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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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이 나무에 매달린 한 알의 감처럼 애처롭고 소중하다. 이런저런 행사와 모임으로 하루하루가 뭉텅뭉텅 지나간다. 며칠 비가 퍼부어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비 때문인지 춥다. 옷을 하나 더 껴입고 집을 나선다. 비 온 뒤의 햇살은 밝고 투명하다. 마켓 앞에 짤랑짤랑 구세군 냄비가 밝음 반대편, 그늘진 곳들의 추위를 돌아보게 한다. 마음을 닫고 있을 때는 가는 곳마다 구세군 냄비가 진을 치고 있더니, 적은 액수라도 빠지지 않고 넣기로 작심하고 나섰더니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더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짤랑대던 구세군 냄비가 작년보다 준 것 같다.

올 한해도 온갖 사건들로 세상은 시끄러웠다. 뒤돌아보면 조용했던 해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살아있는 증거라도 되는 양,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삐거덕대는 소리가 쉼 없이 들린다. 반면에, 어느 날 갑자기 투병생활에 접어드신 분도 있고,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영영 떠나신 분도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람이 병들고 죽고 하는 일이 삶의 한 부분처럼 늘 있어왔는데 왜 이제야 귀와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걸까. 애들 키우고 살림 늘리고 남편 승진하고…. 그런 이야기가 무궁무진 이어지는 줄 알았다. 누군가를 영영 떠나 보내는 일은 우리 부모님 세대의 일이었기에 병들고 죽고는 남의 이야기로 들렸던 모양이다.

12월만 해도 장례식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대부분 우리 부모님 세대이다. 중환자실도 다녀왔다. 건강할 때 했던 모든 고민이 한가지로 추려진다는 것, 중환자실에 가보면 안다. 큰 병에 걸려 대수술을 한다는 또래 지인의 소식에 '그렇게 젊은 나이에...'라며 모두들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여전히 젊다는 것, 몸과 마음이 따로 가는 것 같아 조금 서글프다. 사람의 마지막을 수없이 접하면서도 변하는 것이 별로 없는 한량없이 어리석은 우리, 자기만의 길을 찾아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이들의 가치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도 12월이다.

몸의 건강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은 또 얼마나 중요한지. 죽을 맛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더 크게 들린다. 서로에게 철옹성을 쌓고 살아가는 먼 친척 부부의 사연을 들으며,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는 친구와 그 아이들을 떠올리며 몸이 아픈 것 보다 더 큰 아픔을 느낀다. 모임이 많은 12월에 느끼는 그들의 외로움을 생각한다.

어른이 되면 저절로 철이 드는 줄 알았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도 12월이다. 올 한해도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매뉴얼 적용 불가능한 일 투성이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할 말을 한 적이 있고, 마음이 미치지 못해 뒤늦게 가슴을 친 일도 있고, 남을 판단하는 마음의 잣대도 마구 휘두른, 내가 보인다.

12월, 달랑 남은 달력 속의 날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으로 새 달력을 펼쳐본다. 영 육 간에 더 건강하고 사업 더 번창하고 더 좋은 일 더 좋은 사람만나고…. 더더더… 하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지나치게 야무진 기대는 접으련다. 여기까지 온 만큼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이것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다. 내 기도 속 사람들의 삶 또한 나의 기적이다. 새해도 사람이 내 삶의 구성요소가 될 것 같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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