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너를 잃고

2016.12.01 07:48

정국희 조회 수:1354

1).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위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 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 위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 하나 다른 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히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億萬無慮의 모욕인 까닭에.

 

 

 

 

 

감상

 

 

 

사람을 잃는 다는 것은 남은 자의 아픔이다. 가는 사람은 그냥 가버리면 되지만 남은 자는 오롯이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잃는 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다. 반대로 사랑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은혜롭다. 바로 단테의 말처럼 사랑은 태양과 모든 별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물론 사랑의 모양이 다 같은 것이 아닌 만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하는 행동도 다 같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떻게 바라보든지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너를 잃고는 단순한 사랑을 넘어선 사랑의 상태에 놓여있다. 시의 화자는 현재 사람을 잃고 처절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너가 없어도 나는 산다고 역설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사는 삶이 보람 있기 위하여 돈도 벌지 않고 다른 여자를 만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뜻은 지고지순한 사랑보다는 분노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인간의 모든 시작에 있어서 가장 앞에 놓이는 부분이며 또 모든 것을 완성하는 가장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부부의 애증은 가장 깊지만 가장 얉을 수가 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이 시의 화자가 겪고 있는 참담하고 비루한 인간적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테면, 존재의 모든 의지를 다해서 현실은 견딜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삶이 녹슬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어찌 보면, 화자의 감정은 시로서는 표현되지 않는 어떤 감정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고통스런 감정이 심할 때는 일종의 자학적인 쾌감을 얻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첫 구절인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가 어쩌면 그런 형태라고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는, 너가 없어서 더 살 수 있기에 더욱 강렬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인 그 어구 때문에 도리어 시의 전체를 오히려 격렬한 열정으로 바꾸어 버린다. 다시 말하면 너가 없어도 산다는 말은 너가 없어서 못 산다는 뜻이 더 깊다고 하겠다. 즉 이 뜻은 반어적인 표현으로서 동시에 처절한 호소력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 연에 나타나는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늬가 없어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화자의 초월적 실존의 위치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기다림이란 그 고통을 오랜 세월이 간다해도 견뎌내겠다는 뜻이다. , 기다림의 수동적 행위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역동적 행위로 분기해가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으로 재구축한 것이다. 너를 잃고는 충분히 서글프면서 화자의 아픔을 함께 느끼기에 충분한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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