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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흑인동네 이야기

2016.12.12 15:08

최선호 조회 수:4

 

 

흑인동네 이야기

 

 


  며칠 전, 한인 몇 사람이 둘러앉아 비지니스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한참동안 목청을 돋우며 이민생활의 희비쌍곡선을 그려가던 그들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침통한 표정들을 지었다.

 

  최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존스마켓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흑인들을 대상으로 마켓을 운영하는 박 모씨가 당하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이구동성으로 '안 됐다'는 이야기다. 마켓에 '흑인 침입', '총기 위협', '금품  강탈', '피살', '정당방위'.... 등의 이야기가 오가는 중  약 3천 명이나 되는 흑인이 섬기는 벧엘교회를 상대로 주일마다 주차장 사용에 관해 박 모씨가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자업자득한 결과라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시무룩하던 그들 중에 누가 또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가 아는 어떤 한인은 흑인동네에서 마켓을 경영해오고 있는데 처음부터 흑인들에게 친절을 다 했다는 것이다. 배가 고파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흑인이 눈에 띌 때마다 빵과 음료수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는 동전을 주면서 비디오게임도 해보라고 했고, 명절 때만 되면 이웃 흑인가정에 조촐한 선물도 보냈다는 것이다. 처음 흑인동네에서 마켓을 개업할 당시에는 흑인 얼굴이나 손, 다리만 봐도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었는데 의도적으로나마 그들과 친하려 애를 쓰면서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한 달 두 달, 1년 2년 ....세월을 지나면서 그들과 정이 붙고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10년쯤 지나고 부터는 가게주인 자신이 바쁜 날이면 동네 흑인들이 가게를 보아준다는 것이다. 주인은 전체를 그들에게 내맡기고 하루종일 나가서 일을 보고 저녁 늦게야 돌아오기가 예사라 한다. 그러는 동안 '네 것', '내 것'없이 서로 믿고 사는 사이가 됐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이구동성으로 '잘 됐다'고들 말한다. 전자도 후자도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인의 비지니스 이야기다. 그런데 전자는 '안 됐다'요, 후자는 '잘  됐다'다. '안 됐다'에도 안 되게 된 이유는 있고, '잘 됐다'에도 잘 되게 된 이유는 있는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사건의 공통적 촉매는 '금전'에 보다는 '마음'에 달린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마음의 동물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두 개 이상의 욕구가 동시에 작용할 경우, 어느 한 쪽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임과 동요로 상극(相剋)을 빚게 될 때 갈등을 느끼는 법. 동시에 일어나는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그 욕구의 방향이 동등한 힘으로 육박해 올 때 인간은 괴로운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중간에 끼어 있는 상태, 또는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제에 매어 있는 상태 등, 여하간 심각한 갈등을 느끼게 되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현실도피를 꾀함과 동시에 당장 당하는 고뇌를 억제하며 무의식 속에 빠뜨려 아주 가둬 버리려 한다. 그런다고 해서 그 고뇌가 아주 삭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국 땅에 사는 한, 흑인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그들을 향한 우리 한인들의 정신문화의 가슴을 열자. 그래서 그들에게 가게를 몽땅 내맡기고 하루종일 볼 일 보러 나가는 한인주인이 되어보자.(1991.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