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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땅의 실수 하늘의 은혜

2016.12.11 09:13

최선호 조회 수:27

 

 

땅의 실수 하늘의 은혜


                 


 
  1997년 4월, 서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 차 서울에 갔었다. 김포국제공항에 마중 나온 동서를 반갑게 맞아 인사를 나눈 후, 짐을 싣고 처가에 도착하자마자 싣고 온 짐을 내리다가 너무도 당황했다. 짐 중에 있어야 할 내 가방이 없기 때문이었다. 타고 온 승용차의 앞뒤 좌석과 그 밑을 샅샅이 살펴보고 트렁크도 열어 보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어쩌랴!


   공항 택시 승차 장에 놓아둔 채 그냥 왔다는 생각이 들자, 내 몸 속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면서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란 말도 있고, "네 발 가진 말도 넘어진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등, 실수를 실수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한 일로 미루어 보려는 말귀들이 하나 하나 떠오르긴 하지만, 실수를 저지른 나에겐 아무런 위로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아무리 조바심을 쳐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가방 안에는 성경책, 찬송가책, 패스포드 그리고 용돈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서류와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급히 전해 달라고 부탁 받은 현금을 넣은 두툼한 봉투까지 들어있는 가방이다. 성경책은 절판이 되어 구하기 어려운 판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쓰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또 구할 수는 있을 것이고, 찬송가책도 또 살 수 있지만, 패스포드와 중요서류는 얼른 다시 갖추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도 더욱 몸을 달게 하는 것은 달러가 현금으로 두툼하게 들어있는 봉투가 분실되었다는 생각에 심장이 녹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가 들어있는 봉투인지도 모른다. 부탁한 사람이 나를 믿기 때문에 액수도 밝히지 않고 "아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하고 맡긴 것이다. 나 역시 그 봉투 안에 얼마의 액수가 들었는지 알 필요도 없고, 다만 전해만 주면 된다는 생각에 덥석 받아 넣었던 것이다. 은행을 통해 송금하려다가 마침 내가 서울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전하기 위해 부탁한 일인데, 급히 전달은커녕 찾을 수도 없는 일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일인가! 벌써 누군가가 가져다가 가방을 열어 돈 봉투는 꺼냈을 것이고 자기에게 해당이 없는 것들은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때는 늦었고 별도리가 없다는 막막함뿐이었다.

 

 "하나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얼마가 든 봉투냐고 물어라도 보았더라면 좋았으련만, 목사인 내가 그런 걸 묻기도 그렇고 해서 틀림없이 전해 줄 마음만 믿고 가방에 넣은 것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돈도 돈이지만 목사의 입장이 어찌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액수도 모르는 돈을 잃어버렸으니, 그 액수를 안다고 해도 두툼한 봉투였고, 또 그 봉투를 전해달라고 부탁한 분이 가난하게 사는 분도 아니므로 적은 액수의 돈은 아닐 텐데.

 

 내가 미국에 온 지 10년만에 찾은 내 나라, 서울에서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자신이 후회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아도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른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었다. 미국에 온 후 10년 동안 주경야독 주독야경 하면서 대학원과정을 3번이나 해내느라고 눈코 뜰 사이가 없었으면서도 실수 없이 살아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은 것이다.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도 시련을 시련으로 알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 왔는데, 오늘의 이 실수는 설상가상이 아닐 수가 없다. 얼마나 더 크고 아픈 시련으로 나를 단련시키시려는 뜻이 계신지 헤아려 보아야 하겠지만,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도무지 내 일 같지가 않은 것이다. 이미 잃어버린 가방과 돈은 어떤 사람의 품속으로 녹아든 것은 뻔한 일이고, 이제부터 나는 그 돈을 갚는 일에 세월을 보내야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미국에서 서울에 오는 비행기를 타기까지 나는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마감일 까지 학위논문을 제출하느라고 며칠 밤을 설쳤고, 출발 전야는 꼬박 밤을 새워 타이핑을 했다. 아내는 옆에서 나를 거들어 주었기에 같이 피곤에 지쳐 있었다. 당일 새벽에 타이핑을 마치고 몇 권의 분량을 복사하여 제본소에 제본을 맡겼다. 친구목사에게 제본소에 가서 논문을 찾아다가 시간에 늦지 않도록 제출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이 엄청난 일을 무사히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으니 오죽 홀가분했으랴!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하다니, 필경 나는 넋을 잃고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거들어주던 아내가 정신을 잃다시피 공항을 나가는 나에게 "비행기 안에서 피로를 푸시면서 평안히 다녀오세요"라고 일러준 말만이 귀에 쟁쟁할 뿐, 앞이 캄캄했다.
 
