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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심령의 눈을 뜨자

2016.12.11 15:42

최선호 조회 수:3

 

 

심령의 눈을 뜨자

 

 

 

 

  똑 같은 실수라도 보통사람의 실수보다 성직자의 실수는 더욱 더 커 보인다. 보통사람의 실수는 오랜 세월이 흐르거나 어떤 합당한 계기를 만나면 씻어질 것 같기도 한데 성직자의 실수는 영원히 남을 것만 같다.

 

  반면에 보통사람이 베푼 자선은 아주 훌륭하고 높게 평가하려 드는데 비해 성직자가 베푼 자선에 대해서는 그저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겨 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자도 후자도 보통사람에 대해서는 무척 후한 편인데, 성직자에 대해서만은 몹시 인색하다.

 

  인간은 얼마나 부정확하고 비뚤어진 눈을 뜨고 있는가.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귀로 듣고, 인간의 입으로 전하면서 나름대로 내리는 판단. 이 또한 얼마나 서툰 노릇인가!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눈과 다르다. 성직자에게는 인색하고 보통사람에게는 후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편견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는 없다.

 

  심령의 눈을 뜨지 않고서는 무엇 한 가지라도 바르게 볼 수가 없다. 심령의 눈은 비뚤어져 있거나 편견이 묻지 않은 눈이다. 심령의 눈이야말로 하나님과 바로 통하는 눈이다.

 

  심령의 눈엔 눈물이 그득 괴어 있다. 뜨거운 사랑이 끓고 있다. 광선보다 빠르고 날쌘 검이 들어 있다. 동정과 이해 관용과 양보가 항상 그 눈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심령의 눈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흘기거나 분노를 품지 않는다. 모든 것을 바르고 정확하게 보고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눈이 심령의 눈이다.

 

  심령의 눈에는 가시나 들보가 들어 있을 수 없다. 심령의 눈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베푸는 눈이며 어떤 경우에라도 쌍심지를 세우지 않는 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안만으로는 공의와 사랑을 지키지 못한다.

 

  성직자라 해서 어찌 실수가 없겠는가. 인간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다. 다만 그 실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가 문제다. 작은 하나의 실수라 할지라도 자기에게만 국한된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다. 가정과 이웃, 사회와 국가, 세계와 인류, 심지어 자신의 영원까지 허물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성직자만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이 모른다 해서 자신의 실수가 처리된 것은 아니다. 육안이 아닌 심령의 눈으로 바라보라. 만약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가지 반 가지라도 어떤 실수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실수를 그냥 묻어  둔 채 십자가를 졌다면 과연 그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일 수밖에 없다.

 

  최근, 본국 교계에서도 미주한인교계에서도 성직자가 성직자를 상대로 한 고발 사건들이 우리를 아찔케 한다. 교계의 문제를 가지고 법정으로 가기에 앞서, 보다 깨끗하고 밝은 지혜의 방법은 없었는가. 툭하면 법정으로 가는 고발행위가 교계에 번질까 염려된다.

 

  개혁의 바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실천을 기점으로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실천의 구성원 모두는 심령의 눈을 떠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 길로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기왕에 당하고 저지른 일, 심령의 눈을 뜨고 믿음으로 해결하자. 법보다는 믿음으로 사는 성직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지만 예수를 법정까지 끌고 간 이들에게 심령의 눈이 뜨였었다면 그런 엄청난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3.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