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우리 집 10대 뉴스/김미자
2011.01.12 07:19
생각을 바꾸고 꿈을 찾은 경인년
-2010년 우리 집 10대 뉴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김미자
위풍당당 나타났던 백 호랑이가 온 세상을 한바탕 뒤흔들더니 흐르는 시간 앞엔 어쩌지 못하고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고 있다. 그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려니 하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달려온 한 해였다.
1.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입학
흘러간 시간 속에 묻어두었던 꿈 하나를 찾았다. 수필반에서 만난 동갑내기 꼬임에(?) 빠져 탁월한 선택을 해버렸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 원서를 내고 돌아오던 그 길은 꽃길이었다. 2010년 3월 1일 입학식에서 만난 학우들의 여러 모습에서 설렘과 희망을 보았다. 그들과의 만남도 소중한 추억으로 이어지길 기도해본다.
2. 내 이름 앞에 수식어가 하나 생겼다
2010년 3월 12일 에세이스트에서 <수제비는 마셨고 커피는 먹었다>라는 작품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던 날, 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의 권유로 겁 없이 뛰어든 수필의 바다에서 ‘수필가’ 라는 대어를 낚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두려움이 앞서지만 서두르지 않고 그 길을 꾸준히 뚜벅뚜벅 가고 싶다. 편한 글을 쓰고 싶다. 내 가슴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진솔한 글을 쓰고 싶다.
3. 시험 愛 빠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한 학기에 3일 학교에 출석하여 수업을 받고, 그 나머지는 혼자 공부해야한다. 필요한 정보도 나누고 공부도 같이하기 위해 학우들과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 첫 출석 수업을 마치고 시험을 보았다. 몇 년 만에 보는 시험인가. 문득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시험 빼먹고 왔던 날 엄마에게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맞은 일이 있었다. 산수시험이었을 것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다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왔던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우리나라 국어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시험만 본 것 같았다. 중간고사, 과제물 제출,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니 어느덧 1학년이 끝났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 시험 愛 빠져 살아야 할 것 같다.
4. 아들, 이기수 호주유학에서 돌아오다
내 최고의 히트 상품, 작은 아들이 2년 동안의 호주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26년 전 할아버지로부터 날짜와 시간을 받아서 예수병원을 떠들썩하게 하고 태어난 아이다. ‘두고 봐라. 큰 자리 하나 차지할 것이다’라는 시아버님의 말씀을 새기며 기다리고 있건만 아직까지 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려서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들을 다 잡아다가 병속에 넣어두고 관찰하기에, 옳지 생물학자가 되려나 보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언변이 좋아서 친구들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 보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시아버님께서 날짜 계산을 잘못하신 성싶다. 남은 학교공부를 마치면 또다시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그 아이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5. 미국 시누이 다녀가시다
20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던 남편의 작은 누님이 오셨다.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서 오셨다고 했다. 한 달 동안 계시면서 여기저기 고향의 모습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아이들을 위해서 선택한 이민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성공하여 보람을 느낀다고 하시면서도, 죽어서도 오지 못할 고향을 생각하면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문득 나도 고향에 가고 싶다.
6. 조카, 이범수 다녀가다
10년 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났던 큰형님의 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휴가를 보내려 귀국했다. 30대인 나를 할머니로 만들어 준 조카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아주 잘 키운 것 같았다. 딸아이는 올해 버클리대학에 합격했다고 한다.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아들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고등학생이 되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하는 조카의 말에, 그간의 고생을 알 것 같았다. 그 아이들의 앞날에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
7. 이모와 함께 보낸 2박 3일
'이모'라는 말만 들어도 정겹다. 내 어린 시절 나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엄마 같았던 '이모'가 추석날 우리 집에 오셨다. 원준이와 성준이도 함께 왔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서울에서 살던 이모는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셨다. 방학하면 이모집에 가서 보내곤 했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모에게 한 번도 보답을 하지 못했다. 추석연휴동안 이모와 함께하면서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보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이모, 사랑합니다.
