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체험기(2)/윤효숙
2013.04.10 08:19
사랑으로 떡을 떼며
-뉴욕 체험기(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윤효숙
내가 미국에 온 지 벌써 20여일이 되었다. 지난해 딸의 산후조리 때문에 석 달간 머물렀을 때가 생각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힘들었다. 더구나 교통사고 후유증도 채 가시지 않아 다리가 아파 요리를 할 때도 의자를 놓고 앉아서 했었다. 산후조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런 와중에서도 뉴욕에 사는 친구를 만나 지하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관광하고 와서는 완전히 드러누워 3일간 도우미를 쓰는 등 추억거리도 많다. 그땐 산후조리를 도와야 한다는 임무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 스스로 미국에 왔다. 딸 둘을 거의 연년생으로 둔 큰딸을 도와주고 오라는 남편 때문이었다. 딸 또한 일생에 가장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어, 교회의 봉사와 내 생활을 잠시 접고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주자는 모성애의 발로라고나 할까? 산후조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딸도 요리를 한 끼씩 맡아서 하고 세탁기도 딸이 돌리며, 힘든 것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피곤한지 어떤 땐 ‘내가 뭐하려고 이 미국 땅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할까 생각될 때도 있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예배의 회복’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의무감에 시간 시간마다 거의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린 때가 많았다. 물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얼마나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교회의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게 되자,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 속도 모르는 병원 청소부 아주머니는 내가 아파서 우는 줄 알고 “내가 아프면 남편도 다 필요 없고 아픈 사람만 갑갑해요.”라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그런 감동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고, 일주간의 생활계획을 교회행사에 맞춰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바쁘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사위가 청소년부 사역을 맡은 이곳 뉴욕 S교회에 와서 다시 한 번 예배의 기쁨을 회복하였다. 딸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교회는 세계 제일의 도시 뉴욕에 있는 교회답게 찬양대와 악기 팀도 수준급이어서 예배 때마다 큰 감동을 받는다. 더구나 요즈음 미국교회가 전자음악에 더 치중하는 경향으로 고전적인 분위기가 점점 약해지는 추세여서 우려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일찍이 다윗왕도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고 소고를 치며 찬양하라’지 않았던가? 물론 악기 팀을 운영하는 것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교회는 현악과 관악 등 꼭 필요한 악기를 동원하고 실력 있는 지휘자로 하여금 찬양으로 예배하는 모습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전달되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몇 곡의 찬양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 마음껏 찬양하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전 성도들은 따뜻한 식사로 사랑을 나눈다. 이런 일들은 어느 교회이건 다 그렇게 하는데 이 교회가 더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알고 보니 교회의 성도 중 1년분 쌀을 제공하는 분도 있고, 식품점을 운영하는 분들이 부식을 많이 보조해주어 다른 교회보다 더 풍성하다는 것이었다.
사위는 2주에 한 번씩 구역예배를 인도하러 간다. 지난 3일은 사위의 생일이었다. 구역성도들은 정상적인 예배 일정을 바꾸어 생일 전야제를 치러 주었다. 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거의 육십이 넘으신 어른들이 이제 36세 된 젊은 목사, 그것도 청소년부 지도목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약속하고, 모으고, 준비하는 마음들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교회를 개척한 지 37년이 되었다는 백발이 성성한 어떤 권사님은 언제부터 미국에 오셔서 자리를 잡고, 이 미국 땅에서 이렇게 누리고 사실까? 선각자 중에 선각자가 아닌가? 또 대형 슈퍼마켓을 세 개나 운영하신다는 권사님은 미국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부자마을의 저택에 살면서 어려운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바로 욥의 모습이 아닌가? 참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생각되었다.
구역예배 한 번 드리고 사랑을 듬뿍 받고 와서 깨닫는 바가 컸다. 나도 한국에 가면 좀 더 나누고, 섬기고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장로로서 한다고 했지만, 여건상 마음은 있었어도 실천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이튿날 수요일은 사위의 생일이었다. 교회에서는 사모님이 주선한 생일 파티가 열렸다. 이 교회는 수요일 저녁에도 식사를 제공하여 직장에서 바로 교회로 오는 성도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일용할 양식을 제공 받으니 어찌 교회에 가는 게 기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의 어떤 집사님은 믿음이 별로 없었는데 미국 유학시절 교회로 밥 먹으러 다니다가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그만큼 밥상공동체가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교회에서 늘 식사를 제공하는 일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모님을 비롯한 숨은 봉사자들의 수고로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고 본다.
