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롯가의 추억/이희석
2014.03.15 07:07
화롯가의 추억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이희석
아직 이른 봄이다. 연이틀 비가 내리더니 뒤뜰의 산수유가 일제히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을 반기고 있으나 꽃샘추위는 품속으로 파고든다. 잇따른 바깥나들이를 하며 싸늘한 바람을 쐬다 보니 몸이 으슬으슬 춥다.‘삼복더위에도 화롯불을 쬐다 말면 서운하다.’는 속담처럼 한더위에도 화롯불을 떠나기 싫어하거늘, 오늘처럼 으스스 몸살감기 기운이 있는 날에는 따뜻한 온돌방의 화롯불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겨울바람을 겪고도 봄바람 보고 춥다고 하는 것 같아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쿨룩쿨룩 기침이 계속 나와 밤새 잠을 설쳤다. 아무래도 몸살감기가 도진 것 같아 종합병원을 찾았다. 진료대기실이 유난히 포근하여 살펴보니 대형 온풍기가 가동되고 있었다. 그 앞에서 간호사 두 사람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문득 화롯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화롯불을 쬐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시절에는 어느 집에 가던지 화로 없는 집이 없었다. 또 화로에 얽힌 인정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날, 나그네가 어느 외딴 오두막집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주인은 손님을 맞아 아랫목에 앉기를 권하는 것이 우리네 인정이었다. 불을 담아 다독거려 두었던 화롯불을 부삽으로 헤쳐 주면서 언 손을 쬐라고 권하면 이는 최상의 대접이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며느리의 괴로운 일 하나가 화롯불 간수였다. 불이 재물을 상징했으므로 불씨를 꺼뜨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여겨 며느리는 그걸 잘 보관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종손이 이사하는 새집에 불씨 화로를 들고 먼저 방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거나 향교에서 제례를 올릴 때 특정한 집에서 옮겨다 쓰기도 했다.
이처럼 화로는 우리네 선조의 순박한 인정이 담겨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 지혜가 담긴 전통 생활도구였다. 질화로도 좋고 쇠화로라도 좋았다. 어느 것이든 반지르르한 그 화로를 보면 아늑한 전통의 맛을 느낀다. 화롯불을 쬐며 할머니의 옛날 얘기를 듣고, 화로에서 구운 군밤을 호호 불며 먹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졌다면 그게 바로 정겨운 고향 맛이리라. 더구나 노변(爐邊)의 정담은 얼마나 구수하고 따사로웠던지…….
화로 주위에 둘러앉으면 자연스럽게 정담이 오갔다. 그 당시 나는 화롯가에서 들었던 심청전, 춘향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 같은 옛이야기를 통하여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에게 들었던 여러 가지 소금장수 이야기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따금 추억의 빛에 싸여 되살아날 때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부지런했던 우리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빨간 화롯불을 지피고 엽렵하게 인두로 동정 깃을 다리셨다. 인두가 너무 뜨겁지 않은가 코끝 가까이 대보며 느끼는 열의 감각이나 그 모습은 아무나 흉내 내지 못했다.
또한, 화롯불에 빙 둘러앉아 구워먹던 인절미나 찹쌀떡도 별미였다. 화로 속에서 이따금 군밤이 툭 나와 놀랍고 반가웠던 추억도 새롭다. 고구마를 화롯불에 구워먹던 그 맛도 결코 잊을 수 없다.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 때는 군고구마의 맛은 더 좋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파는 군고구마 맛이나 멋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군고구마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나에겐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추억거리다.
엄동설한 새벽이면 어머니가 안방에 화롯불부터 먼저 들여 놓으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데웠던 구들장은 새벽이면 식기 마련이고, 창호지를 바른 방문은 외풍이 있어 환기에는 좋으나 추위를 타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새벽부터 노인들에게는 온기가 절실해짐은 말할 나위가 없었을 테니 오죽이나 화롯불이 고마웠으랴. 반면에 융융거리는 밤바람이 말을 달리면 젊은이들은 쉬 잠이 깨어 부지런해질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땅거미가 지면 빨간 숯불 싸라기 화로에 부젓가락을 걸쳐 찌개가 졸지 않게 하면서, 올려놓은 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는 찌개의 그윽한 내음은 출타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정이었다.
한편 어린아이는 화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금기가 있었다.
“애들이 화롯불을 쬐면 피가 마른다.”
어른들 노변정담에 애들이 끼어드는 것을 금기로 삼은 일면도 있고, 자칫 화로 주변에서 헛짚기라도 하면 화상을 입기 십상인 것을 경계한 일이었다. 또 화롯불 가까이 오래 앉아 있으면 숯머리를 앓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월에 묻혀 50년이나 화롯불을 잊고 살아 왔다. 유년 시절 사용했던 무쇠 화로가 머릿속에 떠올라 집안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찾아보아도 없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얼마 전까지 보았다고 단언하더니 이내 골동품 수집하는 사람들이 가져간 모양이라고 말을 바꿨다. 아쉬웠다. 새로 하나 사들여야겠다.
다가오는 겨울,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밤이 오면 화롯불을 피워 놓고 술을 따끈히 데워 사랑하는 가족과 오붓이 한 잔 마셔야겠다. 화롯가의 그윽한 정조(情調)와 조용한 기분이며 눈이 내리는 밤에 다른 내방자가 없으라는 믿음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게 할 것 같다.
화롯가의 이야기는 이웃을 더욱 정겹게 하지만 가족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 더운 바람이 나오고 따뜻하게 해주는 요즘의 쾌적한 난방 기구에도 정이 담긴 따사로움이 곁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쉬움은 지나친 욕심일까.
