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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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걸음마 / 수필

2021.07.08 16:37

민유자 조회 수:8

걸음마

 

 환갑의 문턱에서 필기도구를 챙겨서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끼고 씨름하듯 읽는다. 눈을 비비고 더듬거리며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린다. 지금 나는 돌아서면 깜빡깜빡 멀어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다.

 

‘효부’라는 제목으로 시어머님을 모시던 이야기를 써서 미주 한국일보 수기 부문에 입상했다. 시상하는 자리에서 심사평에 “글을 잘 썼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진솔한 내용과 성찰의 과정을 보고...”라는 평을 들었다.

 

 문학이라는 늘 푸른 큰 숲은 항상 아득한 저 멀리에 있었다. 코앞만 보고 허덕이며 전심으로 달려온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감히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하다. 아무튼 그 후로 사람들이 나에게 “요즘도 글 많이 쓰세요?” 하고 묻는다. “아뇨, 내 속에서 뭐 더 나올 게 있나요?” 하고 얼굴을 붉히지만 슬그머니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늦깎이 소망이 생겼다.

 

 가깝지는 않지만 20마일 거리의 어느 교회 노인대학에 문예창 작반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첫 시간에 상상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열심히 들었지만 못 알아들을 말이 없었는 데도 나는 배운 것이 하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평소의 나는 상상은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왔고, 상상이 많이 들어간 글이나 시는 지나치고 읽지 않았다. 읽어도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본래 성격이 무덤덤하다고 할까, 얕은 동정심으로 쉽게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섬세한 서정으로 계절을 탄다거나 낭만적인 분위기에 싸여 일상을 벗어나는 일도 드물었으니 감정의 표피가 두꺼운 사람이다. 그러니 상상에 관한 강의가 내게 스며들 수 없었다.

 

 첫날 상상에 관한 글을 아무거나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날로 때려치웠을 게다. 선생님은 당시 미주에서 문학계의 큰 별이라 할 고원12) 교수님이었다.

 

 난감했다. 막막하고 마음이 답답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얼마간,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한참을 끙끙대다가 겨우 실마리를 붙들었다. 전에 스프링에 있는 조슈아 파크에 갔던 일이 생각 났다. 표면이 부드럽게 마모되어 누렇게 잘 구워진 빵 모양을 닮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모습을 보고 경이로웠던 감흥을 떠올렸다.

 

 

 숙제를 해야 된다는 강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하고 뜸을 들이다 마음 가는대로 쓰다 보니 생각이 곁길로 가서 ‘빵’을 주제로 글을 썼다. 그래서 다시 ‘산마루’를 썼다. 쓰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둘 다 시를 지었다. 이걸 시라고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문으로 다시 쓰려고 하니 도무지 이렇게 산뜻하고 감칠맛 나게 쓸 자신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선생님께 보여드리자고 마음먹었다.

 

 마음을 졸이며 숙제를 제출했다. 선생님은 감정이입과 감각적인 표현이 좋다고 하며 앞으로 잘 다듬고 매를 많이 맞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있겠으니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돋보기를 쓰고 뜬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더듬는다. 화면 과 함께 내 머리도 깜빡거린다. 돌맞이 첫 손자의 걸음마를 흉내내며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난다. 살아오면서 가라앉은 회한의 찌꺼기들. 지난날의 시행착오로 부딪치고 깨어진 삶의 조각들. 깊은 우물 속의 젖은 책들을 길어올린다.

 

갈피마다 숨은 사연들을 꺼내어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에 말려 좀 더 성숙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며 삶의 향기를 음미한다.

 

언젠가부터 내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가벼워지고 싶었다. 뒤늦게 시작한 걸음마지만 이로 인해 내 삶의 끝을 고운 단풍으로 아름다운 노을로 장식하여 유산으로 남기기를 소망한다.

 

때로 멀고 험한 길을 걸음마로 시작하는 일이 힘겹고 나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 조급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생각하니 나에게는 분에 넘치게 감사한 일이고 살맛 나는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12) 고원 - 1956년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 1964년 아이오와 주립대 영문학 석사, 뉴욕대 비교문학 박사, 평생 미국 대학 강단을 지키고 살아오심. 문학의 불모지 나성에서 글마루(문예 창작반)를 시작하여 이십여 년 간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고 빛나는 문예활동을 해 오심.

 

https://youtu.be/jBOo9Kh-Z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