8. 소명 하나 내려놓았다
나는 천주교신자다. 내 생애에서 우선순위는 하느님이시다. 그분 안에 있으면 세상에 두려움이 없어진다. 내가 밑바닥으로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만난 그 분은 나의 손을 잡고 걸어주셨다. 지금도 내 앞에 서서 걸어가시며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 고 속삭이신다. 내가 다니는 화산동성당에서 매주 주보를 만들어 온 지가 10여 년째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나오던 월보를 2년 전부터는 매주 만들고 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신자수가 500명 정도인 아담한 성당이다. 지난 11월에 무사히 그 홍보부장 직을 내려놓았다. 돌아보면 우리 성당이 설립 된 지 올해로 20년이다. 그 절반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한 몫 했으니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9. 10년 만에 담그는 김장
장사를 한다는 이유로 친정엄마가 담가주시는 김치를 먹고 살았다. 올해는 내가 김장을 하겠노라고 엄마께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막막하였다. 사촌형님들이 오셔서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시작한 김장이 배추절임부터 난항이었다. 소금간이 약했는지 배추들이 다시 밭으로 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어찌어찌 달래고 어루만져 ‘제발 맛있게만 익어다오’ 하고 토닥이며 김장을 마치니 새삼 엄마의 손맛에 애정이 서린다.
10. 생각을 바꾸다
나에게 못된 성격이 하나 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되도록 보지 않으려 한다. 왜 그리도 냉정하냐고 남편에게 핀잔을 들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타고난 성격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러다보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 예수님 탄생하시던 날 고해성사를 보면서 묵상에 잠겼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 말씀 중에 ‘나에게 예물을 바치러 올 때 너와 불화한 형제가 있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오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머무르니 나의 못된 성격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바꾸면 나부터 행복해질 것 같았다. 이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올 때 닫혔던 문을 하나 열어보려 한다. 가장 가까운 내 형님에게 닫아둔 문을 내가 먼저 손 내밀어 열어야겠다.
인생은 순례의 길이라 하지 않던가, 그 순례의 길이 어찌 평탄하기만 하겠는가?
풋풋한 젊은이들을 삼켜버린 천안함이, 불타던 연평도가, 구제역과 조류독감에 수난을 겪는 가축들이 가는 해를 우울하게 하였지만 내일 또다시 떠오르는 해가 있어, 그래도 살맛나는 세상이 되겠지 기대한다. 꿈과 희망을 안고 신묘년 새해를 맞아야겠다.
-2010년 우리 집 10대 뉴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김미자
위풍당당 나타났던 백 호랑이가 온 세상을 한바탕 뒤흔들더니 흐르는 시간 앞엔 어쩌지 못하고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고 있다. 그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려니 하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달려온 한 해였다.
1.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입학
흘러간 시간 속에 묻어두었던 꿈 하나를 찾았다. 수필반에서 만난 동갑내기 꼬임에(?) 빠져 탁월한 선택을 해버렸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 원서를 내고 돌아오던 그 길은 꽃길이었다. 2010년 3월 1일 입학식에서 만난 학우들의 여러 모습에서 설렘과 희망을 보았다. 그들과의 만남도 소중한 추억으로 이어지길 기도해본다.
2. 내 이름 앞에 수식어가 하나 생겼다
2010년 3월 12일 에세이스트에서 <수제비는 마셨고 커피는 먹었다>라는 작품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던 날, 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의 권유로 겁 없이 뛰어든 수필의 바다에서 ‘수필가’ 라는 대어를 낚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두려움이 앞서지만 서두르지 않고 그 길을 꾸준히 뚜벅뚜벅 가고 싶다. 편한 글을 쓰고 싶다. 내 가슴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진솔한 글을 쓰고 싶다.
3. 시험 愛 빠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한 학기에 3일 학교에 출석하여 수업을 받고, 그 나머지는 혼자 공부해야한다. 필요한 정보도 나누고 공부도 같이하기 위해 학우들과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 첫 출석 수업을 마치고 시험을 보았다. 몇 년 만에 보는 시험인가. 문득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시험 빼먹고 왔던 날 엄마에게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맞은 일이 있었다. 산수시험이었을 것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다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왔던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우리나라 국어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시험만 본 것 같았다. 중간고사, 과제물 제출,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니 어느덧 1학년이 끝났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 시험 愛 빠져 살아야 할 것 같다.
