴다
   투명한 마음속에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며
   무한으로 사라지는 작은 점 하나
   하늘 마음 색칠하고 나면
   부드럽게 휘어지는 간지럼 타는 나무 가지들
   사랑의 몸짓 말갛게 씻고 싶다

   바람이 펼치고 지나는 수채화를
   봄여름 고여서 우람한 산 숲을
   여울물 소리로 흘러가는 가을 하늘을
   무지개 빛보다 고운
   너와 나의 눈물과 웃음을
   하얗게 부수는 폭포가 되고 싶다
   천둥소리, 천지가 함께 우는소리가 되고 싶다

   가을 햇살 섧게 흐느끼던 잔물결
   수정으로 가라앉은 겨울 강
   얼음 살을 조각하는 끝 날로 서서
   흘러내린 뜨거운 영혼의 용암을
   산산이 쪼아내는 비수(匕首)의 그림자
   침몰한 시(詩)의 고향, 그 침묵을 녹이고 싶다
                                    
                                      -「빗방울 되어」의 전문

   「여름에 온 가을 엽서」는 매우 심미적인 영상을 한국의 전통적인 가락에 담았다. 그러므로 지극히 아름답다. "여름에 온 가을 엽서"라니, 지난 해 가을에 보낸 엽서가 올 여름에 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이 여름인데 올 가을의 엽서가 벌써 도착해 있다는 극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시간이나 계절이 뒤바뀐 게 아니라 생각이 앞질렀다. 이는 앞날을 예지하고 있는 조옥동 시인의 영감에 딸린 것이다. 마치 딸의 혼수를 장만하고 있으면서도 벌써 첫애를 낳고 있는 딸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맞는 표현일까?

 

   첫째, 둘째, 셋째 수가 모두 현재적 시간 위에 놓여 있다. 신록을 자랑하는 여름날 뜨락에서 벌써 가을냄새를 맡은 조옥동 시인은 심령 속으로 뻗혀 있는 가을의 오솔길을 걷고 있다. 이는 현재적 위치를 떠나 자유로이 떠도는 낭만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끝 부분에 "빠알간 입술자국 찍혀진 여름날의 설레임"의 압축된 표현은 '설레다'의 동사마저 명사형으로 하여 끝맺음을 하였으므로 탄력성마저 지니고 있어 감칠맛까지 더하고 있다. 마치 추한 것을 도려내는 예리한 칼날과 같이 눈부시도록 그 아름다움을 번득이고 있다.      

「빗방울」은 바로 조옥동 시인의 변신이다. '빗방울'로 변신한 조옥동 시인은 "하늘나라 글씨를 쓴다", "사랑의 몸짓을 말갛게 씻고 싶다"고 노래하는 사랑의 천사로 나타나고, "너와 나의 눈물과 웃음을/하얗게 부수는 폭포가 되고 싶다/천둥소리, 천지가 함께 우는  소리가 되고 싶다"고 노래하면서 이 엄청난 우주를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의 희노애락의  위로자 · 동반자로 우리에게 다가와 주고 있으며, "얼음 살을 조각하는 끝 날로 서서", "침몰한 시(詩)의 고향, 그 침묵을 녹이고 싶다"면서 사랑의 전령사·우주의 파수꾼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조옥동 시인의 시의 세계인 동시에 시인 자신이 갖는 개성이며 능력이다. 이런 자신의 영적 세계를 빗방울에 이입(移入)시켜 '빗방울'을 제목에 올려놓고 있으면서도 시 본문에서는 한번도 '빗방울'을 반복하지 않고 있다. 이것만으로 보더라도 조옥동 시인의 압축과 생략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평범한 시어들 같지만 이렇게 비단 여러 폭을 깔아놓은 듯 표현이 아름답고 짜임이 치밀하여 심미적(審美的) 분위기까지 북돋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얼음 살을 조각하는 끝 날로 서서" 바늘 끝처럼 뚫고 들어가는 "비수(匕首)"는 바로 조옥동 시인의 소장품이다. 조옥동 시인은 이 비수를 지팡이 삼아 세상을 살아간다고 보아야 하리라. 이것이 조옥동 시인의 생리이다. 과연 이 비수는 무엇일까? 어쩌면 조옥동 시인이 평생 버리지 못할 믿음의 절대자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시어들이 모여 각각 제 본분을 다하며 우리들을 마음대로 끌고 다니며 감동으로 사로잡는다.
 

  "…말갛게 씻고 싶다", "…우는소리가 되고 싶다", "…그 침묵을 녹이고 싶다"에서 물리적 · 영적 상황을 제공하고 있다.
1연은 시각적 효과의 진수성찬이요, 2연은 시각과 청각이 어울린 공감각의 세계요, 3연은 육적 감각과 영적 감각을  포함한 입체적 공감각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침몰한 시의 고향"의 부활을 소망하며 "그 침묵을 녹이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그 침묵 속에 깨어나는 하나의 작은 빗방울에서 이토록 큰 변화의 상상력으로 맑고 뜨거운 서정을 퍼 올리는 이 시인의 큼직한 두레박이 매우 부럽다.

   조옥동 시인의 시는 주로 순수, 진실, 신앙, 자연에 대한 애정, 사유된 인생, 그리고 영적 세계에 대한 심미적 승화 등으로 나타나 있다. 처녀시집 「여름에 온 가을 엽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의 요구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조옥동 시인을 '인생과 자연의 파수꾼'이라고 이름지어 부르고 싶다. 돈독한 신앙 속에 살면서 낮에는 화학자로, 밤이면 문인으로 변신을 하면서 남달리 문학에 뜨거운 애정을 갖고 스스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이 더욱 풍성해지고 있음을 고맙게 생각하며 제2시집을 준비하고 있는 요즈음 조옥동 시인의 시는 익을 대로 익은 오곡백과처럼 완숙한 경지에 이르고 있음에 큰 박수를 보낸다.                                               

                                                                                                                                       - 최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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