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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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화분

2016.12.13 16:01

최선호 조회 수:16

 

 

화분

 

 

 

  세 송이의 꽃이 피어있는 화분을 선물로 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분에 심어 놓으면 못된 풀도 화초라 한다는데 푸른 줄기와 무성한 잎사귀 사이에 보아란듯이 피어있는 꽃송이가 여간만 탐스러운 게 아니다. 자주 물을 준다. 두 컵씩 주고 나면 며칠은 마음이 놓인다. 그러면서 나는 살아 있는 생명력을 느낀다. 창문을 열면 보드라운 바람이 꽃과 꽃잎을 흔든다. 지난 봄엔 온종일 창문을 열어 놓았었다. 바람이 찾아와 주는 기쁨도 있고 나비라도 날아들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에서였다.

 

  언제나 꽃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말없이 사랑과 평화와 안정을 주고 때로는 우리를 희망의 나라로 안내하기도 한다. 이름 없는 길가에 나와 앉은 하찮은 꽃일지라도 시들어 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꽃은 피어있는 동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순수한 꽃일 뿐이다. 순수한 조건에서 봉오리가 벙글어 순수하게 피어 있다가 질 때도 그저 순수하게 질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책상 위에 꽃은 싱싱하게 피어 질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한번쯤은 졌다가 다시 필 만큼의 세월이 내 책상 위를 스쳐 갔음에도 꽃은 그대로다. 나는 은근히 대견스러워 졌다. 내가 꽃에 관심을 두고, 꽃을 생각하고 수시로 물도 주고 자주 봐주니까 꽃이 나의 사랑을 덧입어서 늘 싱싱하고 줄기와 잎이 저렇게 자라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 며칠 후, 꽃에 물을 주다가 꽃이 이상하다 싶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며 꽃을 자세히 드려다 보았다.

 

  실오라기가 풀려 있었다. 생화가 아닌 조화였다. 순간 나의 몸 속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속았다'는 서운함보다는 그 동안 나는 얼마나 바보짓을 해왔는가 하는 책망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토록 탐스러운 꽃송이가 아름다움을 위장하고 유혹하는 요부처럼 보였다. 그 후부터는 물을 주지 않기로 했다. 아니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화분을 책상에서 멀찍이 밀어 놓았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노랗게 바랜 잎사귀 하나가 떨어질듯 꽃가지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 나는 또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자세히 드려다 보고 만져보고 침을 발라보고 하면서 확인해 보았다. 아!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순간 나는 그 화분을 껴안을 것 같은 반가움으로 책상 가까이 당겨 놓았다. 그리고 일일이 살아있는 부분과 만들어진 부분을 구분해 보았다. 꽃을 받친 대공과 꽃잎은 수제품이었고 꽃줄기와 잎은 뿌리에서 수분을 빨아먹고 실내의 공기 속에 자라고 있는 분명한 생명체였다. 그날부터 나는 다시 물을 주기 시작했다. 또 창문을 열어 놓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 송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조화만을 달고 서있는 외로운 꽃나무를 바람이 와서 간지러 주기라도 하라는 심정에서였다.

 

  나는 지금도 이 화분 앞에 앉아있다. 마치 상한 심령을 바라보는 눈초리로 꽃과 꽃나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이런 화분을 제작한 사람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아마도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을 계속 피우고 싶었을 꺼다. 그러나 꽃나무까지 손으로 만들면 쉽사리 진짜 아닌 것이 탄로가 날 것을 미리 계산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기술에 익숙해 졌을 것이다. 그런 일에 속고 있던 나에게 쓴웃음이 지어진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모두를 '진짜'로 생각하며, 살아있는 부분과 죽어있는 부분이 나란히 병존하는 사회에 끊임없이 속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앞선다.

 

  옳게 살아 깨어있는 생명들의 공동체. 그것만이 참 아름다운 꽃송이일 것이다.  (199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