4. 아들, 이기수 호주유학에서 돌아오다
내 최고의 히트 상품, 작은 아들이 2년 동안의 호주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26년 전 할아버지로부터 날짜와 시간을 받아서 예수병원을 떠들썩하게 하고 태어난 아이다. ‘두고 봐라. 큰 자리 하나 차지할 것이다’라는 시아버님의 말씀을 새기며 기다리고 있건만 아직까지 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려서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들을 다 잡아다가 병속에 넣어두고 관찰하기에, 옳지 생물학자가 되려나 보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언변이 좋아서 친구들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 보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시아버님께서 날짜 계산을 잘못하신 성싶다. 남은 학교공부를 마치면 또다시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그 아이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5. 미국 시누이 다녀가시다
20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던 남편의 작은 누님이 오셨다.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서 오셨다고 했다. 한 달 동안 계시면서 여기저기 고향의 모습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아이들을 위해서 선택한 이민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성공하여 보람을 느낀다고 하시면서도, 죽어서도 오지 못할 고향을 생각하면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문득 나도 고향에 가고 싶다.
6. 조카, 이범수 다녀가다
10년 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났던 큰형님의 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휴가를 보내려 귀국했다. 30대인 나를 할머니로 만들어 준 조카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아주 잘 키운 것 같았다. 딸아이는 올해 버클리대학에 합격했다고 한다.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아들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고등학생이 되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하는 조카의 말에, 그간의 고생을 알 것 같았다. 그 아이들의 앞날에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
7. 이모와 함께 보낸 2박 3일
'이모'라는 말만 들어도 정겹다. 내 어린 시절 나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엄마 같았던 '이모'가 추석날 우리 집에 오셨다. 원준이와 성준이도 함께 왔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서울에서 살던 이모는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셨다. 방학하면 이모집에 가서 보내곤 했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모에게 한 번도 보답을 하지 못했다. 추석연휴동안 이모와 함께하면서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보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이모, 사랑합니다.
8. 소명 하나 내려놓았다
나는 천주교신자다. 내 생애에서 우선순위는 하느님이시다. 그분 안에 있으면 세상에 두려움이 없어진다. 내가 밑바닥으로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만난 그 분은 나의 손을 잡고 걸어주셨다. 지금도 내 앞에 서서 걸어가시며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 고 속삭이신다. 내가 다니는 화산동성당에서 매주 주보를 만들어 온 지가 10여 년째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나오던 월보를 2년 전부터는 매주 만들고 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신자수가 500명 정도인 아담한 성당이다. 지난 11월에 무사히 그 홍보부장 직을 내려놓았다. 돌아보면 우리 성당이 설립 된 지 올해로 20년이다. 그 절반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한 몫 했으니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9. 10년 만에 담그는 김장
장사를 한다는 이유로 친정엄마가 담가주시는 김치를 먹고 살았다. 올해는 내가 김장을 하겠노라고 엄마께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막막하였다. 사촌형님들이 오셔서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시작한 김장이 배추절임부터 난항이었다. 소금간이 약했는지 배추들이 다시 밭으로 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어찌어찌 달래고 어루만져 ‘제발 맛있게만 익어다오’ 하고 토닥이며 김장을 마치니 새삼 엄마의 손맛에 애정이 서린다.
10. 생각을 바꾸다
나에게 못된 성격이 하나 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되도록 보지 않으려 한다. 왜 그리도 냉정하냐고 남편에게 핀잔을 들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타고난 성격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러다보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 예수님 탄생하시던 날 고해성사를 보면서 묵상에 잠겼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 말씀 중에 ‘나에게 예물을 바치러 올 때 너와 불화한 형제가 있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오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머무르니 나의 못된 성격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바꾸면 나부터 행복해질 것 같았다. 이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올 때 닫혔던 문을 하나 열어보려 한다. 가장 가까운 내 형님에게 닫아둔 문을 내가 먼저 손 내밀어 열어야겠다.
인생은 순례의 길이라 하지 않던가, 그 순례의 길이 어찌 평탄하기만 하겠는가?
풋풋한 젊은이들을 삼켜버린 천안함이, 불타던 연평도가, 구제역과 조류독감에 수난을 겪는 가축들이 가는 해를 우울하게 하였지만 내일 또다시 떠오르는 해가 있어, 그래도 살맛나는 세상이 되겠지 기대한다. 꿈과 희망을 안고 신묘년 새해를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