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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신춘문예]시/ ‘미꾸라지 추’자 찾기/천수호

2003.01.02 05:00

최석봉 조회 수:732 추천:28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천수호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 잉어 추, 쏘가리 추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맹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올린

비린내 묻은 秋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만

자꾸 잡아 올린다.


(편집자주: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는 원래 한문 글자로 표기해야 하나 컴퓨터 한자의 제한으로 한글로 대치했습니다.)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심사평

◆당선소감/ “까마득한 시의 고고학 속으로…”


국그릇에 드나드는 숟가락이 국맛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 시가 아직 맛을 알지 못하듯이. 그러나 숟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그리워 나는 자꾸 시 속으로 몸을 담근다. 그릇 안의 온기만큼만 몸을 녹이고 난 또 국을 데운다.

시를 사랑하느라 견제하는 법을 놓쳐버린 건 아닌지, 내 기억을 갖고 있는 숟가락과 내 체온을 갖고 있는 국그릇을 번갈아 쳐다본다. 참, 많은 그릇들을 채운 것 같았는데 결국은 비워져야 할 것들이었다. 시를 쓰는 것은 끊임없이 비워내는 국그릇과 같아서 자꾸 숟가락을 퍼올려 씹어도 보고 삼켜도 본다.

가야할 길이 멀다. 몇백 년이 지나도 눈·코·입이 그대로인 시, 피부의 탄력이 느껴지는 시, 팔뚝의 푸른 동맥이 푸릇푸릇 드러나는 시의 고고학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가다가 길을 잃지 말라는 당부의 소리가 들린다.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리며 부족한 시를 세상으로 밀어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천수호)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대구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중


◆ 심사평/ 긴장된 시적 질서·패기 탁월

신춘문예가 ‘프로신인’을 배출하는 제도라면, 가장 중시되어야 할 요소는 그 신인의 프로로서의 가능성일 것이다. 이 가능성은 때로 작품의 완결성이 미흡할 경우에도 거칠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수가 있다. 작품의 질서가 주는 조화에 매료되어 그 뒤의 힘찬 에너지를 놓친다면, 심사자는 두고두고 아쉬움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옥편 속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 ‘오래된 부채’ 외 3편의 천수호씨와 ‘못은 나무의 역사를 만든다’ 외 4편의 김형미씨는 이같은 아쉬움을 처음부터 걷어내 준 분들로 높은 평가에 값할 만 하다. 당선자가 된 천씨는 긴장된 시적 질서와 패기 양면에서 탁월한 재능과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이며, 김씨 역시 패기가 대단하고 대담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지하철 역에서’ 외 3편의 윤석정씨, ‘석모도 민박집’ 외 4편의 안현나씨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들만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해내는 능력이 기성시인을 차라리 앞서는 면이 있다. 당선자, 그리고 당선을 양보한 김씨의 창의력을 다시한 번 가슴에 새기며, 앞으로의 활동을 주목하고 싶다. (황동규·시인, 김주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