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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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그때 그 일들

2016.12.13 15:49

최선호 조회 수:19

 

 

그 때 그 일들

 

 

 

  크리스천 헤럴드 지를 통해 문서선교 일선에서 숨 가삐 일하던 과거를 돌이켜 보자니 사뭇 감회가 새롭다. 그 중책을 맡아 신문편집에 전념하면서 대과 없이 감당해 올 수 있었던 것은 1960년 봄부터 일간지 기지로 서울을 뛰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본인의 힘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발행인과 임직원 일동은 물론, 교계 지도자 여러분과 성도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정중히 드리는 바이다.


  무관의 제왕이란 이름을 달고 기자로 편집국장으로 취재도 하고, 좌담도 하고, 때로는 과감히 사건 속에 뛰어들기도 했으며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면서 일했던 당시를 대강 추억해 본다.


  특히, 4.29 폭동 때 폭동 현장에 뛰어들어 취재하던 그 순간의 기억과, 이단의 검은 손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흑인교회 탐방을 위해 밤중에 기자들과 함께 갔었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고, 한인 입양아 엔지 페스타 양을 골수암에서 구해 보겠다고 나날이 쓰던 기사와 호소문과 기도문들. 그리고 그 때 그런 글들을 쓰면서 눈물을 흘리던 순간 순간이 필름처럼 스친다.


  쓰면서 뛰고, 뛰면서 쓰던 나날이었다. 일반 기사는 물론, 좌담, 탐방기사와 사설, 칼럼까지 고정으로 실어 냈으니 이름을 그렇게 붙이지 않았을 뿐, 기자, 주필, 편집국장을 도맡아 해낸 셈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문서선교에 봉직한다는 것은 참으로 배고픈 일이었다. 그래도 그런 생각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란 한 뜻으로 매일같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많은 글을 써내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그 때 꼬박 1년 동안 써냈던 "밀알칼럼" 중에 어느 것은 지금도 가끔 내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보통 1주에 24면이나 28면을 내왔는데 지령 500호는 100면을 만들었다. 아마 이것은 크리스천 헤럴드 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 때, 그 일을 하느라 수고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구선경 양, 기호열 기자 등이 옆에서 많은 수고를 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다음 날 새벽 4시에 퇴근했던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피곤한 몸으로 새벽에 퇴근을 하다가 빨간 불을 그냥 지나쳐 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구 양도 그랬고, 구 양을 도왔던 황정순 양도 마찬가지로 그랬다며 허리를 잡고 웃던 일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하는 생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곤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이벨극장에서 문선명 집단이 기습적으로 대 집회를 열게 됨을 미리 알고 발행인을 비롯한 전 직원은 그 일을 제지하기 위해 현장에서 뛰어들었었고, 이단퇴치라면 두 눈에 불을 켰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은 한흑기독교연맹 창립에 관한 일이다. 흑인폭동 후, 참으로 어려운 현실을 겪으면서 한.흑갈등 해소라는 대 과제가 늘 헐리지 않는 담으로 둘리어 있을 때였다. 발행인 김명균 장로와 함께 흑인 목회자 모임에 뛰어들었던 것이 한흑기독교연맹 창립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 장로는 수십 명의 흑인 목회자들이 모인 앞에서 한.흑갈등 해소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당신들과 더욱 친하게 지내기 위해 당신들을 찾아 왔노라면서, 한인교계 대표급 인사들과 흑인교계 대표급 인사들의 만남을 호소했고, 결국 일은 성사되었다. 이에 쌍방이 손에 손을 잡고 로스앤젤레스 평화대행진을 감격과 함께 치르어 냈던 것이다. 이 일을 더욱 보람있게 촉진시키기 위해 사설로, 칼럼으로, 갖가지 관계기사와 광고물들을 다채롭게 실어내면서 훈훈함을 느껴보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맞이하는 신년하례식과 광복절 행사 때는 얼마나 바빴는지. 미 방문 길에 올랐던 북한 대표단(한시해, 강영섭 등)과 함께 갖기 위한 세미나 준비만도 참으로 바빴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상대방의 일방적인 거절로 성사가 안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어려운 와중에도 크리스천 헤럴드로서는 갈등, 불신, 등, 담 헐기에 평화의 나팔을 계속 불고 있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구슬 꿰둣 하나 하나 꿰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하겠지만 이만하면 대강의 추억은 된 듯하여 이만 줄이기로 한다.


 크리스천 헤럴드 창간 20주년으로 치닫는 문턱에서,  내가 짜 넣은 몇 방울의 고혈일지라도, 귀지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잠시나마 보람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몸 되신 교회들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앞으로 계속 발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1996.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