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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고향유감

2016.12.11 09:38

최선호 조회 수:16

 

 

고향유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뒷동산, 달래, 무릇, 원추리, 도라지, 구절초…, 꿀벌들이 윙윙거리는 여기저기. 아무도 따 가지 않는 토종꿀덩이가 있고, 칡뿌리 캐먹으며 콧노래 흥얼거리던 옛날이 있고, 붕어, 미꾸라지, 모래무지, 송사리, 새우, 메기, 피라미… 등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아 올리던 낯익은 개울이며, 가을바람 속에 넘실대는 황금들판이 펼쳐지고, 허연 박이 뒹구는 초가지붕 위로 홍보석 같은 감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뒤꼍.

 

 그 뒤꼍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아래 올망졸망 모여 앉은 장독대 사이사이 볼 붉힌 봉숭아가 있고, 맑은 하늘가엔 노랑나비, 흰나비, 호랑나비, 밀잠자리, 고추잠자리 날고…, 여름밤이면 성가시기만 하던 모기까지 이제는 정답게 느껴지는 추억의 고향이 있다.

 

 무더운 여름 백중장날 장바닥 여기저기 아이스케이크를 외쳐대는 아저씨의 자전거  꽁무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던 목마른 여름도 있고, 냇가에서 멱감을 때 벗어놓은 런닝과 베잠방이를 어떤 녀석이 집어 갔는지-- 물속에서 울음 반 헤염 반으로 하루 해를 보내고 저녁 어스름에 물 젖은 알몸뚱이 그대로 골목골목으로 숨어숨어 집으로 돌아오던 낯 붉은 여름도 있다.

 

 태극기를 그려 양손에 거머쥐고 어른들을 따라 장에 갔다가 인파에 치이면서 접힌 팔을 내 뻗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1945년 8월 15일, 자유대한의 첫여름도 있고.

  가슴마다 총 뿌리를 겨누던 6.25. 어린 소년이던 내가 인민군의 손에 잡혀 형장으로 끌려 가다가 사력을 다해 번개같이 살아 나오던 끔찍한 여름도 있다. 이것들뿐이겠는가. 가지가지의 못 잊힐 고향의 추억은 나를 고향으로 초대하곤 한다.

 

 나는 해마다 고향을 찾는다. 찾아갈 때마다 옛날의 그 고향은 아니다. 지금의 내 고향엔 뒷동산은 있지만 진달래가 없다. 냇가는 있지만 붕어, 메기는커녕 송사리 한 마리, 새우새끼 한 마리 올라오지 않는다. 꿀벌도 윙윙거리지 않고 산딸기도 없다. 초가지붕 위에 뒹굴던 허연 박도, 홍보석 같은 석류나 감도 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옛날의 정취를 모두 빼앗겨 버린 빈 껍질만 남은 듯한 텅 빈 고향이다.

 

 고향! 고향이 변해 가다니. 이렇게 변해 가다가는 머지않아 내 고향엔 연탄재 날리는 골목만 남게 될 것이 아닌가? 공해의 온상이 되지나 않을까? 지금의 나는 공해 속에 살고 있지만, 내 고향만은 영원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 인류문명의 때가 끼이지 않는 '순수' 그대로의 고향이길 바란다.

 

 나는 또 며칠 후에 내 고향을 찾으리라. 쓰르라미, 여치 소리를 들으러, 그 개울에 발목을 잠그러, 고향 땅에 묻혀있는 내 정든 언어(言語)들을 만나러 나는 내 짐을 챙겨야겠다. 이 숨막히는 공해 속에서 고향에 핀 한 송이 꽃을 생각하며….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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