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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신춘문예]시/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

2003.01.04 09:39

최석봉 조회 수:547 추천:43

<2003신년특집-신춘문예 당선작>시 당선작/김병호



금줄 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은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2003신년특집-신춘문예 당선작>시 당선소감 "나의 詩가 든든한 아침됐으면"




아직까지 자장면 빨리 먹기 내기에서 져본 일이 없다. 자장면 곱빼기를 먹고 나서도 보통을 한 그릇 더 먹는 식성이지만, 성격이 급한 나는 좀처럼 뜨거운 음식은 먹지 못한다. 이래저래 어지러웠던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항상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아침밥을 새로 안치셨다. 그리고 국도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침잠이 많은 나는 언제나 스쿨버스가 올 시간에 허둥댔고, 급한 마음에 한두 숟가락만 들고 일어서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아침, 어머니는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에 찬물을 반쯤 담고 그 안에 내 국그릇을 띄워주셨다. 그날부터 나는 바가지 안에서 동동 떠다니는 국그릇에 밥을 말아 아침을 버티곤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크게 어긋나지 않고 사람 노릇을 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어머니의 이런 마음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나의 시 쓰는 일이 어머니의 빨간 바가지처럼 누군가를 헤아리고 살피는 일이 될 수 있으면 한다. 시란 삶 속에서 유효하게 가동되는 진실을, 별 것일 수 없는 일상의 단면을 온것으로 담아내는 것이어서, 우리가 미처 돌보지 못한 것들이나 사소해서 지나쳐버리는 것들을 온전하게 보듬어 간직하는 일이 결국 시의 노릇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잠 많은 이들에게 마침맞게 식은 콩나물국이나 청국장처럼 나의 시가 사람들에게 든든한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약력

▲1971년 광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김병호 시부문 당선자


<2003신년특집-신춘문예 당선작>시 심사평
"시적 역량·동화적 상상력 독특"


당연한 말이지만, 신인의 시는 참신해야 하고 내적인 절실함에서 비롯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튼튼한 시적 역량을 겸비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심사자들이 의견을 교환한 것은 바로 이런 심사의 척도였다.

김병호의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때’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시의 질료로서의 언어에 대한 감각이 이만큼 섬세한 신인도 드물 것이다. 마음의 천진성에서 비롯된 동화적 상상력도 독특했다.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자리 앉혔다는 징검돌’이나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같은 표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께 응모한 ‘봄날의 사진 한장’에 나오는 ‘어머니에게 연애 한번 걸고 싶은거지요/봄 햇살 속의 어머니를, 나는/그만 처녀로 놓아주고 싶은 것이지요’ 같은 구절도 그렇다.

한편의 시를 서정적으로 끌고 가는 리듬 구사 능력과 분위기의 통일성에서 시적 역량이 느껴졌고, 대상과 공명(共鳴)하는 부드럽고 여린 감수성이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두 심사자 사이에는 당선작에 대한 이견이 없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향상의 길위에 시가 늘 있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남승민의 ‘양초’, 김선아의 ‘인사동, 황사 며칠’, 안여진의 ‘새장에서’가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시인 감태준·최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