항상 따뜻한 밥이 있고, 말씀과 기도, 풍성한 사랑이 있는 뉴욕 S교회에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42)고 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다
(2013.4.9. 뉴욕 S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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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이스라엘의 2대왕으로 지금까지도 이스라앨 민족에게 존경 받고 있음
구역예배: 정규 주일 예배 외에 지역별로 소그룹으로 나누어 예배와 교제를 나눔
욥: 중동지방의 최대 부자로 믿음과 구제에 힘쓴 성경상의 인물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처음으로 교회를 세움
-뉴욕 체험기(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윤효숙
내가 미국에 온 지 벌써 20여일이 되었다. 지난해 딸의 산후조리 때문에 석 달간 머물렀을 때가 생각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힘들었다. 더구나 교통사고 후유증도 채 가시지 않아 다리가 아파 요리를 할 때도 의자를 놓고 앉아서 했었다. 산후조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런 와중에서도 뉴욕에 사는 친구를 만나 지하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관광하고 와서는 완전히 드러누워 3일간 도우미를 쓰는 등 추억거리도 많다. 그땐 산후조리를 도와야 한다는 임무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 스스로 미국에 왔다. 딸 둘을 거의 연년생으로 둔 큰딸을 도와주고 오라는 남편 때문이었다. 딸 또한 일생에 가장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어, 교회의 봉사와 내 생활을 잠시 접고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주자는 모성애의 발로라고나 할까? 산후조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딸도 요리를 한 끼씩 맡아서 하고 세탁기도 딸이 돌리며, 힘든 것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피곤한지 어떤 땐 ‘내가 뭐하려고 이 미국 땅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할까 생각될 때도 있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예배의 회복’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의무감에 시간 시간마다 거의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린 때가 많았다. 물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얼마나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교회의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게 되자,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 속도 모르는 병원 청소부 아주머니는 내가 아파서 우는 줄 알고 “내가 아프면 남편도 다 필요 없고 아픈 사람만 갑갑해요.”라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그런 감동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고, 일주간의 생활계획을 교회행사에 맞춰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바쁘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사위가 청소년부 사역을 맡은 이곳 뉴욕 S교회에 와서 다시 한 번 예배의 기쁨을 회복하였다. 딸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교회는 세계 제일의 도시 뉴욕에 있는 교회답게 찬양대와 악기 팀도 수준급이어서 예배 때마다 큰 감동을 받는다. 더구나 요즈음 미국교회가 전자음악에 더 치중하는 경향으로 고전적인 분위기가 점점 약해지는 추세여서 우려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일찍이 다윗왕도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고 소고를 치며 찬양하라’지 않았던가? 물론 악기 팀을 운영하는 것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교회는 현악과 관악 등 꼭 필요한 악기를 동원하고 실력 있는 지휘자로 하여금 찬양으로 예배하는 모습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전달되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몇 곡의 찬양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 마음껏 찬양하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전 성도들은 따뜻한 식사로 사랑을 나눈다. 이런 일들은 어느 교회이건 다 그렇게 하는데 이 교회가 더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알고 보니 교회의 성도 중 1년분 쌀을 제공하는 분도 있고, 식품점을 운영하는 분들이 부식을 많이 보조해주어 다른 교회보다 더 풍성하다는 것이었다.
사위는 2주에 한 번씩 구역예배를 인도하러 간다. 지난 3일은 사위의 생일이었다. 구역성도들은 정상적인 예배 일정을 바꾸어 생일 전야제를 치러 주었다. 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거의 육십이 넘으신 어른들이 이제 36세 된 젊은 목사, 그것도 청소년부 지도목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약속하고, 모으고, 준비하는 마음들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교회를 개척한 지 37년이 되었다는 백발이 성성한 어떤 권사님은 언제부터 미국에 오셔서 자리를 잡고, 이 미국 땅에서 이렇게 누리고 사실까? 선각자 중에 선각자가 아닌가? 또 대형 슈퍼마켓을 세 개나 운영하신다는 권사님은 미국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부자마을의 저택에 살면서 어려운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바로 욥의 모습이 아닌가? 참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생각되었다.
구역예배 한 번 드리고 사랑을 듬뿍 받고 와서 깨닫는 바가 컸다. 나도 한국에 가면 좀 더 나누고, 섬기고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장로로서 한다고 했지만, 여건상 마음은 있었어도 실천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이튿날 수요일은 사위의 생일이었다. 교회에서는 사모님이 주선한 생일 파티가 열렸다. 이 교회는 수요일 저녁에도 식사를 제공하여 직장에서 바로 교회로 오는 성도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일용할 양식을 제공 받으니 어찌 교회에 가는 게 기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의 어떤 집사님은 믿음이 별로 없었는데 미국 유학시절 교회로 밥 먹으러 다니다가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그만큼 밥상공동체가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교회에서 늘 식사를 제공하는 일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모님을 비롯한 숨은 봉사자들의 수고로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고 본다.
항상 따뜻한 밥이 있고, 말씀과 기도, 풍성한 사랑이 있는 뉴욕 S교회에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42)고 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다
(2013.4.9. 뉴욕 S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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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이스라엘의 2대왕으로 지금까지도 이스라앨 민족에게 존경 받고 있음
구역예배: 정규 주일 예배 외에 지역별로 소그룹으로 나누어 예배와 교제를 나눔
욥: 중동지방의 최대 부자로 믿음과 구제에 힘쓴 성경상의 인물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처음으로 교회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