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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마구간은 인간 심령의 상징

2016.12.15 03:37

최선호 조회 수:128

 

 

마구간은 인간 심령의 상징


 낮고 천한 곳, 마구간은 인간 심령의 상징이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더럽고 오물이 널려 있듯, 시기 질투 욕심 자랑 간사 멸시 천대 저주로 가득 찼을 뿐 아니라 구유와 같이 딱딱한 인간의 고집 위에 아기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병든 인간의 심령을 치유하시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섬기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간은 결국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우리의 가슴에 말씀으로, 생명으로, 빛으로 오신 주님을 바로 듣고, 바로 보고, 바로 말해야 했을 인간 심령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구간 같이 추한 인간의 심령 위에 피묻은 십자가가 세워졌다.
 들음에서 나는 믿음을 바로 듣지 못하고, 바로 보아야 했을 심령의 눈은 멀었고, 바로 증거 해야 할 입은 증거다운 증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얼마나 부정확하고 비뚤어진 심령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의 귀로 듣고,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입으로 전하면서 나름대로 내리는 판단, 이 또한 얼마나 서툰 노릇인가! 심령이 바르지 않고서는 무엇 한 가지라도 바르게 듣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전할 수가 없다. 심령다운 심령에는 편견이 묻어 있을 수가 없다. 은혜의 눈물이 그득 괴어 있다. 뜨거운 사랑이 끓고 있다. 광선보다 빠르고 날쌘 검이 들어 있다. 동정과 이해, 관용과 양보가 항상 그 심령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눈치를 보거나 흘기거나 분노를 품지 않는다. 모든 것을 바르고 정확하게 듣고 보고 말하는 따뜻한 사랑을 베푼다. 가시나 들보가 들어 있을 수 없다. 죄를 짓지 않고 선을 베풀며 어떤 경우에라도 쌍심지를 세우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통하는 심령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와,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심령은 과연 어떤가. 마구간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더러운 곳에서 주님은 다시 피를 흘려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전통과 선각들의 경험과 우리의 이성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나와 내가 섬기는 교회, 교단과 교계를 직시하자. 한국교계나 해외교계나 이래 가지고서야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할 수 있단 말인가. 아기예수께 드릴 황금, 유향, 몰약이 간직된 우리 심령의 보배합은 어디 있는가?

개교회는 개교회대로 교단이나 교계는 교단이나 교계대로 문제의 불씨를 안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심령 속에 오신 아기예수의 품에서 그 열쇠를 찾아야 한다. 구유와 같은 딱딱한 고집, 마구간 같은 우리의 심령이 바로 되는 날이 와야 한다. 은혜와 사랑이 선행되어야 한다. 평화와 화목이 앞서야 한다. 용서와 관용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예수를 바로 영접하려면 섬기는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 누가 먹칠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이 오점을 어떻게 말끔히 씻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툭하면 법정이나 언론을 들먹이며 문제해결을 하려는 풍조는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는 자나, 교회, 교단, 교계에는 언제나 훈훈한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래야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땁고 암사슴 같은 아내를 데려다 놓고도 아기예수가 탄생하시기까지 동침치 아니한 요셉의 인내를 보아라. 이 인내야말로 의로운 자가 갖는 최상의 본이다. 우리도 인내하면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 의로운 자의 철저한 인내를 딛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예수. 이 감격, 이 충만을 어이하랴!

 경배하라, 무릎꿇고 경배하라.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12. 17.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