 이 일을 어쩌랴! 박사가 다 무어냐? 그 깐 것 있건 없건 목사의 입장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것 챙기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어느 누구에게 내 입장을 어떻게 설명인들 해볼 수 있단 말인가? 만학의 길을 걸어온 결과로 이런 선물을 받아야 하는 건가? 순간의 실수로 또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고생을 해야 하다니…, 그러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살아 계신 아버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오늘을 사는 저에게는 너무도 큰 시험이 됩니다. 이 난제를 누구에게 이야기 할 것이며 돈을 맡긴 장본인에게는 무엇이라 말을 해야 합니까? 이 일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 가리지 않게 하시고 목회에 지장이 없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더구나 가방을 찾아 주신다면 이 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겠나이다"

 

 옆에 동서가 서 있고 장모님까지 나오셔서 반가운 사위 왔느냐고 하시지만, 그 말씀이 내게 들릴 리 없었고, 지금 나는 불기둥처럼 타오르는 모습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네가 잃어버려 놓고 날 보고 찾으라고 조르느냐? 나는 생명을 구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지  그런 가방이나 찾아주는 하나님은 아니다. 최 목사가 그런 걸 잘 알 텐데 그런 기도를 하느냐?"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내 마음을 때리시는 것만 같았다.
 
 "하나님, 제가 목사만 아니라면 모르지만 목사인 제가 교우들을 대할 면목도 없고 그 동안 공부하느라고 어려웠고 살아 남기 위해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더구나 개척한 지 얼마 안 되는 목양지를 지키느라 애쓰는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르 떨리는 목젖에 부딪혀 새어 나오는 작은 소리로 실성하듯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안타까워하는 나를 바라보고 섰던 동서가 휴대용 전화로 114번에 김포국제공항 파출소 전화번호를 물어 즉시 파출소에 몇 마디 건네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공항으로 한번 가보시죠"

  동서는 안절부절 하는 나를 다시 옆자리에 태우더니 공항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길에 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2시간 이상이 지나야 공항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초조하게 조여들었다. 천천히 구르는 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빽빽한 빌딩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아래로는 거리마다 커다란 글씨의 간판들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큰 글씨들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가슴에는 잃어버린 가방만이 꽉 차 있을 뿐이었다. 아름다운 하늘, 깨끗한 거리가 아름답고 깨끗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2한강교를 건너면서도 강물의 푸르름을 느끼지 못했다. 내 조국의 하늘과 산천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면 그 가방은 내 품에 돌아올 수 있으련만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가도 아니야, 벌써 요절나고 말았어! 하는 상황에 전율을 느낄 뿐이었다.

 

  교통 체증이 심해 차가 빠지지 않는 틈을 타서 동서가 또 전화번호를 눌러 공항파출소에 문의를 했지만 그런 가방은 알 수가 없다는 대답만 왔다. 그러면 그렇지! 그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항 한 복판에 주인 없이 놓여 있는 가방이니 이미 볼 장 다 보았겠지. 이제 와서 그걸 찾겠다고 허둥대는 우리가 어리석지. 이미 동서는 체념을 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다만 나를 보기가 안타까우니까 그냥 공항으로 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돌아갑시다. 가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미 끝장 난 일인데…, 불쌍한 사람 손에나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동서는 전화나 한번 더 걸어보고 결정하자면서 또 공항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검은 색 가방 하나 들어왔습니다"란 소식이 왔다. 내 가방도 검은 색이다. 나 아닌 누가 또 검은 색 가방을 잃었단 말인가. 공항파출소에 도착하자마자 순경이 가방을 내 놓았다. 내 가방이었다. 가방은 잠겨있지 않았다. 나는 다짜고짜 가방을 열었다. 성경책, 찬송가책, 서류, 돈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나의 지갑은 없었다. 거기 내 용돈이 들어 있는데…, 순간 나는 감사한 생각에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지갑은 없어졌을 망정, 내가 부탁 받은 돈을 찾은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었다. "감사합니다"란 말이 나와야 할 내 목은 감격으로 꽉 차 있었다.

 

  어떤 택시운전기사가 가방을 습득하여 파출소에 맡기고 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은 분명히 그 택시기사 마음속에 살아 계시는 구나! 라는 확신과 함께 그 택시기사야말로 천사구나 아는 확신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방을 들고 공항을 나오던 나는 문득 지갑을 떠올려 보았다. 아! 그 지갑을 누가 꺼낸 것이 아니라 내가 집에 두고 오지 않았나? 나는 즉시 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지갑을 안 가져 가셨네요. 지갑이 집에 있어요" 하는 아내의 음성을 듣는 순간, 미련하고 둔했던 내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택시기사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기사였고 양심, 도덕, 인격, 훈훈한 인간성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공항 광장에 꽉 찬 택시들을 보면서, 그 택시들을 운전하는 기사들 모두가 천군 천사로 내 가슴에 감사의 불을 지폈다.

  아!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갸륵한 양심 앞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는구나!"라고 자꾸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거듭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19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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