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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어떻게 살아야 할까

2016.12.13 12:41

최선호 조회 수:4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한다. 항상 살아 있기를 원한다. 살아 있으면서 모든 대상들이 자기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혹, 자기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차 한 잔 마시듯 가볍게 잊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서 그런 실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자기 자신은 어느 새 순수한 사람으로 자리잡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 안에 터 잡혀 있는 자신의 착각일 뿐이다. 만약 이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자기 모순을 쌓아 가는 생활일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죽음을 달게 받으면서 죽음을 죽음 자체로 끝내지 않았다. 그토록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위대한 것은 쓰리고 아픈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생애가 더 없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봉사의 생애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 중에 한 가지 반 가지의 실수라도 있었다면 그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도 죽음의 날이 다가온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는 죽음이 무엇인지 굳이 알려고 애 쓸 필요는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 안들 무엇하며 모른들 어떤가? 다만 그것은 입에서 꺼내기조차 싫은 말이기 때문에 아예 생각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그저, 우리에게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엄숙,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든 모르든 우리가 죽음 앞에 대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이나 발버둥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바로 우리 삶의 자세이다.

 

  N. B. 마키아벨리는
  "나는 일생동안 누구하나 다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는 생각만이 임종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편안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했다.           

  바로 그것이다.

 

  편안한 죽음, 위대한 죽음,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우리 삶의 자세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 거짓말하고, 남을 몰래 비방하고, 자기의 기분이나 영달을 위해 남을 짓밟아 버리는 자세로 일관하다가 맞는 죽음이 있다면, 그야말로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살았을 때 자기의 한 행실 그대로 죽어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너나없이 착하게 살다가 죽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이치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실천궁행이 문제이다.

 

  무슨 이유로 남을 미워해야 하는가? 무슨 이유로 제 잘났다고 나대고 있는가? 무슨 이유로 남을 깔보고 업신여긴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자를 즐겨 맞지 않으신다. 튀어나온 못이 망치에 한 대라도 더 얻어맞듯,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이 죽기를 싫어하지만 안 죽을 수는 없다. 차라리 죽을 준비를 하듯 착실하게 살다가 죽는 일이 훨씬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1996.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