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괴로워서 그늘을 만든다 / 임철순
2011.02.04 05:34
2008년 5월 소설가 박경리 씨가 타계했을 때, 박완서 씨는 눈물로 조사를 낭독하면서 “당신은 나의 친정어머니였다”고 애도했습니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을 때 손수 지어 주신 따뜻한 밥과 배추속대국을 눈물범벅으로 먹게 하신 박경리 선생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명복을 빌었습니다. 겨우 다섯 살 많은 박경리 씨를 친정어머니라고 말한 데서 두 분의 사랑과 도타운 정, 박완서 씨의 겸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안 돼 지난 22일 타계한 박완서 씨는 박경리 씨에 대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 받고 있습니다. 문인들은 박완서 씨를 “한국 문단의 친정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모성적 포용력으로 후배들을 늘 보살피고 감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후배 문인들에게 나무 같은 분이었다. 기댈 수 있는 나무가 없어진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라는 말(소설가 김연수)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의 넓은 그늘 아래 고단한 날개를 잠시 내려놓고 쉬던 짧은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소설가 정이현)고 문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박씨를 애도하는 말에서는 나무와 그늘, 이 두 단어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박씨는 그들에게 넓은 그늘로 쉴 수 있게 해 준 나무와 같았지만, 그에게도 그런 나무와 그늘은 당연히 있습니다.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를 지난해 봄 만나고 돌아올 때, 박씨는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카드에 써 주었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2009년에 선종했을 때는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 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 않았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고 추모했습니다.
박씨는 23년 전에 사별한, 용인 천주교묘지의 남편과 아들 곁으로 갔습니다. 생전에 말했던 대로, “뭐가 그리 급해서 에미를 앞질러 갔느냐?”고 엄마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종아리부터 때려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김 추기경의 묘소가 자신의 묘소에서 멀지 않은 게 저승의 큰 빽이라고 농담했던 박씨는 저승에서도 김 추기경의 그늘에 있는 것을 기꺼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박씨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자락의 집에는 살구나무 산수유 목련 등의 나무가 많았습니다. 특히 산수유는 인근에서 박씨 집에만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노란 꽃을 보며 봄을 느낄 때 자신이 행복이라도 베푼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던 나무입니다. 또 살구로는 즐겨 ‘박완서 표’잼을 만들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습니다.
소설가 김연수 씨는 그 댁 마당에 서 있던 목련에 대한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려 주고 있습니다. 어느 해 봄인가 찾아갔을 때 나무 전체가 한 송이 꽃처럼 환하게 핀 목련을 보고 참 예쁘다고 했더니 의외로 “봄만 되면 염치도 없이 꽃을 너무 많이 피워서 나는 보기 싫어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활짝 핀 목련에서도 염치를 따졌던 반듯한 감성과 겸허함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2008년 7월에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 씨에 대해서 쓴 글도 그의 겸손을 잘 알게 해 줍니다. 이씨는 문단 연령으로는 선배이고 살아낸 햇수로는 한참 후배이지만 마음으로는 스승이었답니다. 장편 <나목>으로 등단한 다음 해인 1971년, 이씨의 첫 번째 창작집 <별을 보여 드립니다>를 읽고 또 읽으면서 크게 배웠다고 합니다. 습작기가 없이 작가로 데뷔한 주부는 그가 초대해준 세계에 들어가 배회하는 사이에 담 밖의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뒤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저 어렵기만 해서 함부로 대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스승이니까.
박씨는 늘 수줍은 소녀나 새색시 같았고, 잘 앞에 나서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문인들과 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삶으로 곱씹은 이야기꾼으로서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데뷔작의 제목이 나무에 관한 것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더욱 더 박완서 씨를 그늘이 깊은 나무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무의 작은 생채기는 커가면서 아물어지나.
아니지, 생채기도 함께 자라나지.
비와 바람에 시달리고 부대끼면
나무는 더 강해진다지만
그 몸의 상처도
잊지 않고 견고해지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네.
나무는 괴로워서 그늘을 만드는데
그 상처 가리려고 그늘을 만드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잘 모른다네.
언젠가 내가 끄적거린 <나무는 괴로워서 그늘을 만든다>의 일부입니다. 그 동안 잊고 있다가 박완서 씨를 애도하는 문인들의 말을 들으면서 갑자기 이게 다시 생각났습니다.
박완서 씨는 아들을 앞세우는 참척을 당했고, 그 어머니도 6ㆍ25 때 아들을 잃었습니다. 대를 이은 참척과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박씨는 “극복한 게 아니라 견딘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고통과 상처가 클수록 나무는 더 자라고, 나무의 그늘도 함께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늘에서 쉰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남들이 쉴 만한 그늘을 또 새로 만들어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필자소개: 임철순
1974년부터 한국일보 근무. 현재 주필. 시와 술과 유머를 사랑하고,
불의와 용렬을 미워하려 애쓰고 있음. 호는 淡硯(담연).
[출처: www.freecolumn.co.kr 자유칼럼그룹, 2011.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