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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역사의 숨가쁜 벼랑에서

2016.12.12 14:22

최선호 조회 수:3

 

 

역사의 숨가쁜 벼랑에서

 

 


  1960년, 필자는 일간지 기자로 서울을 뛰면서 4.19를 취재했었다. 그리고 32년이 지난 며칠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저질러진 4.29를 똑똑히 보았다.

 

  4.19 때는 콘크리트 벽에 갇힌 듯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후련하고 무엇인가 기대감에 차있었으나 지난 번 4.29는 답답하고 우울한 벽에 갇힌 듯 사뭇 가슴이 싸늘하게 조여들었다.

 

  물론 4.19와 4.29는 그 바탕부터가 다른 것이다. 시대와 지역과 대상이 다르고 불을 지른 자와 총을 쏜 자와 맞은 자의 입장이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4.19와 4.29 후에 가져온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믿는 도끼에 발등까지 찍히면서 목숨과 재산을 지불했다는 공통점과, 그런 일을 당했으면서도 제 갈 길을 올바로 찾아내지 못하고 나름대로 목청만 돋구어 오히려 혼란을 야기 시켰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다가 4.19는 바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군정에 휘말리지 않았던가!

 

  이제 4.29는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두 눈을 부릅뜬 긴장 속에 고단한 밤을 지새우는 동포들의 목청은 날로 높아만 가고 있다.

 

  살아 있는 것 중에 불안을 느끼고 살아가기에 가장 알맞은 것이 인간이다. 절박한 함정으로 떨어지는 순간, 한 가닥 검불이라도  붙들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이런 안타까움 속에 질서 없이 목청만 높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검불을 붙든다고 떨어지던 목숨이 건져질 리는 만무한 일이다 우리를 살리는 길은 미국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총이나 칼은 더욱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검불에 불과한 것들이다.

 

  우리는 귀한 것을 잃었다. 이제 더 귀한 것을 차지해야 될 중대한 시기에 와 있다. 떠들거나 목청을 높인다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는 것도 아니며 대가가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불안은 소란을 낳기 쉽고 소란은 혼란을, 혼란은 더 큰 혼란을 낳아 결국 종말이나 죽음을 초래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더욱이 역사의 교훈을 듣고 있으면서도 왜 떠들고만 있는가?

 

  이제는 잠잠하여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다. 변명이나 주장, 비판이나 선동, 애원이나 호소를 앞세우기보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고, 권리와 의무를 정확한 위치에서 행사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오늘과 같이 소란의 연속뿐이라면 우리 앞엔  과연 무엇이 오는가?

 

  지금 우리는 역사의 숨가쁜 벼랑에 서 있다. 자칫하면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미련을 범하게 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지혜를, 너 나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법. 이제 우리가 맞아야 할 감격의 날들이 다가 온다.

 

  주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생의 문을 열었고 무덤에 갇히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찾으셨다.

 

  조용히 눈감으면 들려오지 않는가.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라는 주님의 음성이.  (1992.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