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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내 고향 진달래

2016.12.11 09:42

최선호 조회 수:86

 

 

내 고향 진달래

 

 


 어디에서나 진달래를 보기만 하면 내 가슴엔 옛 고향이 환히 열린다. 시간과 장소의 구분도 없이 선연히 떠오르는 고향. 30여 초가들이 옹기종기 자리한 아늑한 마을 앞에는 발가벗고 멱 감던 방죽과 맑은 내가 흐르고, 그 내를 건너면 확 트인 벌판, 가을이면 누런 황금 물결이 넘실거리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그 사이 논두렁길을 따라 사이다 병을 들고 물꼬마다 골라가며 송사리며 우렁, 메기, 붕어들을 건져 올리고…, 닷새마다 장이 서면 마을 어른들이 줄을 이어 장 길을 다투어 가시던 모습, 하얀 두루마기 차림의 행렬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뒷동산에는 꽉 들어찬 소나무와 참나무들 사이사이 놓인 육중한 바위들 위쪽으로 뛰어 오르면 산꿩, 산토끼, 참새, 도롱뇽, 개구리, 뱀, 풀무치, 여치, 딱정벌레, 하늘소 등, 온갖 벌레들이 이리저리 뛰고 기는 모습들이 천태만상이다.

 

 초가 지붕엔 허연 박이 뒹굴고, 흙담 위에는 초롱불 같은 황금빛 호박꽃들. 그 담을 따라 뒤로 돌아가면 빨간 감을 달고 서있는 감나무, 천자만홍으로 물든 감나무 이파리가 가득한 뒤꼍, 둥그런 멍석 위에 널린 빨간 고추…, 저녁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로 둥근 달이 떠오면 동네 사랑에 모여 옛이야기책 읽으시는 어른들의 그렁그렁한 소리가 들린다.

 

 이 아늑한 마을에 해마다 어김없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진달래, 그 진달래에게 질세라 따라 피어나는 철쭉. 철쭉을 먹으면 큰일 난다고, 철부지였지만 용케 철쭉을 제쳐놓고 진달래만 골라 따먹으며 온 종일을 산에서 보내곤 했다. 내 고향 사투리로는 진달래꽃을 「창꽃」이라 했다. 꽃잎을 따서 한 주먹씩 입에 털어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 꽃물이 향긋한 내음과 함께 목을 넘어 속으로 흘러드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아마도 내가 먹은 진달래 꽃잎들은 일정시대를 견디는 이 철부지를 키워준 영양이었음에 틀림없다. 꽃을 따서 머리에도 얹어보고 가슴에도 달아보고 호주머니 속에도 넣어보고 하다가 한 아름씩 꺾어 들고 산을 내려오곤 했다.

 

  점점 자라면서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알게 되었고 그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면서도 진달래꽃을 잊지 못해 했다. 군에 입대하여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무릎이나 팔꿈치에 피멍이 들어 터져 피가 옷 밖으로 배어 나올 때마다 전우들은 「사구라」라고 했지만 나는 진달래꽃을 연상했다.

 

  도회와 기계문명 속에 섞이어 살면서 지칠 대로 지친 나를 일으켜 고향으로 안내해주는 이정표는 바로 이 진달래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진달래로부터 소중한 고향산천을 잊을 수 가 없다.

 

  헌데, 점점 고향의 모습이 변모되고 있음을 어쩌랴! 집집마다 장작대신 연탄이 들어차고, 등잔불은 꺼진 지 오래고 전기가 들어가 자리잡고, 구수한 어른들의 옛날 이야기 대신 TV가 판을 치고, 정답게 오가며 나누던 이웃과의 대화들이 전화로 처리되고 따뜻한 질화로에 보글보글 끓던 된장국은 어디 가고, 연탄불 위에 라면이 끓고, 내가 잡던 수많은 메뚜기들은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또아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훔쳐내며 어머니가 이고 오시던 그 물동이도 온 데 간 데 없다. 비가 오면 껑충 뛰어 건너던 도랑 위엔 양회다리가 놓이고, 마차 대신 경운기가 요란한 금속성을 지르는, 옛날 그 고향은 아니다.

 

  이제 지명의 나이에 옛 고향 그 모습 그대로를 찾으려는 것은 내 잘못이거니와, 세월이 흐르니 고향도 따라 변함을 오늘 새삼 실감케 되니 섭섭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어릴 때 놀던 뒷동산 진달래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창꽃」으로 내 마음 동산에 피어 있는 것이다. 산에 피는 진달래는 그 꽃잎을 땅에 떨구지만, 내 마음 동산의 진달래는 영영 시들 줄을 모르고 오늘도 곱게 피어 있는 것이다. (19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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