(2014.3.14.)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이희석
아직 이른 봄이다. 연이틀 비가 내리더니 뒤뜰의 산수유가 일제히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을 반기고 있으나 꽃샘추위는 품속으로 파고든다. 잇따른 바깥나들이를 하며 싸늘한 바람을 쐬다 보니 몸이 으슬으슬 춥다.‘삼복더위에도 화롯불을 쬐다 말면 서운하다.’는 속담처럼 한더위에도 화롯불을 떠나기 싫어하거늘, 오늘처럼 으스스 몸살감기 기운이 있는 날에는 따뜻한 온돌방의 화롯불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겨울바람을 겪고도 봄바람 보고 춥다고 하는 것 같아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쿨룩쿨룩 기침이 계속 나와 밤새 잠을 설쳤다. 아무래도 몸살감기가 도진 것 같아 종합병원을 찾았다. 진료대기실이 유난히 포근하여 살펴보니 대형 온풍기가 가동되고 있었다. 그 앞에서 간호사 두 사람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문득 화롯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화롯불을 쬐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시절에는 어느 집에 가던지 화로 없는 집이 없었다. 또 화로에 얽힌 인정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날, 나그네가 어느 외딴 오두막집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주인은 손님을 맞아 아랫목에 앉기를 권하는 것이 우리네 인정이었다. 불을 담아 다독거려 두었던 화롯불을 부삽으로 헤쳐 주면서 언 손을 쬐라고 권하면 이는 최상의 대접이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며느리의 괴로운 일 하나가 화롯불 간수였다. 불이 재물을 상징했으므로 불씨를 꺼뜨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여겨 며느리는 그걸 잘 보관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종손이 이사하는 새집에 불씨 화로를 들고 먼저 방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거나 향교에서 제례를 올릴 때 특정한 집에서 옮겨다 쓰기도 했다.
이처럼 화로는 우리네 선조의 순박한 인정이 담겨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 지혜가 담긴 전통 생활도구였다. 질화로도 좋고 쇠화로라도 좋았다. 어느 것이든 반지르르한 그 화로를 보면 아늑한 전통의 맛을 느낀다. 화롯불을 쬐며 할머니의 옛날 얘기를 듣고, 화로에서 구운 군밤을 호호 불며 먹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졌다면 그게 바로 정겨운 고향 맛이리라. 더구나 노변(爐邊)의 정담은 얼마나 구수하고 따사로웠던지…….
화로 주위에 둘러앉으면 자연스럽게 정담이 오갔다. 그 당시 나는 화롯가에서 들었던 심청전, 춘향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 같은 옛이야기를 통하여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에게 들었던 여러 가지 소금장수 이야기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따금 추억의 빛에 싸여 되살아날 때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부지런했던 우리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빨간 화롯불을 지피고 엽렵하게 인두로 동정 깃을 다리셨다. 인두가 너무 뜨겁지 않은가 코끝 가까이 대보며 느끼는 열의 감각이나 그 모습은 아무나 흉내 내지 못했다.
또한, 화롯불에 빙 둘러앉아 구워먹던 인절미나 찹쌀떡도 별미였다. 화로 속에서 이따금 군밤이 툭 나와 놀랍고 반가웠던 추억도 새롭다. 고구마를 화롯불에 구워먹던 그 맛도 결코 잊을 수 없다.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 때는 군고구마의 맛은 더 좋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파는 군고구마 맛이나 멋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군고구마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나에겐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추억거리다.
엄동설한 새벽이면 어머니가 안방에 화롯불부터 먼저 들여 놓으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데웠던 구들장은 새벽이면 식기 마련이고, 창호지를 바른 방문은 외풍이 있어 환기에는 좋으나 추위를 타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새벽부터 노인들에게는 온기가 절실해짐은 말할 나위가 없었을 테니 오죽이나 화롯불이 고마웠으랴. 반면에 융융거리는 밤바람이 말을 달리면 젊은이들은 쉬 잠이 깨어 부지런해질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땅거미가 지면 빨간 숯불 싸라기 화로에 부젓가락을 걸쳐 찌개가 졸지 않게 하면서, 올려놓은 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는 찌개의 그윽한 내음은 출타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정이었다.
한편 어린아이는 화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금기가 있었다.
“애들이 화롯불을 쬐면 피가 마른다.”
어른들 노변정담에 애들이 끼어드는 것을 금기로 삼은 일면도 있고, 자칫 화로 주변에서 헛짚기라도 하면 화상을 입기 십상인 것을 경계한 일이었다. 또 화롯불 가까이 오래 앉아 있으면 숯머리를 앓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월에 묻혀 50년이나 화롯불을 잊고 살아 왔다. 유년 시절 사용했던 무쇠 화로가 머릿속에 떠올라 집안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찾아보아도 없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얼마 전까지 보았다고 단언하더니 이내 골동품 수집하는 사람들이 가져간 모양이라고 말을 바꿨다. 아쉬웠다. 새로 하나 사들여야겠다.
다가오는 겨울,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밤이 오면 화롯불을 피워 놓고 술을 따끈히 데워 사랑하는 가족과 오붓이 한 잔 마셔야겠다. 화롯가의 그윽한 정조(情調)와 조용한 기분이며 눈이 내리는 밤에 다른 내방자가 없으라는 믿음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게 할 것 같다.
화롯가의 이야기는 이웃을 더욱 정겹게 하지만 가족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 더운 바람이 나오고 따뜻하게 해주는 요즘의 쾌적한 난방 기구에도 정이 담긴 따사로움이 곁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쉬움은 지나친 욕심일까.
(2014.3.14.)